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8 04.친밀함으로 나가는 길(4) 회개함
대하7:12-14
막10장 46절 이하에 소경 바디메오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시는데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랬더니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히 하라 하죠, 그랬더니 더 크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은 들은 예수님이 바디메오를 부르시고 이렇게 묻습니다. 막10:5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바디메오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예수님 돈 좀 주세요. 예수님께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람은 급한 것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 바디메오는 급한 것보다 중요한 것을 구합니다.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 이 대답은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대답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이 대답만큼 본질적이고 중요한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아니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하면서 이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 말이 깨달아 지도록 은혜를 구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드시더라도 말씀을 멸시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우리 편에서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편에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1.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성경을 읽느냐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습니다. (친밀함, 믿음으로 신뢰)
2) 하나님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 읽습니다. (그 일에 동참하도록)
3)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서 읽습니다. (순종하도록)
어떻게 읽느냐?
1) 내용을 알기 위해 통독 (매삼주오)
2) 깊이 있는 공부 (한 장이나 한 단락)
3) 읽고 -> 묵상 -> 기도 -> 조정과 순종
2.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성령의 조명을 위해서
1) 성령 하나님을 인정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2) 찬양과 경배
3) 중보기도
3. 하나님 알기를 사모해야 한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어떻게 사모하는가? 자꾸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꾸 물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말씀해 주세요.
4. 주님을 교제하는데, 주님을 찾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제거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은 회개의 깊이로 결정 된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 이 친밀함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하면 예들 들어 교회 찬양대에서 아무리 제대로 잘 가르쳐 놓아도, 그 찬양대원 중에 1명이 틀리게 부르면 그 틀린 사람을 따라서 부르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잘못된 것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해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그럼 그 방해요소가 무엇인가?
1) 거짓신앙체계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방해합니다.
거짓신앙체계란 무엇인가?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신앙의 모조품입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하면 신앙생활 = 의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의식을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율법주의라 하는데 율법주의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개념을 올바르게 잘 정리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개념을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찬양, 찬송이 뭐냐? 찬양은 예배를 준비하는 것,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준비찬송 몇 장 부르겠습니다. 찬송하면서 자리를 앞으로 당기겠습니다. 여러분 찬송은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찬송자체가 예배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기도를 그런 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우리 윗대 목사님들의 기도에 대한 정의가 뭔가 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이다. 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고 양방통행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고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럼 올바른 기도를 하려면 내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만 냅다하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있습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거짓신앙체계에서는 신앙을 열심히 무엇을 하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여러분 여기에 무슨 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는 신앙생활은 의식만 잘하는 것이라는 이 왜곡된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친밀함 교제라는 사실로 우리의 생각의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친밀함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친밀함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밀함을 방해하는 것을 철저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의식만 열심히 잘하는 것을 신앙생활활로 이해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인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파괴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너져야 할 시각이 무엇입니까? 무너져야 새로 지을 것 아닙니까? 무너뜨려야 새로운 참 신앙이 보이게 됩니다.
2) 하나님과 친밀함을 방해하는 요소는 죄입니다.
여러분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시죠? 그런데 문제는 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왜 죄를 안 지으려고 하시죠? 죄의 대가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죄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죄는 마치 벽과 같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어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에덴동산의 아담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 “형상”이란 단어는 성경에 아무에게나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말씀합니다. 왠 줄 아세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무력화 시키고 초토화 시킨 것이 무엇입니까?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인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무서운 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갈라놓은 죄 중에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죄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죄의 본질인데 오리지널 씬 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 되는 죄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심지어 신앙생활도 자기 힘과. 노력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서, 자기 방법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 죄의 본질에서부터 나오는 윤리적 죄, 도덕적 죄, 관계적 죄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점점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하나씩 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죄들이 없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죄들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약 여러분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면 그냥 방치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잘나내고 도려내지 않겠습니까? 어떤 아픔이 있다 해도 처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죄는 암세포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이놈을 그냥 방치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해야 합니다. 미워한 마음, 섭섭한 마음, 오해한 마음, 시기, 질투, 분노, 용서하지 못한 마음, 용서를 빌지 못한 마음,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씩 처리해야 합니다.
성경에 회개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을 보면 3 종류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단어는 “메타멜로마이”로 이 단어는 가룟 유다와 관련이 많은 단어입니다.
“메타멜로마이” 는 “뉘우치다”는 의미로 주로 감정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단어입니다.
마227: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여기 “뉘우쳐”가 “메티멜로마이”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바람직하지 생각하지 않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 등장하는 단어가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인데요. 이 “메타노에”는 회개 중에서 내적인 변화, 마음을 돌이키는 생각의 변화 이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메타노에오”와 “메티멜로마이”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메티멜로마이” 그냥 후회하는 겁니다. 아까 그때 그것을 안했어야하는데 이게 메타멜로마이입니다. 가룟 유다가 했던 그런데 “메타노에오”는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어가 “에피스트립호”라는 단어인데 잘못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것,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메타노에오”가 생각의 변화를 강조하는 단어라면 “에피스트립호”라는 단어는 삶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단어와 세 번째 단어가 어우러진 것이 베드로의 회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 가룟 유다는 도저히 용서 받지 못을 짓을 저질러서 망했고 베드로는 그것보다 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무게로 따지면 똑 같은 무게입니다. 둘 다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는데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회개의 문제라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훗날 대 사도가 되고 그가 했던 설교를 한번 보십시오.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여러분 여기 나오는 회개하고 돌이켜 가 우리 말로는 한 문장 같지만 두 단어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여기 앞에 나오는 회개는 “메타노에오”입니다. 메카노에오는 뭘 강조한 것이라고요? 생각의 변화입니다. 아,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 켜가 뭐냐? “에피스트립호” “에피스트립호”가 뭘 포함한 회개라고요? 실제적으로 내 삶속에서 내 행위적으로 내 삶을 돌이키는 것, 이게 베드로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먼저 그 회개를 경험 하고난 후 인생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마음이 찔리는 것도 중요하고 눈물 한 두 방울 나는 것도 중요한데요. 중요한 것을 빨리 유턴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처리합니까? 회개의 네 가지 조건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 스스로 겸비하는 것 (자각하는 것)
반드시 있어야 할 회개의 네 가지 조건 중 첫 번째는 스스로 겸비하는 것입니다. 이 자세가 없으면, 회개는 시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출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이 조건이 가장 먼저 제시되어 있습니다(우리 말 성경에는 이 네 가지의 순서가 약간 틀리게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스스로 겸비하는 것이 가장 먼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스스로 겸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스스로 겸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동의하고,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심지어 명백한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적당히 넘어갑니다. 이러한 자세들을 가지고는 절대로 올바른 회개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윗 /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2) 기도하는 것
매일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비추신 내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내가 사람을 판단하는 죄를 비추시면 하나님 내가 그런 자입니다. 동의하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는 자세는 매우 소중하지만, “기도하고”의 단계가 없으면, 그 삶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른 것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 한 여인이 있는데 여자가 남자에게 매일 구하는 것이 좋은 옷, 좋은 백, 좋은 목걸이, 좋은 신발 매일 이런 것만 구한다면 그 둘 사이에 무슨 친밀함이 있겠습니까?
그 남자만을 알기를 구하고, 사랑하기를 구할 때 진정한 친밀함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그분 자신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반드시 전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이키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친밀함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는 절대로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돌이키지 않았으면, 어떠한 종류의 회개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4)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스스로 겸비하는 것은 회개의 첫 단추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회개는 시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회개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회개에 있어서 가장 핵심입니다. 그리고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은 회개의 완성입니다. 아무리 처음 세 단계를 거쳤다 할지라도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으면 회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대체했던 모든 우상들을 철저하게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상숭배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 이게 다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숭배를 좀 더 설명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거부하고 몰아내면 다른 것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대체합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될 수도 있고, 탐욕이 될 수도 있고, 세상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종교의식이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란?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떤 유형, 무형의 대상을 더 사랑하거나 의지하는 것으로 즉 하나님을 대체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내게 남아 있는 한 하나님과 친밀함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고, 우리의 우상들을 무너트리고 헐어버리고 그러한 죄악들로부터 철저하게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친밀함이 다시 회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예레미야 1장에도 나타나는데, 렘1:10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오늘 여러분 안에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려야 할 우상들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우상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보세요. 창세기 11장에도 바벨탑이 무너진 다음에 12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겁니다.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이렇게 할 때 결과물이 뭐냐?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과 다시 친밀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원하실 것입니다. 맞죠? 그런데 말입니다. 주님과 친밀함은 단순히 친밀함을 원하는 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친밀함에 방해가 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버릴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주님과 친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단순히 예수를 믿은 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친밀함을 위해 방해가 되는 것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버릴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허물어 주옵소서, 그래서 그 허무심이 새로 태어나고 건설되는 축복의 통도가 됨을 볼 수 있는 영안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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