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24. 39.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롬8:26-28
로마서 8장의 구조를 보면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우리를 양자 삼아 주심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 양자됨의 은혜를 17,18절에서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시키면서 우리가 이 고난을 잘 통과 할 수 있도록 강력한 도구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도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합니다. 뭐가 어려운가?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 중 가장 어려운 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 학생들이게 밤새도록 공부하라면 합니다. 밤새도록 야간작업을 하라면 해냅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기도하라면 거기서는 넘어집니다.
여러분 예수님 제자들 보십시오. 광야로 가자면 광야로 가고, 바다로 가자면 바다로 가고, 병자를 고치자면 밤새도록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넘어졌습니까? 기도하자고 하니 다 잠들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영적인 일이며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또 문제는 기도라는 강력한 도구를 어디에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할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도의 방향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 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 달라는 기도만 냅다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 기도의 위험성이 뭔 줄 아세요?
시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여러분! 이 말씀의 배경을 아시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이후 광야 40년 동안 그들이 한일이 뭔 줄 아십니까? 오직 한 가지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주실 줄 믿습니다” 이거 한 가지 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들이셨는지, 이 광야로 보내신 의도가 무엇인지 이런 것에는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물을 달라, 고가 없으면 고기를 달라, 메뉴가 다양하지 않으면 메뉴를 다향하게 해 달라, 이런 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시106:1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개혁한글에서는 “파리하게 하셨도다” 이 ‘파리’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면 히) '라존'으로 '야위게 하다', '황폐해지다' 등을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하는 것 이 뭡니까? 금덩어리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차도, 좋은 직장도, 좋은 집도 아니고, 광야에서 살아남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 아닙니까? 물이 없으니 마실 물을, 먹을 것이 없으니 먹을 음식을, 광야가 위험하니 보호를 이런 것들을 구하는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뭐가 문제일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신뢰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구하는 기도가 혹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구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이게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처방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 기도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십니다. 기도의 방향성을 알게 하십니다.
그런데 혹시 나는 도와주지 않을 거야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 “탄식한다”는 말은 단순한 비통함에서 터지는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모가 아이를 낳을 지르는 비명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데 이 비명은 아이를 낳겠다는 비명입니까? 안 낳겠다는 비명입니까? 낳겠다는 희망의 기쁨의 비명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탄식이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탄식입니까? 아니면 내버려두겠다는 탄식입니까? 도와주겠다는 탄식 아닙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롬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여러분, 여기 하나님을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부모님이 어린 자녀를, 길을 걸을 때나, 뛰놀 때나, 먹을 때나 잘 때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살피듯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렇게 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에게 매를 들지만 울다 지쳐 잠든 아이 곁에서 이놈이 혹시 상처 받지는 않았을까 많이 아프지는 않았을까, 아이 곁에서 상처에 약을 발라주며 머리를 쓰다듬고 살피듯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살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요나처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 하여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배를 올라 배 밑창에 내려가 억지로 잠을 청하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요나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신음하며 눈물 흘릴 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았고 히스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으로 인하여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자신에 대해 너무 낙심하고 실망하며 나 같은 놈이 뭘 하겠어 하며, 다시 옛 날로 돌아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베드로를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주님은 그러한 바울을 살피고 계셨습니다.
이 주님이 오늘도 여러분들을 살피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들의 조그마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나를 살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가운데 꼭 붙잡아야 할 말씀이 있는데 바로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의 표현법을 보면 “알거니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그만큼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특별히 고난 가운데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하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본질상 그의 성품, 속성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란 하나님의 뜻이 곧 선입니다.
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할 때 선을 영어로는 good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현대대어 성경에서는 유익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좋은 것을 이룬다. 유익되게 한다, 는데
여러분, 여러분에게 뭐가 좋은 것이고, 뭐가 유익한 것입니까?
여러분 여기 컵이 있는데 이 컵이 언제 가장 좋을까요? 언제 이 컵이 가장 유익될까요? 그것은 컵을 만든 목적에 사용될 때 아닙니까? 야구선수가 언제 가장 행복하다고요? 필드에서 뛸 때 아닙니까? 야구 선수가 허구한 날 벤치에만 앉아 있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언제 가장 good 일까요? 언제 내 인생이 좋고, 유익될까요? 내 뜻이 이루어 질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아니겠습니까? 그럼 우리의 존재 목적이 무엇입니까?
1) 교제하는 것
2)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생각에 이건 아니다 싶은 환경을 만날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실패는 누가 뭐라 해도 실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를 실패로 끝나게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실패한 사람들이 많지만 실패의 대명사라 할 사람을 꼽는다면 베드로 아니겠습니까? 참, 베드로는 처음도 실패, 끝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던 베드로 그러나 주님은 그 실패를 실패로 끝나게 하지지 않고 그 실패를 합력하여 주님을 만나는 선을 이루는 통로로 사용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예수님을 모른 다고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그는 또 실패를 저지르고 맙니다.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합니까? 야, 인마, 베드로야 내가 너를 3년 동안 가르쳤는데 네가 어찌 그 모양이냐, 내가 헛것을 가르쳤구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를 통하여 합력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과거 실수 했던 일들이 있고, 부끄러운 일들, 아픔, 고통 상처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실패를 어둡고 부정적이고 실패한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어떤 자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가?
하나님은 아무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나 같은 사람에게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까? 나도 해당될까? 그런 분계시죠? 이런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은 한 가지만 점검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 이것을 점검해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런 기가 막힌 인생으로 부르셨는지 아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보면 안다는 겁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의 실패를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딱, 한 가지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로서는 대답하기가 참으로 민망하였지만 “주님, 아시잖아요.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내 양을 치라” 하고 사명을 맡기며 베드로를 회복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혹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만 있고 이것만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는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늘 우리는 반족짜리 말씀만을 추구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만약 지금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이 경험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지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의 삶속에 펼쳐 가실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배, 십일조, 헌금, 그런데 이 말은 맞을 수도 있기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구제를 하고, 기도생활을 철저하게 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 것에 기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내나 남편, 혹은 친구를 사랑하는 경우에도 그렇듯이 한 인격체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행동 이전에 항상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시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러한 다윗의 신앙고백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의 힘이라고 고백한 다윗의 이 고백은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그의 유일한 힘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힘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 분만이 우리가 힘을 얻는 힘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그 찬양은 아가서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주님 난 알기 원해요 더욱 깊고 참된 사랑을, 왕의 침소로 날 들이소서, 성숙케 하소서 내 사랑, 내 맘이 주를 원해요 나 할 수 있는 모든 것 주 사랑 주는 나의 유일한 열망 진실케 하소서 내 사랑, 후렴) 나에게 입 맞춰 주소서, 날 안아 주소서 주의 향기 맡게 하소서, 주 얼굴 보게 하소서, 나를 들이소서 주여 오소서, 주님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 더, 주님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 더
이 찬양의 가사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유일한 열망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그 분을 알기를 갈망하고, 그 분을 더욱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냥 믿지만 말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예수님과 교제의 시간이 실제 있어야 합니다. 교회만 다니는 식으로는 실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옆 사람울 보세요.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리가 결심해보세요. 자, 이제 결심 했습니다. 그럼이 이제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됩니다. 사랑은 같이 지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같이 지낼 수 있습니까? 묵상을 통해서, 25시간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 송중기 송혜고, 태양의 후예 – 늘 드라마 촬영으로 같이 만나니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게 됨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안 보면 알게 됩니다. 안 보면 이상해요, 안 보면 보고 싶어요. 그러면 사랑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혹시 주님 면회 오신 분은 안계시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이 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늘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약속이 여러분의 약속이 되길 축복합니다.
'성경권별설교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롬8:31-32) (0) | 2017.10.11 |
---|---|
40.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목적(롬8:28-30) (0) | 2017.10.01 |
38.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롬8:26-27) (0) | 2017.09.18 |
37.고난과 영광(롬8:18-25) (0) | 2017.09.18 |
36.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자의 모습(롬8:12-17) (0) | 2017.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