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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교회 비전트립

2주/교회 가치관(예배)

by 오용주목사 2017. 3. 12.

2017.3.12.                                            2주 교회 가치관 (예배)

15:16~18

 

 

지난 시간에 교회의 비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비전이란? 방향성입니다. 만약 태평양 한 가운데서 열심히 노를 젓는데 방향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도 삶도 방향성이 있어야합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 왜 사는지? 왜 일을 하는지? 왜 공부를 하는지 그 방향성이 바로 비전입니다.

그런데 그 비전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과 의중을 우리에게 보이실 때 그것을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바로 교회의 회복과 부흥입니다. 그리고 회복과 부흥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아야 하며 우리 교회가 보고 그 비전에 우리가 온 삶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 회복이 뭡니까?

건강을 잃은 사람이 건강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복이듯 교회도 주님께서 처음 디자인 하셨던 교회로 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의 회복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처음 디자인 하셨던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것이 요17장에 나오는 교회, 전례 없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거룩하고, 하나 되고 성령의 강한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또 부흥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부흥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흥이란 단어가 신구약 66권을 통 털어 딱 한번 나옵니다.

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여기 부흥이란 단어는 히브리 말로 하야인데 영어로는 라이브” “생명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부흥이란 죽은 것을 살리는 것, ,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리는 것이 부흥입니다. 감기에 걸렸는데 다시 살리다 이건 아닙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관계 단절로 말미암아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다시 살리는 것이 하야, 부흥입니다.

왕상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

하면 살리라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회복과 부흥의 교회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로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회복과 부흥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무엇인가?

 

예배입니다.

여러분! 회복과 부흥은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모든 문제(결핍)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결핍이 찾아오게 됩니다. (에덴동산)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회복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과 예배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구약의 역사를 보면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 떠남으로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결과 BC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성경 예레미야를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70년이 차면 다시 회보시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5: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올 때가 언제인가하면 BC 538년에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BC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BC 538년에 돌아온 겁니다. 그러니 포로로 끌려가진 48년 만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70년이 차야 회복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성전 기초를 쌓습니다. 이때가 BC 536년입니다. 성전 기초를 완성은 하였는데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의 방해와 바벨론 아닥사스다 왕의 칙령으로 중단되어 성전 기초만 놓고 15년이 흘러갑니다. 그 이후 다리오 왕이 즉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와 스가랴에게 임하여 성전재건을 독려합니다. 그래서 BC 518년에 다시 성전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고 BC516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입니다.

그러니 BC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BC516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됩니다. 이때가 포로로 끌려가진 정확히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정치적 회복을 회복으로 보지 않다는 말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정착하는 것을 회복으로 보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진정한 회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성전 회복을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보는가? 성전이 세워지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시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것과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또 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2:13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하나님은 성전이 지어지면 오셔서 그들 가운데 머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처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너진 성전이 다시 수축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회복되어 참 예배하는 그곳에 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예배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우리를 만나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예배한 그곳에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넘치기를 원하십니다.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2. 그렇다면 무너진 예배가 뭔가?

오늘날 대표적으로 예배가 무너진 것이 뭐냐?

 

1) 바로 예배가 형식, 습관, 의식적인 예배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 무너진 예배는 하나님과 인격적 만남은 없고 단지 형식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와 절차에 따라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배입니다.

 

2) 또한 무너진 예배란 예배가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예배가 무너진 예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배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배가 타락한 예배요, 무너진 예배입니다.

 

3) 뿐 만 아니라 무너진 예배는 사람이 예배의 주도권을 행사합니다.

예배의 주도권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찐한 감동의 예화, 조명, 음향, 분위기 이러한 것으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려는 모든 시도 이 모든 것은 다 타락한 예배입니다.

 

3. 그럼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린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1) 하나님을 만남을 추구하는 예배입니다.

어떤 분이 결혼식에 축하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온전한 축하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랑 신부를 만나 축하할 때 온전한 축하 아닙니까? 그런데 신랑 신부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가 비즈니슬 위해 이런 저런 사만 만나고 다닌다면 이게 무슨 결혼축하겠습니까?

 

예배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남,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목사님 만나고 왔어, 나는 집사님 만나고 왔어..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나기를 더 사모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더 사모해야 합니다.

 

2) 참된 예배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을 추구하는 예배, 즉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 드러나야 하고, 하나님만 높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는 다른 불순물이 섞이면 안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내 목적을 내 소원을 이루려는 불순물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자신, 목적, 의중, 길을 알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경외란? 국어사전에서는 공경하면서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 크고 존경스러워 감당할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감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4)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또 하나 예배는 영으로 해야 합니다. 어떤 교우가 목사님, 오늘은 예배드릴 기분이 아닙니다.” 하셨습니다. 실제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몸은 아프고 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마음이 괴로워 예배도 신앙생활도 다 귀찮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기분이나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의 영은 어떤 상태일까요? 천국과 지옥이 갈라서는 자리에서 천국 가는 길에 설 때, 생각할수록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구나! 예수님의 보혈 때문이구나! 그 때 그 자리에서 찬양하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노래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돈 없어 고생한 생각나겠습니까? 병들어 고생한 생각나겠습니까? 돈 떼먹고 도망간 자 생각나겠습니까?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영이 그렇습니다. 마음이나 감정은 세상 일로 상하였을지라도 우리 영은 환경 여건 관계치 않고, 언제나 주님은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려고 힘쓰면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영으로 예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5) 진리로 드리는 예배 :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해서 십자가를 의지하고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대답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닙니다. 감격입니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노래로 비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노래라면 영은 멜로디이고 진리는 가사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불러지려면 멜로디와 가사가 다 필요합니다. 만약 노래의 가사만 들었다면 아직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멜로디만 들었다 하더라도 역시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능력 있는 노래와 같습니다. 그 노래에는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습니다. 멜로디는 영이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가사는 십자가 복음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주의 임재와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인 것입니다.

 

4.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장막의 예배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오벧에돔에 있던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언약궤를 가져와 모세의 질서를 따른 성막의 지성소에 안에 두지 않고 대신 다윗은 언약궤를 위해 따로 장막을 세우고 그것을 그 안에 두었습니다.

 

대상15:1 다윗이 다윗 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궁전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그것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삼하6: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은 언약궤를 처음 가져다가 그곳에 들일 때 외에는 어떠한 짐승의 제사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윗은 찬양사역자들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24시간씩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대상16:4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16:5 아삽은 우두머리요 그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 있게 치고 16: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대상16:36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있게 하며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

 

이 후 다윗의 장막의 예배를 기독교의 예배 모델로 채택한 예루살렘 회의 사도행전 15장에 나옵니다.

15: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5: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뿐만 아니라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 4,5장에서 하늘나라의 예배를 잠시 보게 되는데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5. 다윗의 장막의 예배와 하늘의 예배의 공통점

1)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실하심을 보는 만큼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2) 그들은 찬양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양과 경배가 최고의 형태의 예배이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찬양과 경배를 부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배의 중심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말씀도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찬송은 말씀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준비찬송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를 가면 실컷 30-40분 찬양 드리고 나서 이제부터 예배시작하겠습니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준비였지요.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으니까 포도나무 교회를 방문하셨던 분 중에 어떤 분이 그랬답니다. 이 교회는 예배를 몇 시에 시작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더래요. 지금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예배를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배에서 순서 순서에 집어넣은 깍두기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찬양과 경배 자체가 예배 자체입니다.

다윗의 장막에서도 일 년 365일 동안 매일 24시간 찬양과 경배가 드려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찬양과 경배는 예배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최상의 예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의 정의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그분 자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찬사 : 하나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기뻐하는 것 : 하나님 그 분 자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동반되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따라서 찬양과 경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지 나의 영광이나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안 된다.

) 바울과 신라 빌립보 감옥, 하박국3:17-19

 

경배의 자세 : 마음을 다하여,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삶이 예배로 드려져야함

마음을 다하여 서란?

상한 심령 : 자신이 자신의 죄를 해결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임을 절감하고 통회하는 겸손한 마음을

소리를 내어서 부른 것, 가사 하나 하나에 우리의 온 마음을 싣는 것입니다.

6. 예배는 우리가 배워야할 진정한 제자도중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찬양과 경배시간에 주리를 트는 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하나님나라에 갈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영원히 하나님만 경배해야할 것인데. 그런데 찬양과 경배가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자로서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기도도 큐티도 전도도 성경도 등등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하나 배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배워야할 주된 제자도는 예배입니다. 예배라는 말은 찬양곡을 배운다는 말보다도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 태도 자세들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할 때 예배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엇보다 예배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이놈의 교회는 찬양을 30분 동안이나 하냐, 그것도 한 곡을 또 하고 또 하냐?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는 예배가 어떤 예배인가를 배우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생물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린다고 깊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말하는 가치관을 따라 삶을 추구하고 예배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의 예배가 깊어지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될수록 예배가 깊어집니다. 이처럼 자라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을 중단하면 여러분의 예배는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예배는 생물입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의 가치관 중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찬양과 경배가 얼마나 그 자체가 중요한 예배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와 태도를 배워가면서 우리 예배가 더욱 깊어가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깊고 친밀하게 예배하며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