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붙잡히시다 (마 26:47-56) 최왕락 목사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실 때,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군인들을 데려 왔는데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치열한 전투까지 치룰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군인들과 미리 군호를 짰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대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이, 자신을 잡는 자들에게 반항 한 번 하지 않으시고, 잠잠하게 붙잡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밤, 제자들은 매우 당황스럽고 절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못하시는 것이 없는 능력의 주님께서 아무런 힘도 못쓰시고 그저 붙잡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무기력하신 것 같은 그 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왕이요 주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먼저 큰 무리들 앞으로 나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고 무리들이 “나사렛 예수라” 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 대답하셨을 때, 군인들이 물러가 땅에 엎드러졌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날 자신이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부리실 수 있는 분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53)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6)
이것이 우리가 분명히 붙잡아야 하는 믿음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주님은 만 왕의 왕이시다. 모든 상황의 주권은 주님께 있다’
이 믿음을 붙잡으면 상황이 이해가 안 되고 앞 길을 몰라도, 담대함이 생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가족들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어요. ‘언제라도 우리 가족에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제 안에 깊은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 3 때, 저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시고 그 날 부터 식물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때, ‘언제라도 내 가족 중에,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오늘이라도 헤어질 수 있다’ 라는 생각이 제 마음에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제 안에 있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고 오랫동안 이 문제를 놓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믿음이 바뀐 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자리에 꼼짝 없이 누워 계신지, 18년 되셨던 2016년 7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천에 내려가 아버지를 뵙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내일 입원하시면 또 찾아뵙겠다고 하고, 성남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타고 절반쯤 왔는데, 제 마음에 되돌아가라는 하나님의 감동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차를 돌려 40분 가량을 다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는, 왜 돌아왔냐 하셨지만 아버지 손 잡고 아버지! 저 왕락이에요. 이렇게 두어 번 불러 드린 것 같은데, 아버지가 하나님 나라에 가셨어요. 그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와의 이별도 슬펐지만, 하나님이 제 안에 ‘주님이 붙잡고 계시다! 나와 우리 가정을, 그리고 아버지를 붙잡고 계시다’ 라는 너무 분명한 믿음을 주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18년 동안, 이해가 안 되고, 힘들었던 모든 것이 다 달리 해석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천국 소망을 보는 눈을 열어 주셨어요.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가 계시고, 그렇게 기도 많이 하셨던 할머니가 계세요. 또, 주님은 인내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알려 주셨어요. 18년 간,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저와 우리 가정 안에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고, 우리의 믿음이 말할 수 없이 튼튼해 진 것입니다.
그 후 저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풀려났습니다.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그런데 이 찬송이 특징이, 예수님이 거느리시는데도 성도의 삶에 괴로운 일 슬픈일 다 온다는 겁니다. 2절에 때때로 괴롬 당하면 때때로 기쁨 누리네. 3절에 괴로우나 즐거우나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삶에도 괴로운 일, 슬픈 일, 이해가 안 되는 역사!!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삶을 “예수가 거느리시네!!” 인 겁니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즐겁고 평안하구나”입니다.
오늘 한가지 더 붙잡아야 할 것이 ‘져주는 십자가’를 우리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말이 낯설지요. ‘져주는 십자가!!’
예수님은 잡히신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붙잡혀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출발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나를 잡으러 온 상대를 제압하고 이기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져 줄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그 이름이 어떻게 시작되었지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하나님께서 져 주시며 주신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져 주셨습니다. 주님은 왕이십니다. 그런데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또 말구유보다 더 더러운 우리 마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가 질 십자가를 그분이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야할 십자가의 길은 먼저 져 주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에서 수없이 져주고 져 준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간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믿음의 부모님이 얼마나 저를 오래 참아 주셨는지요! 신앙의 선배들이 얼마나 제게 져 주었는지요!! 무엇보다 주님께서, 완고하고 악한 제게 끝까지 져 주시고 품어 주셔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는, 져 주는 자가 진정 이긴 자입니다.
져 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승리하신 주님과 연합한 자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 자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악착같이 이기려고 하지만, 우리는 손해 보고 져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져 주고 계십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충분히 꺽을 수 있는데! 오히려 무릎을 꿇고, 오히려 손해 보고 져 준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서로 받아주고 져 주는 곳이에요. 약한 자가 있으면, 받아주고, 이길 수 있어도, 져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세워지는 겁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어떤 것이든 전심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돌아보면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이 은혜요 감사였습니다. 그런데 아쉽고 후회스러운 일은 ‘내가 왜 그 때, 져 주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게 뭐라고, 그렇게 내 주장을 내세우고 그 사람을 이기려고 했을까? 그것이 지금 너무 마음이 아픈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이긴 것만 갖고 선다면,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지금도 세상은 어떻든지 이기라 가르칩니다. “성도도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어야 해.”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정 반대로 “너희가 지라” 하십니다. “속 옷 가지려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오른쪽 뺨을 치면, 너의 왼 뺨 마저도 돌려 대라”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 십자가의 부르심. 이길 수 있는데, 무릎 꿇어야 할 일이 오면, ‘주여!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시니 은혜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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