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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창세기

09.가죽 옷을 지어입힘을 받은 자의 삶 (창3:1-25)

by 오용주목사 2016. 12. 6.

09.가죽 옷을 지어입힘을 받은 자의 삶

 창3:1-25

 

 

TV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한 결 같이 얼굴을 가린다는 사실입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쓰고 얼굴가리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고 가리는 행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인간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스스로 숨게 되고 스스로를 가리는 행동을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죄 하면 겉으로 드러난 어떤 행위를 죄라고 하는데 성경에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린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따라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가운데 거하며 그분의 형상을 구현하고 안식의 삶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인데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분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 되어 살아가려는 태도 이 모든 것이 관계를 깨드리는 것이요, 이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언약이 인류최초의 행위언약입니다. 여러분 혹시 자녀들과 이런 약속을 해 본적이 있나요? ‘너 이번에 너희 반에서 몇 등 안에 들면 스마트 폰 사줄게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준다. 선악과도 인류최초의 행위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네가 선악과 열매를 먹지 않으면 생명과 복을 준다. 그러나 따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행위언약"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조건부 언약"인데, 약속을 지키면 나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언약 당사자 : 언약에는 반드시 둘 이상의 당사자가 있어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체결된 첫 번째 행위언약에서는 언약의 주체(1당사자)이신 하나님과 언약의 객체(2당사자)아담이었습니다. 이때 아담은 자신의 허리를 통해 출생할 모든 후손을 대표해서 이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언약의 내용 : 불순종의 경우 사망, 순종의 경우 생명이라는 내용의 약속이 주어졌다.

언약의 조건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라'(2:17)는 명령은 선악과를 언약의 상징으로 하며, 그 열매를 먹지 말 것을 조건으로 한다.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그 조건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행위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이 의미는 이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주인으로, 창조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 중 가장 중요한 말이 뭘까요?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입니다. 이것이 타락이요,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려버린 것입니다. 결과 가장 먼저 찾아 온 것이 무엇입니까? 수치심과 두려움입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래서 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1.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여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 말의 의미가 뭘까요?’

여기 무화가 나뭇잎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과학 문명, 철학, 종교, 학문, 교육..등등 인간 쪽에서의 행위를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59: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64:5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보세요? 무화과 나무 잎의 특징은 잠시 잠간후면 말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공허를 메우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만든 것들은 한시적으로 만족감과 안전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인간의 공허함을 온전히 메워주거나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수 는 없는 겁니다.

돈 명예, 철학, 종교, 학문, 교육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목마름을 완전히 해갈 할 수 없고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이렇게 고단한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될 줄 알고 가려봤더니 아니야, 돈으로 가려 봤더니 아니야 여전히 목말라요

여전히 부끄러워요, 쾌락, 권력, 명예를 얻어서 가려봤더니 여전히 부끄러워요, 우리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습니다.

혹 우리의 종교적 열심도 우리의 부끄러움, 수치를 가리기 위한 열심히 아닌가 살펴 보아야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공허함과 부끄러움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메워지고 가려질 수 있습니다. 보세요, 엄마가 빠져나간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 가려도 가려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지 않습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지거나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모든 죄, 수치, 부끄러움을 덮고 가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 3장에서 힌트하고 있는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리고 보면 인생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무화과 잎으로 가리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자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2. 부끄러움을 가리는 방법으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지금 아담이 누구를 공격합니까?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괜히 하나님이 주셔서 이런 사단이 났다고 여자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일까요?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기를 보면 너희가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은 그 현장에 아담도 같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여자 때문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처음 관계가 어땠습니까?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무슨 말입니까? 아와를 보니까 하와가 곧 나라는 말입니다. 온전히 하나죠? 서로 사이에 빈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니 틈이 둘 사이에 틈이 생긴 것입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분열을 통해 인간 사이에 분열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이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거 우리 모습 아닙니까? 결혼할 때 그렇게 사랑하겠다고 서약을 해 놓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뭡니까? 내가 당신을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이 내 일생일대의 실 수 라고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남을 욕하고, 비난하고, 판단하고, 시기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주 저급하고 불상한 사람인 겁니다.

 

3.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하나님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 바람은 루아흐, 소리는 인데 이 두 단어가 한 문장에 나올 때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 심판 자체로 마침표를 찍었던 적이 없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 면은 심판을 다른 한 면은 구원을 감추어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겁니다. 그럼 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을까요?

인간의 공허함과 부끄러움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힘으로 채워지거나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워지고 가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시는 겁니다.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만든 무화가 입으로 만든 옷을 거둬버리시고, 치워버리시고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가족 옷을 입히심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셨어요.

인간들의 노력 열심 모두 거둬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은혜의 옷으로 갈이 입히신 거예요.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그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옷을 지어서 입히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무죄한 짐승의 재물이 대신 죽고 그 재물의 공로로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힌트하고 있습니다.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자기의 백성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벌겨 벗겨 죽으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대신 안고 죽으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제는 가죽옷 정도가 아닌 의의 흰 옷이 입혀진 겁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 가죽옷을 지어입힘을 받은 자의 삶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여기 는 최고 권위가, 최고 통치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 하는 삶, 이것이 성숙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시킨 일이 뭡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때 나오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이스라엘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냥 지나간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 원수로 개취급도 안하는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치료를 정성껏 해주고 자기 돈을 털어 여관주인에게 맡깁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묻죠, 누가 선한 이웃인가? 당연히 사마리아 인이죠? 그런 가서 그와 같이 하라무슨 말입니까?

 

율법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는데,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를 선택해서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한 이웃이 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라 되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라아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등장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한 일을 생각해 봐라 그게 바로 가죽옷을 입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요? 원수까지 포함한 모든 이들입니다. 이 삶은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은 절대 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죽으심을 우리의 옛사람을 죽여 버리고 새사람으로 탄생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제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삶이 요구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사랑을 하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그 삶으로 끌로 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보통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2;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여기 못 박혔나니 동사의 시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제 완료형입니다. 그러니 과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도 함께 못 박혔고 지금 현재도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있다는 말입니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이 말은 사형집행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억 하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은 사형집행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히 여러분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사건과 상황들을 허락하셔서 끌로 가실 건데 우리가 거기에 올바르게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라는 그 증거를 이 땅에서 무엇으로 보일 수 있습니까? 열심히 종교 행의하는 것, 헌금 많이 하는 것, 그런 것으로는 증거가 안 됩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 가 아닌 가 인겁니다.

 

왜 하나님 사랑은 안 나오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이웃 사랑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에서 이웃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 게시죠? 아무리 사랑 하려고 하는데 사랑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사랑을 해요, 아무리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해도 사랑이 안 나와요, 내 감정이 따라 주지를 않아요, 내 감정이 내 의지를 안 따라줘요, 그래서 이 감정이 따라 올 때 까지 내가 사랑하기를 유보하는 자기 있습니다. 아예 포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안 돼 나는 절 때 사랑할 수 없는 존재야 이렇게 포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전에 의지이며 선택인 것입니다. 감정에 의해서 나오는 것은 라이크 좋아함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사랑의 한 요소로 감정이 들어가 있죠, 그러나 사랑 안에는 감정과 함께 의지와 선택이라는 요소도 들어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인들을 미워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미워하셔야 해요. 그런데 그 미움이라는 감정을 타고 넘어 사랑이라는 의지가 발동이 된 것입니다. 그걸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개밥을 잘 안줍니다. 목욕도 잘 안 시켜줍니다. 아프면 병원에도 잘 안 데려갑니다. 왜요? 귀찮으니까....개를 좋아하지만 개를 시중드는 것이 싫어서 개에게 내가 해야 할 바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은 좋아는 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수의사는 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를 정성스럽게 돌봅니다. 이것이 자신의 의무이며 책임이기에 의지를 발동하여 선택을 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수의 사의 행위는 위선이며 의무이며 책임인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이것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또 한사람개를 좋아할 뿐 아니라, 뿐 만 아니라 개를 너무 사랑합니다. 감정과 의지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하고 우리 안에서 나와야 할 사랑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타락한 우리에게 1차적으로 요구한 사랑은 감정까지 포함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까지 포함은 사랑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요구한 1차적 사랑은 선택적이며 의지적 부분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지 않고 원수를 좋아해라 그러면 큰일 납니다. 안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니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안 올라온다 할지라도 너희는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라는 겁니다. 선택적 사랑을 하라, 그러니 안 된다고 핑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선택하고 의지를 발동하여 사랑을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정까지도 동원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만 들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원수를 갖다 들이 되시는 겁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이 감정이 좋아질 때 까지 사랑하지 않을 거야 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고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명령 했으니까 의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을 받은 우리는 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안 되는지..기도하고 몸부림치고..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