본문 바로가기
시리즈설교/절기설교

13.당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막11:1-10)(2018년 종려주일)

by 오용주목사 2018. 3. 29.

종려주일                                  13.당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11:1-10

 

오늘은 교회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특히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환호성을 쳤던 사실을 기념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부르며 특히 금요일은 십자가에 죽으신 성금요일이라 부르고, 돌아오는 주일새벽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날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그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종려주일을 지켜야 하는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특히 성경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모습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셨다. 이것이 왜 대단한 사건인가? 이것은 어쩌나보니 우연히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의 예언의 성취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성경은 수많은 예언, 약속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경전에는 예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에도, 유교의 논어, 도교의 도덕경에도 예언은 없습니다. 회교의 코란경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예언이 빗나간다면!! 그 종교 자체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과거 예수님이 몇 년, 몇 월, 며칠에 오신다고 한참 떠들어 되던 사람들 지금은 다 사라지고 흔적도 없습니다. 그 만큼 예언은 힘이 있지만 위험부담도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이렇게 위험한 예언들로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2000년이 지난 아직도 이 기독교가 존재하고 성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에 예언이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예언의 성취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예수님 오시기 약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런데 이 예언대로 500년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사야는 사53:1-9절에서 7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고난은 멸시와 찔림과 채찍에 상함으로 십자가 죽음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은 700년 후에 예수님에 의해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히 이렇게 되었을까요?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을까요?

 

“Peter Stone”라는 사람은 과학의 소리라는 책에서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시대의 예언한 8개가 성취 될 수학적인 확률은 1017자승 분의 1이라고 했습니다.

 

1017자승 분의 1이라는 말이 실감이 안가시죠? 텍사스 주에 텍사스는 우리나라 남한 의 3배 넓이정도 되는데 100원짜리 동전을 2피트, 60cm 높이로 쌓을 수 있는 계수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동전중 하나님의 동전에 표시를 해 놓고 섞어서 쌓아놓고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다 스톱을 하고 첫 동전을 잡았을 때 그 표시한 동전이 집힐 확률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8가지도 실현 가능성은 제로인데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300여 가지 이상의 예언이 예수님에게 성취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 한 것 아닙니까?

대표적인 예언만 해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탄생 장소, 애굽으로의 피난, 나사렛에서의 성장,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치유사역, 조롱과 멸시와 고난을 받으심, 십자가의 죽으심, 무덤에 장사지내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그런데 이 모든 예언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100% 성취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나는 내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다 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보세요! 구약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구원의 주님으로 오신다. 오신다. 그 예언대로 오셨다면 그 예수님이 이제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신다. 예언이 성취가 될까요? 안 될까요?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냥 입술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믿는 것으로 알아요. 아닙니다. 믿음은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게 됩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소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이 재림 안하실 것 같이 살아요. 예수 재림은 성경 속에만 있는 것이고, 전혀 재림과는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재림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보세요. 성경에 분명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고 했는데 한 죽을 것같이 살아요. 성경은 분명 지옥이 있다고 말씀하는데 우리 삶을 보면 지옥이 없는 것처럼 산다니까요.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는데 심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며 삽니다.

 

여러분 여기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온통 돈 욕심, 명예욕심, 권력욕심, 아파트 욕심, 성공욕심만 추구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시한부인생임을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아세요? 그런데 이걸 만 믿어요. 이 모든 것을 안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는 자들이요,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구원 받았겠습니까? 여러분이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벧후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따라서 우리는 야고보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5: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2.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많은 무리들이 왜 환영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 이 사실을 정말 믿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살게 되어있습니까? 예수님을, 만약 우리가 말로는 나는 예수님꺼라고 하지만 나를 위해 살면 실재 주인은 주님이 아니고 내가 주인인 것 맞죠? 실세?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의 무늬는 있는데 실제는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무리들이 환영했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외쳤습니다. 호산나, 무슨 말입니까? 지금 구원하소서” “부디 구원하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아세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몸 개그 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것은, 자기들이 로마식민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는데 그저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왜친 소리는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원 하소서” “부디 구원하소서는 영원한 죄에서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치적, 구조적, 사회적 구원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대단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랐는데 그 이유가 뭔 줄 다 아시죠?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보세요. 그렇게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는데 그게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자기 배부르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고상한 척, 거룩한 척,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척 하지만 그런데 목적이 예수님이 아닙니다.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헌금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잘 모릅니다. 누가 진짜이고, 누기 가짜인지, 그런데 언제 알 수 있느냐? 고난이 오면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인 드러납니다. 또 하나 아주 하나님이 높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부자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면 잘 못 오신 겁니다. 이런 사람은 가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 오셨다면 그것도 잘 못 오신 겁니다. 병원에 가시면 훨씬 많은 병자들을 고칩니다. 문제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면 시장이나 그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 믿음의 증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내가 죽고 예수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우리가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내리고, 버리고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삶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믿는 증거입니다.

이 삶이 내가 구원받은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 왜 예수님을 환영합니까?

만약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십자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3.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타신 나귀 주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11: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에 허락하는지라

 

여러분 이 나귀 주인이 왜 허락하였을까요? 주님이 주인 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게는 나름대로의 상징적이지만 나귀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재능, 물질, 시간, 건강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나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다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이런 교회를 원합니다. 이런 사람을 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족들은 이런 가족을 원합니다. 여러분의 이웃들도 이런 이웃을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들과 같이 사는 목적, 사는 방법, 자기들이 사는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주위에 늘려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오늘날 교회처럼 번듯한 성전이 없었고 돈도 없었고, 유력한 힘 있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굴복시키셨을까? 그 힘은 진실함, 정직함도 아니습니다., 그 힘은 예수님의 형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 작은 예수, 세상 사람들과는 사는 목적이, 사는 방법이, 가치관이 다른 사람 그 사람들이 교회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힘을 가졌지만 허무한데 저들은 가난한데 자신들이 갖지 못한 뭔가 신령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 그들로 과거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삶이란 노력하는 삶이 아니고, 되어지는 삶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도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인하여 되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과 우리 기독교가 다른 점이 뭔 줄 아십니까? 그들 모두는 다 자력구원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타력구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는 이것인데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입니다. 이 차이에 있습니다. 고전1:18절을 보세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위 성경 구절 속에는 십자가에 대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말씀처럼 십자가를 보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어리 섞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가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멸망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멸망 받는 다는 말은 사업이 안 되고, 가난하고 병든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옥에 갈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거듭난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보면 눈물이 나고, 감격이 있고,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느껴지고, 그 저주의 십자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여러분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 결과, 십자가의 의미를 잘 깨달아서 거듭나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거듭났기 때문에 깨달아지는 것입니까? 거듭났기 때문에 십자가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진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종교적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종교인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못갑니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욕심,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여전히 있다면 우리는 무늬만 교인이지 그 안에는 예수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나의 가치관을 포기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나의 가치관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참된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으로 증명될 수 없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십자가에 눈을 떠야 그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가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까? 미련해 보이십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대한 고백과 감격이 있습니까? 이 차이는 훗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능력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 했습니까? 벗어라 했습니까? 십자가를 지라 했습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런데 좋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모든 문제와 상황을 아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겠습니까? 귀한 것을 주겠습니까? 귀한 것을 주시겠죠? 그러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귀한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십자가는 귀하기 때문에 주셨을까요? 저주스럽기 때문에 주셨을까요? 귀하니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아는 눈이 떠져야 진짜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귀한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그 십자가가 저주스럽고, 고통스럽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고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라고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438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다는 말은 은유적 표현인데 죽는다는 뜻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을 통과하고 하나님 앞에 가면 그 십자가의 무게만큼 상이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영광이다.

 

시골에 가니까? 현수막이 붙었는데 아무게집 아들 국가대표 선발금메달을 딴 것이 아닙니다. 국가대표로 선발됐다고 현수막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대표 선발된 것이 좋아요? 떨어진 것이 좋아요? 선발 된 것이 좋죠. 그런데 떨어진 사람보다 훨씬 고통스러워요. ? 밥 먹고 싶은 대로 먹지 못해요. 쉬고 싶다고 다 쉬지도 못해요. 애인도 잘 못 만납니다. 선수촌에 들어가서 몇 년 동안 고생해야 합니다. 휴가도 없습니다. 명절 때 한번만 외출합니다. 그런데 국가대표에 떨어진 사람은 마음껏 놀 수 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믿음의 큰 틀은 이겁니다. 이 땅에서 고난 받는 만큼 하나님 앞에 가면 영광이 크다. 이 단순한 원리를 놓치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리어서 축복인 줄 모르는 겁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주셨을까? 왜 나에게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하셨을까? 왜 나에게 이렇게 가난한 가정을 주셔서 이렇게 살게 했을까? 이게 우연인 줄 알았는데, 재수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복이 없어 그런 줄 알았는데, 교회와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했대요. 그러니 더 성질이 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누리며 사는데... 그런데 이것은 십자가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유대 격언에 튼튼한 말에게 짐을 맡긴다는 말이 있답니다. 주인이 짐을 지게 할 때에는 다 알아서 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짐을 맡겼는데 쓰러져 버려서 짐까지 상하게 한다면 안 맡긴다는 겁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짐을 허락하셨다면 그 짐을 질만하니까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아멘입니까? 그러므로 나의 짐을 무겁다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야기 / 어제 자기가 졌던 짐이 제일 가벼운 것을 못 깨달은 겁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두 종류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 오래 다닌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또 한 부류는 십자가를 경험하여 통과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여전히 자기를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 삶은 하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겉은 익은 것 같은데 속은 하나도 익지 않은 계란처럼,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욕심, 판단, 후욕, 고집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 고집은 성격이 아니고 불신앙입니다. 성경에 완고함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삼상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여기 사신'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 등의 의미함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종교를 무장했지만 속에는 예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어째서 유익한가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그를 높여도 자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경험한 사람은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주님의 고난과 함께 견딥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보상이라는 겁니다.

 

인격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타고난 인격자

예수님 만나서 다듬어진 인격자 : 바울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나를 다듬어 간다.

예수님을 만나서 다듬어지는 인격이야 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이겠습니까?

 

요한은 원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다.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그런데 이랬던 요한이 훗날에 온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통과했기 때문 아닙니까?

 

가정과 교회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주봉 목사님 말씀대로 왜? 몇 년을 예수를 믿었는데도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믿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교회는 뭐 하러 다니냐? 어떤 불신자 남편이 자기 아내가 교회 가는 걸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 같다오면 3일간 좋대요. 그러니까 자꾸 교회를 가라는 겁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면 변합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직도 십자가가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십니까? 십자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게 십자가는 영광이요. 능력이요. 자랑입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결정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암탉이야기 /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가난해도, 오늘 죽는다 할지라도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닙니다. 왠지 아십니까? 천국으로 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그 일을 가능하게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십시오.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찬송가 150/ 갈보리산 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