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예배와 삶의 균형
느헤미야3:1
우리는 계속해서 느헤미야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3장 2번째입니다.
느헤미야 3장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약2,400년 전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떻습니다.
(느1:3)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위기에 빠지니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느2:17)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총제적 위기 그 결과 수치를 당함
“수치” -> 히) ‘헤르파’로 여자가 벌거벗겨 부끄러움을 당할 때 사용하는 단어, 치욕
여기 수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
1)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과 수치를 받는 것을 의미
2)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를 받는 것을 의미
하나님의 선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비단 그 시대만의 일일까요?
오늘 교회의 모습, 성도들 모습 또한 마찬가지는 아닌가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오늘 교회가 위기다. 위기다. 말합니다.
오늘 성도들이 위기다, 위기다,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위기다 -> 침체기 -> 마이너스 성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이 사회로부터 벌거볏겨진 것처럼 수치를 당하고 있음
지난해 상영되었던 도가니 영화
한 청각장애인학교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2000년부터 5년간 청각장애 아이들을 상대로 교장과 교사들이 비인간적인 성폭력과 학대를 저질렀습니다. 그 학교 교장이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 장로님입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사회로부터 혐오시설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함
이러한 가운데 느헤미야 2장 17절에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수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회복이 필요합니다.
오늘 교회가, 성도들이 위기다, 가정이 위기다 하는데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 -> 먼저 예배 회복되어야 하고, 다음으로, 삶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예배회복과 삶의 회복 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예루살렘 성벽은 10개의 문과 4개의 망대로 되어 있는데 가장 먼저 양의 문을 회복합니다.
양의 문은 제사에 사용할 양들을 이문을 통해 들어왔다고 해서 양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양문을 가장 먼저 회복한 것은 제사 즉, 예배회복의 모든 회복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실타래가 엉켰을 때 그 엉킨 실타래를 잘 풀려면 첫 시작점을 잘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엉키게 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총체적 위기 가운데 회복의 출발이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1. 바로 예배입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강림하시기 때문입니다.
(출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복: 바라크
복의 핵심 -> 함께하는 복
동물의 세계 -> 사자가 사냥할 때 -> 어미에게서 떨어지게 만듬
도가니 영화 -> 부모가 없는 아이를 건드림
부모가 없으니 수치를 당함.
그런데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 그 곳에 강림하셔서 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뭔가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다는 겁니다.
개인, 가정, 교회, 모임,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어요.
출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오시면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침
그러기에 우리에게 무엇보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회복도 예배로부터 시작
가정의 회복도 예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 회복도 예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자로 서야 함.
1) 누가 진정 예배자가 될 수 있는가?
인류의 조상 아담
아담의 두 줄기
1) 가인
2) 아벨 -> 가인에게 죽임을 당함
아담에게 아들을 주심 -> 셋 -> 셋이 아들을 낳음 -> 이름을 에노스
에노스 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은 창4:26절 이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함 이 말은 “공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에노스의 뜻: 부서지지 쉬운, 죽어야 할 사람
누가 예배자가 될 수 있는가?
1)자기가 누구인가를 아는 자.
2)하나님이 누구인가 아는 자.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인하여 그분을 기뻐하는 것
영) 워십(worship)
워스(worth) : 가치를 상징하는 워스와
신분을 상징한 십(ship)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이죠
예배란? 최상의 가치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신분의 하나님께 나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임.
그러기에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
이것을 계4.5장은 천국예배의 관경
4장: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경배
(계4:10,11)
계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합당하오니: worthy(워~디) 가치있는
진정한 예배자-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에 대한 믿음과 감격이 있어야 한다.
5장의 초점: 구속자 하나님(성자)께 돌려드리는 예배(구속사) 구원의 감격
계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5:7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따라서 구원의 확신, 감격이 없는 자 - 예배 할 자격이 없음, 해결하고 해야함
우리의 위기 -> 수치(하나님을 떠나면 수치를 당함) -> 회복 -> 하나님이 오시는 것
예배가 회복될 때 하나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
2. 회복을 위하여 두 번째 삶이 회복되어야 함
본문에서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동으로 성벽이 재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한 것이 아닙니다.
하시지만 실제 성벽을 짓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이라는 겁니다.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은혜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균형은 너무 중요함.
치우치는 것 -> 위험 신호.
타이나닉 -> 한쪽으로 쏠림 -> 위험
한국교회 성도 예배쇼핑 다니는 것, 이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관계에서도 한 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한 겁니다.
오늘의 문제가 뭡니까? 균형 감각을 잃어 버렸어요.
예배는 드리는 잘 드리는 삶이 없어요. (삶의 예배)
본질은 강조하는데 의식은 없어요.
다윗의 장막은 찾는데 실제 삶에서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아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고 하면서...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긴다면서 여전히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며 삽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이 대공사 모든 사람에 삶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드리고 이제 하나님에 알아서 해 주겠지가 아닙니다.
예배가 회복되었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남편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그렇다면 가정에 돌아가 삶을 드려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삶을 드리는 겁니다.
27차 십자가와 성령 컨퍼런스가 다가옵니다.
이제 내일부터 중보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하는 것 정말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멈추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의 삶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다음 주 부터 게시판에 컨퍼런스 분과별 섬길 자 모집이 붙을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삶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약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신앙의 본질
하나님과 친밀함의 영역 (예배)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영역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대역사에 누가 참여 했습니까?
1)대제사장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느3: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무슨 말입니까?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을 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일에 있어서 리더급에 있는 사람들이 앞장을 서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 후 가안 땅에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넜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그치고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어찌 보면 물 두 번 건넌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큰 의미가 있음
공통점, 홍해를 건넜다, 요단강을 건넜다. 둘다 하나님 은혜로 건넜다..
그런데 차이는 뭐냐하면
홍해를 건넜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
출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이 다 하셨어요. 저절로 물이 갈라진 거예요.
그런데 요단강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수3:15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요단강 앞에서는 자동으로 물이 갈라지지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까?
수3: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여러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누군가는 희생하고, 누군가는 헌신하고, 누군가는 죽기를 각오하고 범람하는 요단강물로 뛰어드는 것 같은 이런 솔선수범하는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오이코스가 회복되려면
누군가가 희생을 각오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솔선수범하여 앞장을 서면 그 오이코스 식구들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러한 솔선수범하여 실천하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리더들이 권위만 내 세우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지체들이 오이코스 리더들이 무서워서 전화도 편하게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누굴 만나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섬김은 없고, 희생은 없고 권위만 내세워서 그래요.
리더가 더 앞장서야 함
2)빈부귀천의 차별 없이 모두 참여했습니다.(1-32절)
성벽 건축에 참여할 사람들 보면 매우 다양합니다.
유다총독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던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지도자들과 유지들도 있었고,
이스라엘의 백성의 종 된 비천한 느디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26절).
대제사장의 직책도 있었고, 금장색과 향품 장사와 각종 상인들도 있었었다. (8,32절).
남자도 있었고, 여자들도 있었습니다(12절)
요컨대,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여 있는 모든 이들,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성벽 재건의 역사에 참여했습니다. 서로 서로 기피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한 형제요 자매처럼 함께 성벽 재건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어느 누구의 특정적 소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 마음에 주의 전을 소원하는 자는 모두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인 교회 그 자체가 부름 받은 성도들의 '모임'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일은 반드시 함께 하도록 되어 있고, 또 함께 참여하는 데에 그 진정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에 우리 포도나무교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광의 도성으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한 영광의 도성!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렇게 세워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 모두가 이 대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구경꾼 한사람 없이 위로부터 아래로 어린 아이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 나가는데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도 땅도 금도 은도 내 것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 성도들의 피와 땀과 정성과 눈물 그것을 통해서 확장되며 지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오늘 성경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라도 다 동원이 되지 않습니까? 딸들도 아들들도 다 나오라, 그래 가지고 이렇게 예루살렘 성을 중수해 나가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3).그 다음은
느헤미야 3장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는 “그 다음은”입니다.
이것은 일의 순서를 밝히는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이 “next him, next them”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은 자기가 서야 할 위치에 서서 그 일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자기가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서 그 일을 하고, 그래서 이 엄청난 예루살렘 성의 건축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이라는 말은 3장 1-32절중에서 22구절에 걸쳐서 29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질서 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협력하여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4) 격려
오늘 이 책을 기록한 느헤미야 그가 이 책을 기록 하면서도 이 책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 또 느헤미야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름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성 건축에 수고한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이 모든 대역사의 수고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해 보신 분들이 왜 교회의 일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까?
열심히 `일하고도 제일 비판당하기 쉬운 것이 교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월급도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치도록 열심히 일하고도 나중에 실컷 비판만 당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각자가 한일을 일일이 기록함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과 격려가 될까요?
이러한 격려가 바로 예루살렘 성의 위대한 역사를 마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따뜻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격려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이것이 교회의 일꾼들에게 좌절을 안겨다 주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말없이 수고한 어느 분의 손을 붙잡고 격려를 할 때가 언제였습니까?
회복
예배회복과 삶의 회복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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