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 03.친밀함으로 나가는 길(3) 사모함
시27:1-4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을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일정한 종교적인 의식과 희생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무엇보다 천지를 창조하신 인격적인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임재 하셔서 우리를 소생케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먼지가 묻을까 금고에 넣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가정에 목사님이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엄마가 딸에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딸이 들고 오는 것이 쇼핑회사에서 보내 온 책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이 엄마가 그 쇼핑 책을 사랑하듯 이렇게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1)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2) 깨달은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3)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말씀하신 것에 맞추어 삶을 조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조정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맞추어 삶의 방향을 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예를 들겠습니다.
마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신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기잡이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야 했습니다. 고기잡이를 하면서 예수님을 따를 수 는 없습니다. 이것이 조정입니다.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 베드로가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고넬료의 집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9장에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라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바울에 대한 두려움을 편견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조정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환경, 우리 인간관계, 우리 사고방식, 우리가 선호하는 것, 우리의 행동,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생활,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생활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정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 다음 순종이란?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장로님 부부가 있는데 아내의 말씀이 성격이 너무 달라 신혼 때부터 너무 힘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부부 싸움을 하던지 화가 나면 말을 안 하신답니다. 몇 날 동안 말을 안 하니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보니 이제는 화난거 보면 이게 몇 일짜리 인가 안답니다. 일주일 자리인지 보름짜리인지... 그러던 하루도 화가 나서 말을 안 하고 출근을 했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또 오래 말을 안 하시겠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말을 건네 드래요. 이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게 뭔가 하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사과를 하더래요, 내가 잘못했다고, 이게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하면 그날도 회를 내고 출근을 했는데 이 장로님이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성경을 읽는데 그 날고 점심식사를 하고 성경을 읽다가 성경이 눈에 확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답니다.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장로님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하면 그동안 내가 잘못했구나, 아무리 화가 난다해도 며칠씩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구나, 그걸 깨달으셨답니다. 그래서 깨달은 그대로 실천한 겁니다. 집에 가자마자 말을 건네고 내가 잘못했다 사과를 하고 더 놀라운 것은 그날 이후로 지까지 이 말씀을 지키고 계신다는 겁니다. 더욱이 아내의 말에 의하면 저 사람은 사람의 말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 인정이 되면 무조건 순종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들을 점검해 볼 때 어떻습니까?
읽고, 듣고 –> 깨달은 말씀을 묵상하고 -> 묵상한 말씀을 가지고 기도 -> 조정, 순종 하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장 첫 번째 단계입니다.
2. 성령의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아람나라와 이스라엘 전쟁 엘리사 도단
왕하6: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왕하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3.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친구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시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여러분의 영혼이 언제 만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나 주실 때,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만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알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고자합니다.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1. 한 가지 일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가 구한 한 가지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생각하기를 다윗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가 구한 많은 것 중 하나이구나, 아니면 그가 구한 많은 것 중 첫째이구나 생각하는데 여기서 말한 한 가지 일이란 영어로 One thing 으로 그가 구한 오직 하나의 열망은 내 인생의 모든 날 동안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는 말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 알기를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어떤 분들을 막 성질이 날 것입니다. 아니 다윗은 다른 것은 구할 것이 없으니 그렇지 다윗이 내 처지가 되면 어쩔 수 없을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죠?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다윗의 형편이 어떤가 한번 보세요.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구하는 한 가지가 뭐라고요?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가 구하는 것과 다윗이 구하는 것이 얼마나 수준 차이가 있는지 우리가 구하는 것 마치 거지가 한 끼 밥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닙니까? 먹고 나면 금방 다시 배고파 구걸해야만 하는 것을 우리는 죽어라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 자신을 구한 것입니다.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면 그분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2. 지속적인 열망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기서 “바라는”은 완료시제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그동안 바래왔던 바’라는 말 입니다.그리고 “구하리니”는 미 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그 한 가지 일을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구해왔으며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것을 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 “내 평생에” 라는 말은 내 평생의 모든 날들로, 다윗은 그 일을 자기 평생 동안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바로 그가 한 가지 일을 과거에도 그토록 갈망하고 구했을 뿐 아니라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의 평생의 도든 날 동안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찾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지속적으로 유지가 되어 지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지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다가도 생각지도 않은 장애물을 만나면 그 간절함이 거기서 멈춰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지속적 열망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함을 방해하는 환경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물리치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하며 그 삶을 쭉 이어 나아가는 것을 가리켜 지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다윗도 하나님 알기를 원하는 그 한 가지를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환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 원수들의 공격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그러한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 알기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의 생각을 주님 앞에 모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 알기를 열망하려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하나님께로 모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 염려와 걱정과 두려움에 반응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그 수많은 생각들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그 생각을 붙잡길 바랍니다.
물론 지속적 열망은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을 주실 때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님을 알기를 열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열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십니다.
한 가지만을 지속적으로 열망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3.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 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신학자들은 이 집을 성전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성전이 어떤 성전을 의미하느냐 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솔로몬 성전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 시대에 있는 것은 성막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데 다윗 시대에는 두 종류의 성막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어라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따라 성막을 지었습니다. 이 모세의 질서를 따른 성막이 있었는데 이 성막은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모세의 질서를 따른 짐승의 제사가 매일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는 없었습니다.
반면 그 시대에 또 하나님의 성막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성막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장막 텐트라고 해야 더 옳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그 당시 기럇여아림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것을 위한 장막을 치고 그곳에 그 언약궤를 안치했습니다. (대하1:3-4)
대하1:3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4 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쳐 두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그것을 위하여 준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그리고 다윗은 레위인 중 아삽을 중심으로 한 찬양팀을 세워서 하나님의 궤 앞에서 항상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말한 여호와의 집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물고 있던 그 장막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의 평생 여호와의 집에 머물기를 갈망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당연히 자기 처소를 놔두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머물러 있던 그 장막에 들어가 거기에서 살기를 원했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머물기를 갈망했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기를 갈망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기를 그토록 사모하고, 갈망하고, 추구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그의 유일한 하나의 소원으로 찾고 추구하던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다윗이 그토록 구했던 그 한 가지 일의 또 한 요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과 선하심 등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여기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선한’, ‘매력’, ‘사랑스러움’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를 영안으로 바라본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했으며, 또 다른 학자들은 공 예배시 경건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영광 이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다윗은 그 당시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여있는 장막에 나가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열망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5. 하나님께 묻는 것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끝으로 다윗이 그토록 사모하고 갈망하던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우리말 성경에 사모하는 그것이라 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바카르” 라는 단어로써 원래 “조사하다” 혹은 “숙고하다” 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많은 영어 성경은 “enquire”, 혹은 “inquire”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열망한 그 한 가지 일에 포함된 하나의 요소는 하나님의 뜻과 의중과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묻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지도를 묻고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의 계시,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알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어떻게 사모해야하는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알기를 갈망하는 것이 과거에도 현제에도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과 길을 알기 위해 하나님께 물어야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베드로가 어떻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 아닙니까? 가장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분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 주” : 예수님과 바울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냄
“고상” : 탁월함, 고귀함, 존귀함, 탁월한 선택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 다윗의 고백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썬 다싱 의 저서 “그 발아래 엎드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때 한 아이 어머니가 숲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때 아기가 울면서 여기 저기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대 종이 와서 아이를 보고 도련님 울지 말아요. 이 나무 위에 망고를 봐요. 이 뜰 안에 아름다운 꽃들을 봐요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아니 싫어 나는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어머니가 주는 것이 어느 망고보다 맛있어 어머니의 사랑이 모든 것 보다 좋아 너는 이 동산이 내 것인 줄 모르는구나. 우리 어머니 것은 나 내 것이다. 그런 것은 관심 없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였다. 그때 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어머니가 달려 나와서 아이를 가슴에 않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때 아이에게 그 동산은 낙원으로 변화였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이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이 마음을 끓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 까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기를 사랑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아기가 관심의 대상이고 초점입니다. 주님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관심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이 이이와 같으냐? 입니다. 우리가 어머니를 찾는 아이와 같이 세상의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예수님을 갈망하고 원하고 추구하느냐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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