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식과 결단의 균형
느헤미야 2:1~5
세계 3대 폭포: 이과수 폭포, 빅토리아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인데 그 3대 폭포 중 하나인 아이라가라 폭포 위를 최초 외줄 타기로 건너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닉 왈렌다 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2012년 6월 15일 높이 46m, 외줄의 길이가 196m에 폭이 고작 5cm에 불과한 외줄타기에 성공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까지 나이아가라의 안전한 하류를 선택하여 건넌 사람은 몇 명 있었지만 엄청난 바람과 물줄기가 몰아치는 폭포 위를 건넌 사람은 닉 왈렌다가 최초였습니다.
그가 나이아가라 폭포 위 외줄타기를 성공한 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바람이 불고, 물보라가 몰아친다 해도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 역시 신앙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전거) 그래서 성경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통해 “신앙의 균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70년이 차면 회복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렘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행동양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헨리블랙가비 목사님: 하경삶에서 7가지 행동양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일
2, 사랑의 관계를 추구
3, 초청
4, 말씀
5, 믿음의 갈등
6, 조정
7, 순종
1 ~ 4의 영역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영역
5 ~ 7의 영역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영역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통하여 이 약속을 이루어 가시고 있다는 겁니다.
이 한 예로, 왕상17장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과 아합의 범죄로 하나님께서 3년이 넘도록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왕상18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왕상18:1) “많은 날이 지나고 제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왕상18: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여러분 보세요, 여기 3년이 넘는 가뭄 후 지면에 비를 다시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겠다 하셨으니 비가 오기를 기다리면 될 텐데 엘리야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기도합니다.
(왕상18:42)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18: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18: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비를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만 엘리야는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비를 오게 한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엘리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비를 오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엘리야의 동참을 통해 그 일을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비를 내리겠다는 하신 분이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계획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동참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남편, 아내, 자녀를 회복시키는 것 ->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참을 통해 이 일들 이루십니다.
전도 ->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것 -> 전적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참을 통해 이 일을 이루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들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면 그 일이 잘될까요? 잘 안될까요? 잘 안됩니다. 안 되도 너무 안 됩니다.
모세를 좀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내려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라 하심
이 때 모세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출3:11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4:10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부르심
렘1: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요나를 보세요.
요나서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기 위하여 요나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지리도 말도 안 듣는 요나 아닙니까?
니느웨로 가라니까 정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보세요, 하나님께 일하시는데 다 방해만 되고 걸림돌만 되잖아요. 되는 일이 없어요.
여러분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참 쉬운 일을 어렵게 하신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참 하나님 피곤하게 일하시고 비효율적으로 일하신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비효율적으로 이렇게 말도 안 듣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실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은 쉽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추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 이것이 효율적이냐, 비효율적이냐를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가?
1)사랑하기 때문
2)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환난 많은 세상에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일에 동참 -> 이루심
자동차구입
아파트를 구입
좋은 옷을 구입하면 그 기쁨이 얼마나 갈까요?
유치원에서 자녀들과 만들기를 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자녀들이 하는 것 보면 참 답답하죠,
아빠가 하면 훨씬 효율적입니다.
시간도 단축되지, 재료도 절감되지, 더 잘 만들지... (3G).
그런데 왜 아빠들은 어린 자녀들이 하도록 지켜보고 있을까요?
그것이 아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자녀를 격려하고 싶은 거예요.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실수 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일괄되게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골치 덩어리 제자들을 뽑아서 데리고 다닙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그 일이 이루어지려면 두 가지 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영역입니다.
둘째, 삶을 결단하는 영역, 이 두 영역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1.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영역
인식이란, 자기 처지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보고 그 심각성을 아는 것.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한 가를 내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느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사대교회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오디기아 교회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처지를 보아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회복하는 과정이 참 의미가 있습니다.
쓸데없이 아버지를 떠나 엉뚱한 곳을 헤매면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탕자가 회복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그가 회복하게 되는 가장 첫 번째 단계가 뭐냐 하면 현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돼지 쥐엄 열매를 먹고 연명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참함.
하나님의 생명이 그쳤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회복에 대한 첫 번째 열쇠는 우리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렇게 무기력하라고 주신 것이 교회가 아닌 현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가정도)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자각
예배시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것을 정상이 아니라는 자각.
그렇게 맹숭맹숭 예배드리는 것을 정상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이거 뭔가 병 들었다.
이거 지금 뭔가가 심각하다.
방치해선 안 되겠다. 인식입니다.
여러분! 자기의 처지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힘입니다.
우리가 처지를 인식하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그쳐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서 상실 되어 있고
내게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을 진짜 아는 사람은
그 주님의 임재가 돌아오기까지 잠잠치 않고 주님의 임재가 다시 회복되기 까지 밤낮으로 부르짖고 하나님을 열망함.
오늘 내 가정이 위기다.
오늘 성도들이 위기다.
오늘 교회가 위기라는 사실을 정말로 인식한다면 입술로만 위기다 외치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사람 – 처지인식 ->절망
예수님을 믿은 성도 -> 처지인식 ->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됨.
여러분은 어떤 자리로 나가십니까?
하나님!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가게 은혜를 부어주세요.
2.기도한대로 삶에서 순종하는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처지를 인식 하고 나니 그 인식이 기도로 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 다음 느헤미야가 한 것이 무엇입니까?
(느2:5)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느헤미야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했어요.
그리고 나를 유다 땅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삶의 결단의 영역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1단계,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는 하는데
2단계, 삶의 결단이 없어요.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거예요.
열심히 교회 나가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삶은 전혀 변화가 없어요.
성품은 전혀 변화가 없어요. 달라지지 않음.
느헤미야 보세요,
그는 포로민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했어요.
왕의 신임도 얻었습니다.
어쩌면 기도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한 유대 땅을 바라보면서 울며, 금식하며, 4개월 동안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떠합니까?
내가 4개월 기도하면 됐지.....이 만하면 할 만큼 했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를 유다 땅으로 보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도는 내가 헌신은 당신이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기도하였습니까?
그다음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소서입니다.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까? 그게 다가 아닙니다. 가야해요.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눅15:18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먼저 자기의 처지에 대한 인식을 합니다.
내가 뭐하는 짓이냐,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인식을 하고 나니까 마음에 결심이 일어납니다. “그래 내가 돌아아야 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 까지 탕자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예배 시간 눈물을 흘리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남.
그 다음 두 번째 단계가 뭐입니까?
2단계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식의 단계,
삶의 결단의 단계
현실에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가 중요한 겁니다.
1.느헤미야와 같이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영역입니다.
2.기도한대로 삶에서 순종하는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영역이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가 뭔 줄 아세요.
1은 있는데 2는 없음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는 하는데 삶의 결단이 없음.
롯: 소돔고모라 성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이곳에 내가 머물 곳이 아닌데 그러면서 삶의 결단이 없어요. 결과: 비참
2는 있는데 1은 없음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니 얼마 못가서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식어 버림.
여러분은 어느 쪽이세요.
그래서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영역과
삶의 결단의 영역이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왜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눈에 보였으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관심~~~
아내의 약한 부분이 보입니까? 먼저 기도하시고 그 약한 부분을 채우셔야 합니다.
남편의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까?
남편을 위해 정말 기도하시고 그 부족한 부분을 아내가 채우셔야 합니다.
리더의 연약한 부분도~~~~
다음주일은 위원회에서 함께 섬길 일꾼을 모집합니다.
여러분 예배만 달랑 드리고 내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주 동안 기도하시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위원회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섬지지 않고는 신앙이 회복되고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병원 어제 수술했는데 오늘부터 운동하라고~~~ (운동해야 빨리 회복됨)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러기 위해 두 영역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1)현실에 대한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는 영역
2)삶의 결단의 영역입니다.
성도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가정을 바라보며, 조국교회를 바라보며 처지를 인식하고 기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 이렇게 묵상해 보십시오.
내가 찾아야 할 황폐한 유다 땅은 어디인가?
주님이 가라고 명하신 땅은 어디인가?
또한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갔듯이 오늘 내가 찾아가야할 사울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2013년 포도나무 공동체 안에서 내가 작은 영역이라도 섬겨야 할 위원회는 어떤 것인가 깊이 묵상하는 한주가 되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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