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말씀을 따라 사는 삶
창 12:1~4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군중들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군중들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한 부류는 무리요, 한 부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무리와 제자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무리 : 예수님을 따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래 자기의 목적성취를 위해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도 자기의 유익의 범위 내에서 순종합니다. 유익되면 순종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유익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이꺼이 자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무리에 속합니까? 제자에 속합니까? 내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기꺼이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가? 누구처럼?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는 말씀위에 자기를 싣는 사람,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라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부름은 아브라함 한 사람만의 부르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우리 모두의 부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뭔가 목적을 가리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목적 없이 그냥 심심해서 부르지 않습니다.
때로는 지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부르시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부르시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일로 부르시기도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일로 부르심인데 그 일의 핵심이 뭐냐? 영혼구원하여 제자삼은 일,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극치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합니다. 그 타락의 핵심이 뭡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입니다. 그래서 누가 저에게 타락이 뭐냐? 죄가 뭐냐?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죄요, 타락이다.
사실 창세기에서 사탄이 노렸던 공격의 핵심이 이것 아닙니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따먹도록 집요하게 공격한 사단의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의 눈만 밝아서 되겠니? 니 눈도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라, 그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원형과 같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인간이 한 짓이 뭐냐? 바로 인간이 왕인, 인간의 나라, 세상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세운 인류 최초의 나라가 바로 창11장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통치가 발휘되는 내 나라를 세우겠다 선언이 바로 창12:1~3절이며 이 일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창121~2을 같이 읽겠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영토)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국민)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주권) 하나님의 부르심을 요약하면 딱 두 단어입니다. 떠나라! 가라!
1.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웠던 이유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이 떠나라! 가라! 인데 3가지를 떠나라 하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입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본토 : 지연공동체, 친척, 아비집 : 혈연공동체입니다. 지연, 혈연중심의 고대사회에서 땅과 핏줄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떠난 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또 아브라함은 당대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신전에서 사용하는 신의 형상을 밤드는 수공업자로서 당대 기록에 의하면 수공업자는 최고의 부자에 속하였으며 귀족중의 귀족이었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당시 아브라함이 살았던 곳은 시골 촌 동네가 아니라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꽃피운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BC3500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당시 에어컨(자연 수냉식))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부, 명예, 안락함, 평안함, 안전함, 화려함과 그가 지금껏 쌓아 놓았던 삶의 기반을 모두 다 포기하고, 네가 지금까지 의지하였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다 끊어 버리고, 나와 더불어 비전을 향하여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 그러면 내가 너로 땅을 소유하게 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한 3가지, 땅, 큰 민족,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가능한 약속같이 보입니까?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자기가 소유했던 땅을 다 버리고 떠난 아브라함이 어떻게 땅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4절에 자세히 보면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임을 밝히고 있는데 왜 나이를 밝히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님께서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해주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이 너무나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나이 밝힘입니다. 75세의 나이를 가진 아브라함의 입장에 서 아이를 주고, 또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그렇다 치더라고 아내 사래는 어떻습니까? 불임이요, 이제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세죠? 창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어디 그것뿐입니까?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약속 아닙니까?
요즘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귀농하는 사람들이 귀농해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것, 그곳 사람들과 잘 사귀는 겁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나그네인데 나그네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는 것이 하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너가 의지하였던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하나님 한분만을 절대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
아브라함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환경을 좇아간 이 아닙니다. 사람을 좇아 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약속을 쫓아간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말씀을 좇아갔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면 신약의 한 인물이 생각나죠? 시몬 베드로, 예수님께서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실 때,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수 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전공이 달라요, 예수님은 목수 출신으로 건축업이 전공이라면 베드로는 갈릴리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수산업이 전공입니다. 물때도 맞지 않고, 시간도 고기들이 잠자러 물속 깊이 내려가 있는 낮이고, 피곤함은 몰려오고, 그물도 다 씻은 상태이고... 이래서 못합니다. 저래서 못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가 뭡니까? 4절,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에 의지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실었습니다. 자신을 걸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이루실 것을 믿고 자기의 모든 것을 그 말씀 위에 싣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등장합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습니다. 한 사람은 말씀을 따라갔고, 말씀에 자신을 싣는 반면, 한 사람은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을 실었습니다. 사람을 따라가던 롯은 결국 자신이 선택하여 살던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할 때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사람만 따라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과,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 자기 경험, 자기 논리, 자기 생각, 자기 계획, 목적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는 쪽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따라, 여러분의 경험을 논리를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쪽입니까? 분명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 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러분의 경험, 논리, 판단을 이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가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정말 하나님을 아세요?
저희 장모님이 담도 암으로 투병 중에 있을 때 자주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지방에는 의료기술이 서울보다 낮다보니 지방에서 안 될 때 마다 올라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곳에서 치료받고 좋아지셔서 내려가고 하셨는데 한번은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거제도 처형 집으로 내려 가셨는데 그곳에서 다시 통증이 찾아와 거제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서로 무슨 애기를 하다 부산 신평로교회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그랬더니 옆에 간호사가 부산신평로교회 누구냐고? 그래서 오용주 목사님이라고 했더니 아! 오목사님, 자기도 신평로교회 출신인데 나를 잘 안다고 그러더래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정말 하나님을 잘 아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구요? 그래도 내가 모태 신앙인인데, 내가 신앙생활을 한지가 몇 년이데... 혹시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다는 하나님의 지식이 거제도 그 병원의 간호사가 저를 아는 그 정도 아닌가요? 그 간호사가 저를 안하고 하는 것 참 감사하지만, 여러분! 정말 그 자매님이 저를 잘 아는 것일까요? 내가 지금어디 사는지, 지금 내가 어디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지, 무엇을 마음 아파하는지.. 그 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는 것이라곤 과거 신평로교회 부목사로 있었다는 것과 몇 가지 지식은 갖고 있겠지마는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이정도 피상적으로 아는 정도는 아닌가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 잘 아세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삶, 하나님 말씀에 나를 싣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통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을 소개한 자기소개서가 성경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살펴보았던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실 때 시몬 베드로,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했는데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믿음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그 답이 3절에 나오는데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씀을 들을 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따라서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에 자신을 싣는 순종이 가능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위해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중 묵상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듣기만 한 말씀은 머리에 머뭅니다.
그러나 깨달은 말씀은 마음에 새겨집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119:97)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위의 말씀들은 하나같이 말씀 묵상을 강조합니다. 묵상이란 “마음 판에 진리를 새기는 일”입니다. 마음에 새겨진 진리가 삶을 변화시킵니다. 마음에 새겨진 말씀은 순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에도 부모가 먼저 그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긴 후에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6-7) 1온스(28.3g)의 묵상은 1톤(1,000kg)의 암송과 맞먹는다고 합니다(조이 도우슨).
제가 오이코스 모임을 성경공부식 모임으로 하지 않고 삶을 나누는 모임으로 하는 것도 삶을 나누기 위해서는 말씀을 반드시 묵상해야 하게 때문입니다.
성경에 여러 곳에서 부흥의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공통점이 뭐냐? 말씀의 부흥이 곧 영적인 부흥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느헤미야 8장에 나오는 부흥운동인데요 느헤미야 8장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면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8: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느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8: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부흥은 단순히 성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야 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8장부터 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부흥, 즉 말씀의 부흥이 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이와 정반대 기록이 엘리제사장 시대 영적 암흑시대인데 왜 엘리 제사장 시대를 영적 암흑시대라 평하느냐? 바로 그 이유를 삼상3:1을 보면 알 수 있는데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러분 이 기준을 아시겠습니까?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는 부흥하는 시대구요, 말씀이 들리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하나도 불편한 것이 없고,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그러면 그 시대는 암흑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춘천이레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입니까? 암흑기에 들어간 교회입니까? 이 기준으로 봤을 때 답은 딱 나오는 것 아닙니까?
신약시대 부흥하면 초대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진작 사도행전에서는 부흥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대신 뭐라고 하느냐?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하더라, 말씀이 흥왕 하는 것이 부흥이래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시작하면서 초대 신약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뭐예요, 말씀을 가까지 하고 말씀을 소중히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작부터 강조하자 것이 뭡니까? 말씀통독, 말씀통독 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시점에서 ‘5가지 말씀 운동’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1)말씀통독, 2) 말씀묵상, 3) 말씀암송, 4) 말씀필사, 5) 말씀실천
이 5가지 말씀 운동을 통해 행20:32 말씀과 같이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말씀처럼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위에 자신을 싣는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길 축복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통로라면 또 하나 하나님을 아는 통로는 삶 속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태도입니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러분 여기 6:3절이 왜 이렇게 기록된 줄 아십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해가지고 하나님도 섬겨야 되지만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도 섬겨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호세아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함축된 메시지가 있는데, 하나는 비를 주관하시는 것은 바알신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는 것과, 더 중요한 메시지가 뭐예요. 너희들이 비를 갈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된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 절,“알자”, 6절, “아는 것” 라는 단어는 “다아트”라는 단어는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야다’에서 파생한 단어로 삶속에 하나님을 친밀함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적 암흑기는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헌금 안하고, 기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마음에 없어진 그것이 암흑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영적 부흥기 입니까? 암흑기입니까?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할 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나를 던져 넣는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6: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고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던지는 자입니다. 말씀이 그러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 말씀에 자기를 싣는 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초대교회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의 자장면이 나옵니다.
행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이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교할 수 있었던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았기 때문 아닙니까?
바라기는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더 알기를 갈망함으로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아,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싣고,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작은 부분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 / 기다리오니 주여 임하소서
기다리오니 주여 임하소서 주님을 갈망해요 주 사랑 안에 날 감춰주소서
더욱더 주를 알도록 내 모든 삶 취하소서 생명을 부으소서
나 올라가리 독수리같이 내 모든 삶 취하소서 내 안에 거하소서 나 올라가리 독수리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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