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하나님의 다림줄
아모스7:1-8
우리의 신앙 - 하나님과 친밀함
-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
- 여기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영적분별력
영적분별력이 있어야
-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의중, 의도,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음
결과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능.
반대로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자기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 하나님의 의중, 의도,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음
결과 -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불가능
이것을 이사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예레미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님 시대 종교지도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음.
1.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노아방주 -
(창6:15-16) 길이300규빗, 넓이 50규빗, 높이 30규빗, 창은 위에서 한 규빗, 문은 옆으로 상, 중, 하 3층으로..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성막 -
출애굽기 -성막의 식양 - 출39장 반복적으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
신앙생활 -
(딤후2:4)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특히 암7:7-8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 세워지지 않으면 거기에는 인간의 실적은 있고, 사람 앞에서는 귀하게 보일지 몰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 은혜가 없음. 뿐만 아니라 나의 헌신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결국 그곳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 - 하나님의 다림줄에 적용해 심판하심.
오늘 성도, 교회의 모습 ->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임재가 없음,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음 ->회복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 세워져야함. 이때 진정한 은혜가 흐르고, 성령이 마음껏 역사함.
오늘 우리의 예배를 봐도 마찬가지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 은혜를 다 경험하길 원하지만 진정한 예배회복은 예배순서, 악기, 조명, 성가대를 사와도 안 됨 -> 진정한 예배회복은 성경이 말한 하나님의 기준에 잘 맞추어서 드려질 때 그곳에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 있음.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기도와 금식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서 세워질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사역, 하나님과 친밀함도)
2.하나님의 다림줄과 영적 분별력의 정의
하나님의 다림줄 -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기준을 말함.
성경66권 ->정경 ->캐논(Canon) ->“자”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이 들어 있음.
영적 분별력 - 하나님의 기준인 다림줄을 볼 수 있는 성령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
하나님의 다림줄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 그러나 그것을 벌 수 있기 위해서는 성령의 비추심을 통한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함.
하나님의 기준을 볼 수 있기 위해 성경을 잘 아는 것이 중요,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음, 성경적 지식 그 자체가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지 않음.
(예) - 바리새인 - 성경박사들 - 철저하게 영적 장님.
3.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심, 그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함, 인간의 생각은 의미 없음.
예)구원 - 밤마다 철야, 생각나는 죄 다 회개, 재산 팔아 구원해 달라고 헌금, 성경 읽음.
그래도 구원 못 받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기준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기도도 하나님의 길을 따라 기도할 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것(기도,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사역)이 하나님의 기준을 따하 행할 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편에서 아무리 큰 희생을 드려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순수한 동기만 있으면 되지 않느냐.. 순수한 동기는 무척 소중합니다. 나눠진 마음은 우상이기 때문에, 그러나 순수한 동기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항상 2가지를 구함 1)나누어지지 않는 마음과 2)주의 길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함.
4.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이무런 소용이 없음.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하기 때문에, 우리의 아무리 큰 희생이나 헌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합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①사대교회(계3:1-2) - 사람의 평가 ->살았다, 하나님의 평가 ->죽었다
사대교회는 잘나가는 교회였음, 활동력이 강하고,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침체되어 있 는 교회가 아님, 자타다가 공인할 정도로 많은 일을 하는 교회였음. 그런데 주님의 평가 는 실상은 죽었다 ->관점이 달라요.
그럼 왜 죽었는가?
왜? 그들이 배운 대로, 들은 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림줄 가운데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처방이 무엇인가?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즉 받고 들은 것을 기 억하고 순종하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라는 겁니다.
②에베소교회 - 훌륭한 교회, 그러나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 말씀.
③서머나 교회(계20:9) - 사람의 평가 -> 가난한 교회, 하나님의 평가 ->부요하다
④라오디게아교회(계3:17) - 사람의 평가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의 평가 ->가난, 가련, 헐벗고 굶주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관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야 바른 신앙생활인 하나님의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람의 관점은 엄청 소중히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관심밖에 있음.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볼까 에는 엄청 신경을 쓰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보실까 고민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모습입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전혀 관심밖에 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의 관점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잘 봐주시겠지 당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도 ‘너희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가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서로 칭찬만 원한다’고 말씀하심.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십니까? 아님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시나요? 뭐라고 대답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심, 왜? 실제는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김보다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김.
오늘 우리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실로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위하여 몸부림치는 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도 바리새인과 똑같음.
고전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울 때 하나님의 기준은 금, 은, 보석으로 세우는 것인데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어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다는 겁니다. 즉 우리의 신앙이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무리 화려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함께하니 성장하지 하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것은 그들의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 에베소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니 사람들이 볼 때는 훌륭한 교회였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 -시대말 적인 상황
예레미야 40년 사역,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북쪽에서부터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 바벨론이 쳐들어올 것을 예언, 그 예언대로 되고 있음을 목도함.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지를 보세요.
렘6: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유대 -> 시바, 에티오피아 2,000키로 정도
원방 -인도
이렇게 정성을 다했는데 이들이 자기들이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안 받는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받는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비싼 향유를 드렸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 안 받는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왜? 예배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우리의 그 어떤 희생, 헌신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5. 하나님의 다림줄은 가리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임.
하나님의 다림줄 -> 하나님의 기준 ->성경이 하나님의 기준임.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 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가리어지면 - 절대 올바른 신앙은 불가능하며, 절대 회복이 안 됨. 우리가 회복을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의 다림줄을 회복시키십니다. 교회회복도 하나님의 기준이 회복되어야함.
우리가 하나님의 다림줄을 모르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음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
렘6장을 봐도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어져 있으니 자기들은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하나님을 너무 멀리 떠나있음.
다림줄이 가리어져 있다는 의미
마12:1-7
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죄를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현대어 성경에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성경 구절의 뜻을 너희가 제대로 알았더라면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바리세인들이 이 뜻을 몰랐어요. 그러면 무엇을 몰랐다는 말인가?
이 구절이 호세아6:6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호세아6:6절에 나온다는 것을 몰랐다는 건가, 아님 하나님은 제사보다 사랑을 원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건가, 아님 바리세인들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그럼 그들이 뭘 몰랐다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오늘날 성도나 교회 목회자들에게 계명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 물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어져있으니 그 사랑의 의미를 몰랐어요. 그들은 의식을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신앙의 A. B. C에 해당하는 것이 가리어짐.
6.다림줄이 가리어지면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올바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그 시대를 어떻게 보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한 의도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1:4, 10-15절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단순하게 이사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이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을 멸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함.
호세아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떠났으니 하나님을 버렸으니 당연히 심판이 오지, 하지만 우리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주일날 예배드리고, 헌금도하고....그러니 안 떠났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들은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이랬을 거예요, 아니 하나님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다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림줄이 가리어지면 성경을 읽어도 내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도, 버렸다는 의미도 전혀 모름.
또 보세요 6절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는 “율법을 잊었다고 하니”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심판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잊었다, 버렸다 의 의미?
예)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 십니까? 여러분과 물질의 주인이십니까? 교회의 주인이십니까? 당연히 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의 삶은 주인이 아님. 이것을 성경에서는 말씀을 잊었다, 버렸다는 겁니다. 이제 조금 보이세요?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지면 이러한 구절을 수없이 읽어도 그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7.다림줄이 기리어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는 보지 못합니다.
보세요, 여기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사야시대, 호세아시대 자기들의 조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압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은 이사야를 톱으로 켜죽었습니다. 왜? 자기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사야가 와서 이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물론 안 받아 들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관점을 못 보니까 자기들의 관점으로 생각하니 자기들이 옳고 이사야가 틀린 거예요. 그래서 톱으로 켜 죽인 겁니다.
그로부터 무려 600년이 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틀린 것을 알았나요? 몰랐나요? 알았어요?
(마23:29-31 “29-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보세요, 바리세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비석을 꾸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때에 살았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은 보았어요? 못 보았어요? 저들은 문제가 있는데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물어 볼게요.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어떻게 해서 틀린 것을 알았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은 성경을 믿었거든요. 그들은 이사야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고 또 이사야가 성경인 것을 믿었기에 성경이 저들에 대해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요,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성경을 믿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 해요. 바리새인시대에 자기들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대로 판단하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화있을 찐저....하면서 너희가 그 조상의 그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칭찬은 못해줄 망정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 증거 하다니요, 이해가 안 되었을 겁니다. 지금비석을 새롭게 꾸미고 있는데...
잘 보세요. 여기 바리새인들이 있어요.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왜 성경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들은 보지 못했어요.
문제는 자기 조상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은 못 보았어요.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했어요? 자기 조상들은 이사야를 죽였지만 자기들은 이사야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죽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보이세요?
자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지나갑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몰라요? 당연히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아요. 어떻게? 성경에 나와 있으니, 그런데 우리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럼 성경이 한없이 계속 쓰여 져야 하느냐? 아니에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호세아 시대에 무엇을 두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았다면 자기들의 삶을 비춰보고 돌이켜야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니까..
그들은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알았어요. 표면적으로만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성경말씀을 표면적으로 그대로 믿었기에 자기 조상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자기들의 문제인 것을 이 만큼도 보지 못했어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뭐냐 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성경을 믿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수없이 설교를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가를 몰라요. 그래서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 자기를 보지 못한 겁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8.영적으로 보지 못함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되지 못합니다.
육신적인 소경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영적 소경은 자신이 영적인 소경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육신의 소경보다 영적인 소경은 훨씬 심각합니다.
육신의 소경 -불편함,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음. 크로스비 찬양3000곡
영적인 소경 -심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불가능, 결과는 하늘나라에 까지 미치게 됨.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지면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 예레미야시대 이스라엘 백성,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코앞에까지 닥쳐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함. 그런데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이 몰랐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정당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가리어지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심각합니다.
요점
1.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똑바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2.하나님의 다림줄과 영적 분별력의 정의.
3.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다림줄만 통합니다.
4.하나님의 다림줄에 맞추어 세워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이무런 소용이 없음.
5. 하나님의 다림줄은 가리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6.다림줄이 가리어지면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올바른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7.다림줄이 기리어지면 과거는 보아도 현재는 보지 못합니다.
8.영적으로 보지 못함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화 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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