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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창세기

08.네가 어디 있느냐 (창3:9-12)

by 오용주목사 2016. 12. 6.

08.네가 어디 있느냐

3:9-12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병원에 가는 것일 겁니다. ? 불안감 때문에, 혹시 나에게 무슨 심각한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싫지마는 의사 앞에 가야합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진단받는 것이 죽어도 싫은 겁니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이 든 자가 살기 위해 의사를 찾듯이 우리가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별도리가 없습니다. 안 찾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체의 질병은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영양제는 다 사놓고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에서 제대로 생활을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적 질병을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영적 질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무엇이 더 중요한지...

 

여러분 사람은 육과 영으로 존재합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아파르) - 티끌 먼지 ->

생기 ->

생령 - 살아있는 존재

 

이것은 장갑과 손과 같은 원리입니다. 여러분 장갑이 움직이니 손이 따라서 움직입니까? 손이 움직이니 장갑이 움직입니까? 손이 없으면 장갑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장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손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은 누구에게 가야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영은 하나님만이 온전한 진단이 가능합니다. 왜 입니까?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나가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나가는 것은 성경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1. 그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간은 누구인가?

 

한 마디로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한 인간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 정의 앞에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뭡니까? 기분 나빠합니다. 듣기 싫어합니다. 화를 내기도합니다. 성질을 냅니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을 부인 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진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사 앞에서 충격적인 진단을 듣기 싫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수긍하는 것은 의사의 권위 때문이듯 마찬 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진단하실 때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그 말씀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이라는 정의 앞에 두 가지 상반된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선설, 또 하나는 성악설입니다. 성선설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하지만 나쁜 환경이나 그릇된 욕망 때문에 악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며, 여기에 반해 성악설은 인간의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악()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다는 것입니다.

 

) 동생태어나면 시기, 질투, 미워하는 것 이것 부모에게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죄인이 되었나, 추적해 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극치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타락을 합니다. 그 타락의 핵심이 뭡니까? 산악과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이 거역은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입니다. 지금 까지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며 살았는데 이제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말하는 행동의 표시가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저에게 타락이 뭐냐? 죄가 뭐냐?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죄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자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죄요, 타락이다.

사실 창세기에서 사탄이 노렸던 공격의 핵심이 이것 아닙니까?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선악과를 따먹도록 집요하게 공격한 사단의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의 눈만 밝아서 되겠니? 니 눈도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라,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선악과의 열매는 안전하십니까? 혹시 다

따먹고 가지만 앙상하게 있지는 않습니까?

 

2.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결과 죄의 결과

 

1) 두려움이 생김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결과 눈이 밝아짐으로 자기 나름대로 기준이 생겼습니다.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기 전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기준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이라면 선이고, 하나님이 악이라면 악이었는데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자기의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후욕을 일삼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들이 되는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자기 기준입니까? 성경의 기준입니까? 자기 기준입니까? 다 자기 기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준이 높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기준이 낮기도 하지만 대부분자기 기준을 가지고 들이 됩니다.

 

저 사람이 좋다, 싫다, 예쁘다 못생겼다, 마음에 든다, 들지 않다 모든 것이 자기 나름대로 기준이 있어서 그 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을 왜 하세요? 자기 기준, 자기 생각에 안 맞기 때문입니다. 왜 공동체 안에서 마음이 상하세요? 자기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를 섬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감격하고 좋아하세요? 자기 기준보다 더 할 때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기준으로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긍휼과 사랑 그리고 은혜가 들어설 자리에 비판, 공격, 불편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사람이나 공동체의 긍정적인 면은 보이지 않고 부정적인 면만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기가 막힌 비판의 언어들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 나옵니다. 공동체의 중심에서 마음이 멀어지고 만사에 자기가 기준이 되어 어느 날은 검사가 되었다, 어느 날은 판사가 되었다, 재판관 역할을 자임합니다. 자신은 의로워서 그리고 자신은 똑똑해서 악이 보이고 비판의 논리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언젠가부터 가정 안에서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상대방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합니까? 허물과 부정적인 면이 보이기 시작합니까?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후부터입니다. 그 때마다 독한 말로 상대를 공격합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선악과 열매를 따 먹은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도어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의로운 사람인데 왜 그 마음엔 사랑이 없을까요? ? 신앙생활에 기쁨과 감격이 없을까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데 왜 감사가 없을까요? 분명히 옳은 비판인데, 똑똑한데 왜 정작 자신은 영적침체에 빠질까요? 잘해보자고 걱정해서 한 말인데 왜 정작 자신은 공동체의 아웃사이드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그것이 선악과의 특징입니다. 선악과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음의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명 의로운데 내 생명이 메말라 가고 내 영성이 고갈되어 집니다. 영적으로 그 영혼이 곪아 깊은 병이 들고 맙니다.

 

선악과의 영향은 자신의 영혼만 썩고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염성이 강합니다.

와가 선악과를 먹자마자 자기 남편에게 죽어 먹게 합니다. 감자, 고구마, 사과 박스에 썩은 놈 하나가 있으면 순식간에 박스 전체가 썩고 맙니다.

 

12정탐꾼 가운데 사실과 논리에서는 분명 10명의 보고가 맞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온 백성에게 전염이 됩니다. 이 전염병에 감염된 모든 사람은 광야에서 망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의 보고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왜입니까?

그들에겐 믿음의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일어납니다.

여보, 당신은 실수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주 안에서 새로워질 거예요.

아들아, 딸아 너는 지금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언젠가는 멋지게 일어설 거야!

이것이 갈렙의 믿음이요 여호수아의 눈입니다.

기억하세요.

선악과 정신은 사람을 죽입니다.

선악과 정신은 공동체를 죽입니다.

생명나무 정신이 사람을 살립니다.

성령의 사람이 공동체를 살립니다.

믿음의 언어만이 사람을 바꿉니다.

기쁨, 감사, 만족, 행복은 생명나무 안에 있습니다.

 

3)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은 결과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나니 수치심이 생긴 겁니다. 왜 수치심이 생기는가하면 그들의 눈이 밝아 지금까지는 하나님만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자신을 보게 된 겁니다. 바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오늘도 선악과를 따 먹은 자의 보습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 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 한 자의 모습은 우월감과 열등감, 상대를 무시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런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다. 남보다 못나 보이고 없어 보여서 갖는 수치심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이후에 생긴 감정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니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언른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음식을 잘 못 먹어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하면 어떻게 합니까? 얼른 소화제를 먹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수치심이라는 병든 감정을 무화나무 잎사귀로 가려보려고 합니다. 기억하세요. 그것은 수치심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가려지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 가려진다는 말 키페르에서 속죄함키푸림명사형이 나왔습니다. 속죄함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죄와 수치를 가려주시고 덮어 주십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은 자신이 만든 무화과나무 잎사귀 옷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어 보려고 합니다. 그때부터 인류역사는 무화과 잎사귀 만드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의 나뭇잎으로

어떤 사람은 권세의 나뭇잎으로

어떤 사람은 물질의 나뭇잎으로

어떤 사람은 자기의의 나뭇잎으로 자신을 치장해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 직분도 자신을 치장하는 무화과 옷 정도로 생각합니다.

여자들의 화장도 무화과 잎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존여비란 말을 요즘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는지 아십니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여자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사귀는 마르고 부셔지고 찢어집니다. 이것이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4) 책임전가 (3:11-12)

 

3. 그런데 나는 따 먹지 않았는데 왜 따 먹었다고 하는가?

대표의 원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

 

우리나라 축구대표팀 일본과 경기 이기면 우리나라가 이긴 것이고, 참패를 당하면 우리나라가 참패를 당한 것입니다. ?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범죄는 아담 한사람만의 범죄가 아니라 인류를 대표해서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지 않았지만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설교를 하면 우리 마음에서 더는 생각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얼울 해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상징적으로 여러분에게 있는 선악과 열매는 따먹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습니까? 열매 뿐 아니라 뿌리 채 다 뽑아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은 영적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괜히 반항하고 싶고, 집 나가고 싶고, 부모님 말씀에 거역하고 싶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하고 싶은 사춘기의 모습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4. 오늘 우리에게 정말 시급한 것은 무너지고, 뽑혀버린 선악과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1)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 찾으시는 음성이 복음이요, 이 음성을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 어린새끼 펭귄 엄마펭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데 다른 어린 펭귄들은 엄마 품에서 추위와 바람을 피하는데 이 엄마 잃은 펭귄새끼는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고 얼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됨, 이 때 엄마 펭귄을 새끼를 찾아 소리를 지름, 이때 엄마가 찾는 소리를 듣는 것이 축복이듯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소리를 듣는 것이 축복입니다.

 

어떤 분은 왜 하나님은 자꾸 나에게만 말씀하시지? 이런분 계시죠? 네가 먼저 용서를 구하라, 네가 먼저 찾아가 보아라, 네가 먼저 이해하고 용서하라, 왜 입니까?

 

오늘 본문 8절과 9절에서도 하나님은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하와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부르고 계십니다. 왜입니까? 아담이 먼저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당신을 부르십니다. 먼저 믿는 당신을 부르십니다. 말씀을 아는 당신을 부르십니다. 그 음성 듣는 당신이 가정의 영적 제사장입니다.

 

2) 그리고 이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러면서 서로 당신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아담은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는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하와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결국 하나님 탓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하와를 안 주셨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괜히 하나님이 하와를 주셔서 이렇게 된 것 아니냐고...

 

베드로의 설교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스데반의 설교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어찌 할꼬 입니까? 이를 갈 거늘 입니까?

 

다윗과 나단선지자

삼하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기도가 시편 51편 아닙니까?


그런데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삼상3:18 사무엘이 그것을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악과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기준이 생겨 자기에 대해 열등감, 죄책감, 수치심으로 가득하며 또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자기 기준을 들이댐으로 상처를 주는 자들입니다.

 

심지어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도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를 비판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이 시간에도 저급한 생각을 합니다. 이 시간에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에도 악하고 더러운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은 이런 나를 향하여 너 왜 그랬어? 왜 숨었어? 묻고 우리를 정죄하지만 하나님은 왜 숨었느냐고 묻지 아니하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씀은 어쩌다가 네가 이렇게 되었니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질문입니다. 용서하고 치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치료하시고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음성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이 보입니다. 가슴앓이가 보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용주야 네가 어딨느냐?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옷으로 수치를 가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치료하시려는 의원이 음성입니다.

피 묻은 손으로 닫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영적으로 침체된 나를 붙들어 일으켜 주시려는 음성입니다.

약점, 허물, 실수 다 고치시고 격려하시고 희망을 주려는 음성입니다.

시험 들고 넘어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씀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용주야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 앞에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선악과를 따먹은 자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 반응 앞에 하나님은 결국 창세기 315절에 가서 보면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어 내가 죽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아버지 사랑 내가 노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