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가인의 예배, 가인의 삶
창4:1-8
오늘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여기 제사를 안 받았다는 말은 그저 단순히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았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는 깨어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한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었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안 만나주신다는 말입니다. 가인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상당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언짢았습니다. 그런데 더 기분 나쁜 것은 이,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 제사는 받고 누구제사는 안 받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차별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인은 자기가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 다 하나님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증거가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의 문제는 자기를 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를 전혀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똑 같습니다. 부부사이에 타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아! 내가 ‘가인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1.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이 말은 가인이 선을 행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선을 행하다’ 말의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보편적으로 선을 행한다하면 유익한 일, 옳은 일,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적 “선” “야타브”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과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선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선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
예를 들어, ‘가나안에 들어가면 다 죽여라’ 다 죽이는 것이 선이고 다 죽이지 않는 것이 악입니다.입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말라, 따 먹지 않는 것이 선이고, 따 먹는 것이 악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편에서의 선의 개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이 그분이 세우신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리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이 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대우해 드리는 것, 이것이 바로 워십,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과 예배는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삶과 예배하는 삶은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내가 왜 받지 않겠느냐’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인 삶‘ 열심 있는 삶을 선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올바로 제사를 드리는 것 올바로 예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라는 의미에서 정확히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도 번역한 70인 역(LXX)에서도, 예수님이 이 성경을 인용하셨는데 70인 역에서는 창4:7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4:7을 네가 재물을 올바로 바쳤다면, 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올바로 재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없드리느니라
여기 “선을 행하다”를 예물을 올바로 바치다, 제물을 올바로 바치다, 올바른 제사를 올리다,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선과 제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하나님 왜 내 제사는 기뻐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 물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제물을 올바로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제사를 올바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즉 네가 예배를 올바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한 핵심이 무엇인가?
1) 자기자원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여 자랑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였습니다. 성경이 이런 예배를 드린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내가 한 일이 하나님께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가인과 같이 자신을 예배하는 자와 아벨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은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자원으로 예배합니다. 자기 공로를 자원으로 삼습니다. 자기 행위를 자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음성에 순종하는 삶, 십일조의 삶, 오이코스, 중보기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 다 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자원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신뢰하는 치명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자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 가인이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한 핵심 두 번째는 자기 목적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사를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다시 말해 최고의 가치의 신분인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의 목적입니다. 당신의 위대 하십니다. 당신은 광대하십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예배는 달랐습니다. 가인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예배합니다. 평안함, 마음의 안정감을 위해 예배 합니다.
예) 주일 1부 예배드리고 테니스 시합 나가면 안 됩니까?
아니, 1부 예배는 뭐한다고 드리려고요? 그래야 사고 안 나니까? 그래야 우승할 수 있으니까? 예배도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배합니다. 그 자기목적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이 이 땅의 것들 아닙니까? 이 땅에서 여전히 자신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같이 되기 위한 것이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 엎드려 항복하고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예배였습니다.
3) 가인이 올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한 핵심 세 번째는 자기방법입니다.
아벨의 제사를 히브리기자는 우리가 소위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믿음으로, 그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자기방법으로 열심히, 정성을 다해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겠지 생각하며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배한다 해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배입니다.
레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그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방법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아멘. 그래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림으로 구원자의 도래를 기다리는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아직은 부족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어져 가야합니다. 여전히 자신을 예배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으로 지어져 가야합니다. 우리는 이 삶을 살아 내어야 한다.
2. 가인의 삶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인류최초 살인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통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살인이라는 것이 어떠한 죄이며 어떠한 근원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설명해서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살인의 행위를 도려내도록 하기 위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살인은 단순히 물리적 살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인이 도대체 뭐 길래 인류 최초의 죄를 살인으로 규정하여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가장 심각하게 경고된 범죄가 바로 살인죄입니다. 성경 십계명을 살펴보면 제 1계명에서 4계명 까지를 대신윤리라고 칭하고,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를 대인윤리하고 말합니다. 대신윤리는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하고, 대인윤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윤리를 말합니다.
제 5계명에서 10계명의 대인윤리도 두 가지로 분류가 되는데 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적극적인 권고인 반면에 6에서 10계명은 이러이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 경고의 메시지 중 가장 첫 번째가 뭐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민수기에는 살인자에 대한 경고가 더욱 무시하게 나와 있습니다.
민35: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5: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5: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은 물리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것뿐만 아니라 이러 이러한 거야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죠?
마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주님은 이것이 살인이라는 겁니다. 주님은 형제에 대해 노하는 것, 라가라 하는 자 아람어 머리가 텅 빈, 골빈, 형제를 미련한 놈이라 업신여기는 것을 살인이라고 합니다. 살인으로 간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요한도 똑 같이 말합니다.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가인이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다 다 가인입니다. 살인자 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자들은 살인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난 죄인들은 이제 어떡하던지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밟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삶 전체를 살인자의 삶, 가인의 삶, 가인의 길에 행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살인자의 삶에 대표적인 나타나는 징후가 뭔지 보자는 겁니다. 살인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여러분, 이 이야기는 지금 가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가인이 들어있지 않나 말씀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살인자들의 삶에 나타나는 대표적 첫 번째 징후는 무엇일까요?
1) 시기와 질투입니다.
가인이 왜 아벨을 죽었나요?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이것이 살인인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그 자체가 살인의 동기가 되는 겁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왜 죽이려 했나요? 시기와 질투 때문에,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왜 죽이려 했죠? 시기와 질투 때문에,
요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여러분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되나요? 질투죠
요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질투, 질투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왜곡 시키는 가장 무서운 감정이 바로 질투심입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절대 질투심을 갖지 않아요. 질투심이란 어떤 면에서건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갖는 감정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자기보다 나은 모습이 보일 때 그를 제거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 마음을 질투라고 하는 겁니다. 젤러시 (jealousy)
여러분 이것이 살인의 동기요 바로 질투 자체가 살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러한 가인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보다 나은 자들을 향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축복하고 나도 닮아가는 것이죠.
가인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 도대체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왜 하나님은 나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지 않으신지 저 내 동생 아벨의 예배는 뭐가 다르기에 기뻐 받으시는지 보고 배우고 닮아가야죠.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시기와 질투로 결국 아벨을 처 죽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지금 가인처럼 누구를 때려죽이고 계신가요? 아니면 아벨처럼 맞아 죽고 계신가요? 여러분은 누구를 심판하고 계신가요? 아님 심판을 당하고 계신가요? 비판(판단, 후욕)을 하고 계세요, 아니면 비판(판단, 후욕)을 당하고 계신가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벨과 같이 시기를 당하고, 질투를 당하고, 비판과 판단과 후욕을 당하며 마침내 맞아죽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머리를 밟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삶입니다.
2) 살인자인 가인들이 품고 있는 살인의 동기는 분노이다.
지금 가인이 분을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왜 분노하냐? 이 말은 네가 왜 나에게 분노하니? 라고 애기하는 겁니다. 인간의 분노는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라는 겁니다. 분노는 정확히 말하면 결국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분노, 이것이 하나님이 경계하시는 분노라는 겁니다.
의분도 있어요, 거룩한 분노도 있어요.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서의 분노
그런데 사람의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하면
창49: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인간의 분노가 그 단단하고 질긴 소 발목의 힘줄도 끊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왜 분을 내죠? 그것은 우리가 분을 낼 자격이 있다는 확신 때문에 그런 겁니다.
밀양 영화
분노가 표면적으로는 그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살인한 그 남자에게 나타난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인간을 만들었느냐, 어떻게 이런 상황을 나에게 허락했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분노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분노라는 건 결국 하나님을 향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세요? 분노는 우리가 품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품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해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당시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받는 것인데 탕자가 아버지께 내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은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로 취급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살해한 행위입니다.
마찬 가지로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죽은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살해한 가해자들 그 가해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분노를 품어야 해요. 분노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해자입니다. 분노는 피해자가 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무리에게 그 분노를 거두어가셨습니다. 예수에게 십자가에서 분노를 다 쏟아 부으시고 이 분노를 가져가 버리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 앞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었으니 그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성도라면 나에게 분을 품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나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나에게서 거둬 가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분을 내지 않는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분을 품을 만한 상황이나 사람들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살해한 결과 그 죄인들에게 품어질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금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을 습관적으로 내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분노가 어떻게 자기에게서 벗겨졌는지 그 복음의 복된 소식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일만 달란트 - 달란트는 예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무게 단위로는 약 34kg의 순금에 해당함)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의 일일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하는 것 이었다. 이 일만 달란트에 대한 최근의 평가는 천이백만 달러에 해당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물가 상승 요소를 감안한다면 오늘날의 통화로는 10억 달러 이상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D. A. Carson). 더욱이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며 유대 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이 일만 달란트의 가치가 얼마만 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며 그 죄를 하나님의 은혜로 처리해 주셨다는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의 분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분노케 하는 상황들과 사건들과 이웃들을 허락하실 때 그것들을 여러분의 영적 성숙의 유용하게 쓰세요. 이것이 성도의 훈련인 것입니다.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는 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자주 분노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로 회복되지 못한 증거다. 라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여러분을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여러분에게서 거둬가신 하나님의 분노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자주 분노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분노 아래 놓여있다는 증거입니다.
예) 운전 중 자기는 다른 다름으로부터 양보를 받았음에도 자기는 양보하지 못함
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거하고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것 하는 겁니다.
이렇게 질투와 시기와 분노로 야기되는 살인은 모든 인간이 당면하고 있는 죄의 문제인데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매일같이 살인을 합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언제든지 자기 형제를 향해서 미련한 놈이라 욕을 해고, 라가라 하는 이들이 죄인 된 삶이라면 그런데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분노에서 구출되었다는 우리가 그들과 똑 같은 삶을 산다면 이것이 어찌 구원받은 자의 삶이겠느냐 그 말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벨과 같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 온유, 겸손, 인내, 절제, 용서, 섬김의 삶, 거룩한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섞이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만사형통,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내가 여전히 시기하는 자, 질투하는 자, 분노하는 자, 살인하는 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사랑하는 자 용서하는 자, 온유한 자로 지어져 가고 있는가를 확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자꾸 사랑해보고 용서해보고 인내해보고 감싸않는 연습을 해보는 겁니다. 그것이 잘 안될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고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때 흘린 눈물을 내가 닫아주마 한 것이 요한 계시록의 말씀인 것입니다.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저희의 목자가 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이마네이 아우투스'(*)는 '보살피다'는 의미의 '포이마이노'에서 파생된 미래 능동태로 문자적으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생명수 샘으로'의 헬라어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은 어순상 '생명의'(조에스)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여기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의 해당하는 헬라어 '여살레이프 세이'는 문자적으로 '...으로 부터 제거해 버리다'라는 의미의 미래 시상으로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구속 받은 자들을 고통과 아픔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시사 합니다.
그런데 이런 흘린 눈물이 있어야 닦아주죠. 이것으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자기 신세 한탄하며 물지 말구,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지어져 가는 양육되어져가는 나를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어져가는 한 주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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