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하나님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의 삶
창4:1-15
지난 시간은 창세기 3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하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대 주제는 ‘심판 받아야 마땅할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그 타락의 결과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찾아오고 인간은 그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 선행이나,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가리고, 또 다른 사람을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행이나, 착한 행동, 종교적 열심으로는 죄의 수치를 가릴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수치가 가리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우리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일이 무엇입니까? 짐승을 잡아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에서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모든 죄, 수치, 부끄러움을 덮고 가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죽옷을 지어입힘을 받은 우리의 삶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인데 그 삶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4장을 살펴보겠는데 창세기 4장에는 두 인물 가인과 아벨이 등장합니다.
성경에 아담과 하와는 거의 천년을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5: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여기 “자녀를 낳다” ‘야라드’ 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와우 계속 형으로 쉬지 않고 800년 동안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어떤 수학자가 아담과 하와가 평생 동안 낳은 자식들과 그 후손들의 자녀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아담이 죽을 때쯤 전 세계 인구가 10억 명 쯤 되었다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에는 전 세계 인구가 20억에 육박했을 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데 성경은 창4에서는 가인과 아벨 두 사람만 등장시킵니다. 왜 일까요? 이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뭘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선택과 유기(버림)입니다. 예) 유기견
여러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무리와 한 종류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무리, 즉 유기된 무리가 있습니다.
이 선택의 교리를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벌써 창세기 4장에서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대표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1. 유기된 자의 대표 가인 (불신앙의 대표 가인)
먼저 창4:1을 보십시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원어에는 ‘말미암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 그분을 얻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여호와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이가 하나님께서 창3;15절에서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인 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내가 메시야를 낳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 가인은 여인의 후손이 아닌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 된 자, 뱀의 후손 즉, 사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 아세요? 이 가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 선택된 자의 대표 아벨 (신앙인의 대표)
아담과 하와는 맏아들을 낳고 그 아이가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을 낳고 키워보니 아담과 하와는 크게 실망을 하고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 이름을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헤벨’ 즉 아무것도 아닌 자, 허무한다, 공허하다 라는 뜻인 아벨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전도서 헛되고 헛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담과 하와가 기대 속에서 가인을 낳은 후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아무것도 아닌 자,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열납 했다고 합니다.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받으셨으나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벨이 가인보다 더 잘난 것이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죽여서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혹자는 아벨은 피 가 있는 제사를 드렸기에 열납을 하셨고, 가인은 피 가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열납을 하지 않으셨다 말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사를 드리는 제물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결론이 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는 우리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것도 근거나 조건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띠라서 가인이 유기가 되고 아벨이 선택을 받은 것은 그들이 드린 제물의 내용 때문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면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여기 히브리 기자는 아벨의 의인이었다 말하죠? 그런데 그가 의인이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 그의 제물이 특별해서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이들과 달라서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열납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이죠. 그리고 “내가 너로” 너로는 뱀, 사탄을 말합니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은 십자가를 말하고, 그의 머리를 밟으신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뱀의 머리를 밟으신 여인의 후손 안에 한 무리가 들어 있는데, 이들을 성도,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도 여인의 후손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설명을 하면 창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시는 장면인데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하늘의 뭇 별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 즉 영적이스라엘인 교회가 그만큼 많을 거라는 겁니다.
여기 “자손” 히) “제라”로 단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거야라고 말씀하시면서 후손을 ‘자손들’ 이라고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제라”라고 단수를 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명이라는 뜻입니다. 어색하죠?
이것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3:16 이 약속들은(창15:4)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니 창15:4절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분(교회)은 예수 그리스도 한명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뭇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를 쫙 끌어올렸더니 그 속에 창세전에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을 믿는 자를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인과 같은 존재들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1장을 보면 음란한 여인 고멜이 음신하여 딸을 낳았는데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 즉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한 자 로 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 라고 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호2:1절을 보면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고 합니다. 암미 – 내 백성리라, 루하마 – 긍휼히 여김을 받은자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들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잘 설명해줍니다.
롬9:9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9:10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창세기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9:11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9:12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9:14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5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로마서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창 4장에서부터 출발을 하는 겁니다. 인간 측에서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도 하나님께 구원의 근거로 드려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타락을 하고 지옥을 향해 달음박질 하고 있을 때 그들 중 어떤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끌어 올리시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남은 자 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사10: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10: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10: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것이 심판 속에 꽃피는 구원입니다. 보세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저주 받은 가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심판 속에 꽃피는 구원받을 자,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라는 겁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의 삶 / 예배자의 삶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 받은 우리의 가장 주된 아이덴티티(identity)는 예배자입니다.
너는 누구냐? 이 질문 앞에 나는 성도입니다. 나는 신자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정체성은 나는 예배자입니다. 이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도 자기의 길고 긴 신앙의 여정을 한마디로 예배자로 보았습니다.
딤후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부어지고 : 제사의 끝 날 무렵 포도주를 붓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은 그의 인생의 여정을 한마디로 예배자로 보았고 이제 포도주를 붓는 것을 예배의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두 사람, 두 종류의 예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인의 예배요, 또 한사람은 아벨의 예배입니다.
1) 가인의 예배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에” 여기 세월은 욤(날)을 말하는 것이고, “지난”은 ‘케츠’로 심판과 종말과 연결될 때 사용하는 단어이며, 후에는 결과가 열매가 나온다 말로, 농사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은 농사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창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이 말은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왜 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피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 제사는 번제가 아닌 소제입니다. 번제는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하지만 소제, 감사제는 피를 뿌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물 자체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일까요? 창4:4 중반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아벨과 가인과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고 안 받으시고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어서 살아가고자하는 자들을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쳐다보지도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친 것은 아무것도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농사하는 자” 원어 “아바드”로 땅을 섬기는 자, 땅에 노예가 된 자란 뜻입니다. 이 땅에 목메고 있는 자들, 이 땅의 힘이 자기의 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들 하나님이 거들떠도 안본다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 가인의 제사는 형식적인 제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인의 예배는 자기중심적 예배입니다. 자기자원, 자기목적, 자기방법으로 드린 예배였던 겁니다.
2) 아벨의 제사
아벨은 어떻게 제사들 드렸습니까?
창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기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첫 것을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출34: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출22:29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22:30 네 소와 양도 그와 같이 하되 이레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여드레 만에 내게 줄지니라
출34:26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첫 것들을 재물로 받으시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 장자는 모두 내게 바쳐라 말씀하시는데 고대 사회에서 장자의 개념은 남자를 대표하는 것이고 남자는 가정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자를 내게 바쳐라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다 내 것이라는 뜻인 겁니다.
그러면 아벨이 첫 것을 바쳤다는 것은 아벨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고백이 었던 것입니다.
또한 첫 것을 드렸다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제물의 개념에 대해서도 정리를 잘 하고 계셔야 합니다.
제물이 뭡니까?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물이 제물이죠. 그렇게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있는데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것도 그 의미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더러운 것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일하게 예수님만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만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단순히 희생만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 또 생겨났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렇게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까?
진정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받쳐질 수 있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난 자들임과 동시에 그렇게 새롭게 살아남으로 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분이 받으실 수 있는 자들이 되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그날 까지 아벨처럼, 바울처럼 예배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한없는 은혜로 우리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가인과 아벨을 등장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자, 처음 것을 내게 바쳐라 하셔놓고는 처음 것, 장자들을 유기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기대를 잔뜩 않고 태어난 장자인 가인은 유기 시키시고 그 부모가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무것도 아닌 자, 아벨이 여인의 후손의 라인으로 등장을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장자인 이스마엘이 유기되고 차자인 이삭이 선택을 받습니다. 이삭의 자녀도 장자인 에서가 유기되고 차자인 야곱이 선택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비교할 때 야곱은 에서에 비해 훨씬 유약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합니다.
야곱의 자손은 어때요? 장자인 르우벤은 장자 권을 박탈당하고 그 장자 권이 요셉에게 넘어갑니다.
대상5: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정확히 말하면 장자권이 유다, 레위, 요셉에게 나누어집니다. 야곱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도 기대치 않았던 자들에게 장자권이 넘어갑니다.
요셉의 자손은 어때요? 야곱이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에게는 좌수를 에브라임에게는 우수를 엇갈려 놓고 축복을 하죠?
다윗의 경우도 이세의 막내아들 다윗을 들어 쓰십니다.
솔로몬은 어떤 가요? 압살롬, 나단 이러한 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은 구원에 관한한 절대 기여할 수도 없고 자랑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에서 풀어서 설명해줍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만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열심이나 공로도 구원의 근거로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의 삶은 한 마디로 예배자의 삶입니다.
아벨의 예배를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바로 양의 첫 새끼였습니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에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진정한 재물이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장자를 이해하고 있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첫 새끼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어떤 것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잘 따라오고 계시나요?
정리를 해보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는 두 갈래로 나누어집니다.
타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벨의 라인과, 타락이후 하나님께 유기되어 심판을 받는 가인의 라인입니다.
이 두 갈래의 흐름은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쭉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그럼 아벨은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라인에 속하게 되었는가?
요일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무슨 말입니까? 소속이 다른 것입니다.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해서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아벨은 선한 분에게 속해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의 재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벨은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가 아벨이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예배자의 삶입니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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