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믿음과 영접
요1:1-1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 성경의 핵심 봉우리가 있는데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가장 첫 번째 봉우리는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두 번째 봉우리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롬3:23)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세 번째 봉우리는, 이런 죄인을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시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네 번째 봉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다섯 번째 핵심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영접에 대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잠시 정리를 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대신하여 속전,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 영접이 왜 중요하는가 하면, 예를 들면 여기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제약회사에서 100% 완쾌 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이 그 약을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약의 효능이 좋다고 한들 먹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완성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취하지 않으면 그 구원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믿는 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영접지 않으면, 믿지 않으면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생각하고자합니다.
1.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롬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무엇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적으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진리를 지적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다른 말로 우리가 말씀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핵심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전15: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믿는 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지적으로만 믿는다면 바리새인들처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지적으로 알아야 하지만 또한 영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안다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아는 것,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의중과 뜻과 길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찬 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도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구원을 받는 다 말할 때 그 의미는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의 눈을 열어 그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게 해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행함(도덕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지적으로 믿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믿게 될 때, 그 믿음이 참다운 믿음이며, 그 참다운 믿음은 반드시 도덕적인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몰라도 도덕적인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참다운 믿음이 아닙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회개도 마찬 가지입니다. 지적으로 동의 ->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음 -> 가는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는 것도 가장 먼저는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개깨닫는 것이며 그 다음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2.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받습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헬라어에는 영접한다는 말이 세 종류로 사용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데코마이: 선물 혹은 월급을 줄 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것
마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2) 아펜테시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영접할 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손님이 내 집에 왔을 때 환영하며 환대하는 것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마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3) 람바노: 이 말은 환영이나 환대의 의미보다는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적극적으로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요12:1절에서 “영접하는 자”할 때 영접은, 아! 예수님 내가 환영합니다. 빨리 오세요. 내 안에 들어오세요. 받아들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내가 예수를 끝까지 붙드는 행위를 영접한다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 영접한 자 할 때 영접, 람바노의 시제가 부정과거입니다. 다시 말해 시제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 현제 미래에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영접했거나, 현재 영접을 하거나, 미래 영접을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나 현제나 미래나 계속해서 끊임없이 붙잡는 것이 부정과거시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숨을 쉰다할 때 그것은 과거, 현제, 미래 계속해서 숨을 쉬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것을 부정과거 시제라고 말합니다.
엡5장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부정과거 시제, 과거나 현제나, 미래에 한번 성려의 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 마치 샘이 멈추지 않고 계속 물을 솟아내듯 시제가 없이 움직여지는 형태를 부정과거 시제라고 말하는데 이 영접이라는 람바노가 단어가 부정과거 시제로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영접이란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결혼식과 결혼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결혼식과 결혼은 다르지요. 결혼식을 하는 것과 결혼의 삶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영접이라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한번 받아들이는, 과거에 내가 한번 결혼식을 했지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결혼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영접이란 과거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 믿겠다 결심했다는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도 내가 그 예수를 붙잡고 있느냐 그 예수만 붙들고 있느냐 말인 것입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한번, 예수님을 영접할 때나, 세례 받을 때 한번 믿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영접한다의 뜻인 ‘람바노’는 내가 손님을 영접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내가 붙잡고 이제는 내 안에 모시어 들여서 이제는 완전히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는다’는 것은 ‘신뢰한다’ ‘믿는다’는 표현과도 그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신뢰하다’ ‘믿는다’는 것은 제자리에 서서 지지를 보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람바노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분을 그저 신앙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야. 나를 위해 죽은 분이지. 이제는 예수님을 열심히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교회가고 헌금을 해야지” 아름다운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생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을 자신들이 선택하듯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행객이 비행기를 믿고 비행기에 몸을 맡기듯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영접은 성경의 모든 약속을 믿고 그렇게 살도록 결단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
3.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까? 누군가 나를 설득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과연 믿음이 인간의 언어나 설득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일까요?
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것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예수님을 영접해야지,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지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어진 자들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는 누가 하나님의 택한 자인가를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할 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을 찾는 일이 곧 전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전도는 안 믿는 자를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찾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로 하여금 전도하도록 하시는 것은, 이미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는 자를 보내서 부르시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한 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람의 재주와 연관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전도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했는데 안 믿는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믿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됨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인을 알아보고 영접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진 은총이며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로 산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살아갑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문제점이라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받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물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곧 사탄의 종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운명이 믿음이 주어짐으로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바 된 것입니다. 아무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말만하면 던져주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만 선물로 주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받은 것으로 감사하기보다는 받고 싶은 것이 주어지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섭섭해 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애당초 예수를 영접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알아보고 영접할 지혜와 깨달음이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놀라운 기적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기적에 관심 없고 항상 다른 기적에만 마음을 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전혀 기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가령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자 '지금은 바빠서 안 되고 나중에 믿겠다'고 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과연 바쁜 세상일일까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쁜 일이 사라지고 한가해지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 역시 그냥 예의상 말하는 핑계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믿음의 방해물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찮게 생각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한가해지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생각도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믿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중대하고 급한 일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스스로 믿음에 대해서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이 주어졌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이 인간의 의지라면 믿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교회를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마음만 먹으면 교회를 나오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만 먹으면 여러분의 마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지울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밖에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 마음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육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때 그 마음은 탄식을 합니다. 애통해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는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연약함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탄식하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역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탄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탄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탄식이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서 되어지는 탄식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쁘신 뜻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서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마음은 이미 성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고자 할 때 그 마음이 경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롬 8:39절에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들었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끊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붙드신 이상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하나님을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 선물에 대해서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성도의 신앙이 쉽게 흔들리는 것은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 세상의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결과는 천국이지 이 세상의 풍성한 삶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보다 더 가치 있는 선물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에 힘이 없다면 믿음보다 더 귀한 선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스스로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은혜의 선물이며 신자가 자랑할 유일한 것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적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일이 끝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자로 택함 받고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를 흔들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여러분을 생명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권세가 없습니다. 이것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성도의 힘이요 권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은혜의 선물인 믿음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도가 원해야 하는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이 바로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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