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말씀위에 나를 싣는 삶
창 12:1-9
우리는 2주 동안 걸쳐 말씀에 ‘반응하는 삶’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말씀 세 번째 시간으로 ‘말씀위에 나를 싣는 삶’에 대해 살펴보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의 시작은 창세기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왜? 창세기인가? 그것은 히브리 성경은 책 맨 앞의 단어를 제목으로 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태초에”가 창세기 제목입니다. 히) 베레쉬트, 영) In the beginning, 70인역에서 제네시스라 부르는데, 70인역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던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합니다.
창세기는 총 50장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장 ~11장까지, 그리고 후반부는 12장부터 50장까지입니다. 전반부 1장~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닌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원역사라 부릅니다. 그리고 창 12장부터 아브라함을 부르심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족장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장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조의 극치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2장에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이 왕이 아닌 인간이 왕인 인간의 나라, 세상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세운 인류 최초의 나라가 바로 창11장에 나오는 바벨탑입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역사는 창11장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것이 창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나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따라서 창12:1~3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전을 “떠나라!”, “가라”는 명령으로 풀어내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화답했습니다.
창121~4을 같이 읽겠습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
하나님의 명령 - “떠나라!” “가라!” | ||
아브라함 언약 |
나라의 3요소 |
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비전 |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 |
영토 |
⇒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세우시고 다스리심!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2上) |
국민 | |
너는 복이 될지라(2下-3) |
주권 | |
아브라함의 순종 -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1.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간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말씀을 따라갔다는 말은 말씀위에 자기를 싣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는 노아가,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베드로, 바울.... 우리가 그렇게 부러워하고 담고 싶어 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뭐냐? 한 결 같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요단강 도하의 방법이 뭐였습니까?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강물이 넘실대는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만약 요단강물이 법궤가 쓸려 갔다면 여호수아의 아마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싣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싣지 못한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삼상13장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당시는 전쟁을 치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전례가 있는데 삼상10:8절에 보면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너의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을 기다리라”
그런데 삼상13: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13: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3: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13: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사울 왕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싣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하면서 사울 왕처럼 말씀에 자신을 싣지는 않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아브라함을 보세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말씀하십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아브라함이 살았던 우르는 문명이 발단한 곳이었습니다. 그 화려한 문명의 도시에서 그동안 그가 쌓아 놓았던 삶의 기반을 모두 다 포기해야 만하는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무작정 떠난 거예요. 무엇을 보여주고 떠나라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들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고 떠나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난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처럼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등장합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갔습니다. 한 사람은 말씀을 따라갔고, 말씀에 자신을 싣는 반면, 한 사람은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을 실었습니다. 사람을 따라가던 롯은 결국 자신이 선택하여 살던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할 때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맹목적으로 사람만 따라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과, 사람을 따라가는 사람, 자기 경험, 자기 논리, 자기 생각, 자기 계획, 목적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까? 아니면 사람을 따라, 여러분의 경험을 논리를 생각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말씀을 의지해 그물을 내리는 쪽입니까? 여러분의 경험을 의지해 그물을 내리는 쪽입니까? 분명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다보면 이 둘이 서로 충돌할 때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 내 생각, 하나님의 뜻, 내 뜻, 하나님 계획, 내 계획, 이 때 그리스도인이란 내 논리, 내 경험, 내 상식,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순종할 때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애들이 대화 중에 자주 쓰는 말 정말, 진짜, 이 말은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상대방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상대방을 못 믿나요? 그야 뻔 하죠,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러분의 경험, 논리, 판단을 이 세상적 가치관을 따라 가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정말 하나님을 아세요?
저희 장모님이 담도 암으로 투병 중에 있을 때 자주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지방에는 의료기술이 서울보다 낮다보니 지방에서 안 될 때 마다 올라오셨습니다. 그러면 이 곳에서 치료받고 좋아지셔서 내려가고 하셨는데 한번은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거제도 처형 집으로 내려 가셨는데 그곳에서 다시 통증이 찾아와 거제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서로 무슨 애기를 하다 부산 신평로교회라는 말이 나온 거예요. 그랬더니 옆에 간호사가 부산신평로교회 누구냐고? 그래서 오용주 목사님이라고 했더니 아! 오목사님, 자기도 신평로교회 출신인데 나를 잘 안다고 그러더래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정말 하나님을 잘 아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구요? 그래도 내가 모태 신앙인인데, 내가 신앙생활을 한지가 몇 년이데...
혹시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다는 하나님의 지식이 거제도 그 병원의 간호사가 저를 아는 그 정도 아닌가요?
그 간호사가 저를 안하고 하는 것 참 감사하지만, 여러분! 정말 그 자매님이 저를 잘 아는 것일까요? 내가 지금어디 사는지, 지금 내가 어디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지, 무엇을 마음 아파하는지.. 그 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는 것이라곤 과거 신평로교회 부목사로 있었다는 것과 몇 가지 지식은 갖고 있겠지마는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이정도 피상적으로 아는 정도는 아닌가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 잘 아세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삶, 하나님 말씀에 내를 싣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통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당신을 소개한 자기소개서가 성경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에 살펴보았던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실 때 시몬 베드로,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했는데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믿음이 어디서 생겼을까요?
그 답이 3절에 나오는데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씀을 들을 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고 따라서 “말씀에 의지하여” 말씀에 자신을 싣는 순종이 가능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기 위해 늘 말씀이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다섯 가지 중 묵상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듣기만 한 말씀은 머리에 머뭅니다. 그러나 깨달은 말씀은 마음에 새겨집니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시 119:97)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시 119:147-148)
위의 말씀들은 하나같이 말씀 묵상을 강조합니다. 묵상이란 “마음 판에 진리를 새기는 일”입니다. 마음에 새겨진 진리가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에도 부모가 먼저 그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긴 후에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6-7) 1온스(28.3g)의 묵상은 1톤(1,000kg)의 암송과 맞먹는다고 합니다(조이 도우슨).
성경에 여러 곳에서 부흥의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공통점이 뭐냐? 말씀이 부흥이 곧 영적인 부흥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느헤미야 8장에 나오는 부흥운동인데요 느헤미야 8장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52일반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면 다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8: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8: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부흥은 단순히 성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야 된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제 8장부터 이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부흥, 즉 말씀의 부흥이 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태도
이와 정반대 기록이 엘리제사장 시대 영적 암흑시대인데 왜 엘리 제사장 시대를 영적 암흑시대라 평하느냐? 바로 그 이유를 삼상3:1을 보면 알 수 있는데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여러분 이 기준을 아시겠습니까?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를 부흥하는 시대구요, 말씀이 들리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하나도 불편한 것이 없고,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그러면 그 시대는 암흑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우리 춘천이레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입니까? 암흑기에 들어간 교회입니까? 이 기준으로 봤을 때 답은 딱 나오는 것 아닙니까?
신약시대 부흥하면 초대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진작 사도행전에서는 부흥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요. 대신 뭐라고 하느냐?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하더라, 말씀이 흥왕 하는 것이 부흥이래요. 그래서 우리가 교회의 시작하면서 초대 21세기 신약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뭐예요, 말씀을 가까지 하고 말씀을 소중히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시작부터 강조하자 것이 뭡니까? 성경통독하자, 성경암송하자, 성경필사하자, 성경 말씀을 삶에 적용하자, 말씀에 반응하자 한 것 아닙니까?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을 아는 통로라면 또 하나 하나님을 아는 통로는 삶 속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갈망하는 태도입니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러분 여기 6:3절이 왜 이렇게 기록된 줄 아십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해가지고 하나님도 섬겨야 되지만 비를 주관하는 바알신도 섬겨야 된다. 그 바알 신을 섬겨야 된다. 그러니까, 이 말씀 속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데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두 가지 함축된 메시지가 있지 않습니까? 비를 주관하시는 것은 바알신아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뭐예요. 너희들이 비를 갈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해야 된다.
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 “알자”, “알자” 라는 단어는 “다아트”라는 단어는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야다’에서 파생한 단어 삶속에 하나님을 친밀함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는 마음에 없어진 그것이 암흑기에요.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나를 던져 넣는 담대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단6: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고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던지는 자입니다. 말씀이 그러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 말씀에 자기를 싣는 자입니다.
지난 해 성탄절 날 공중파를 타고 방송되었던 주기철 목사님의 일대기 일사각오를 보셨습니까? 주기철 목사임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해가지고 그 끔직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하셨는데요, 돌아가실 때 목사님 나이가 46 이에요. 여러분 이 목사님이 46에 일제의 그 잔혹한 고문 앞에 꺾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순교할 수 있었던 배창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았기 때문 아닙니까?
바라기는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더 알기를 갈망함으로 하나님을 다아트로 알아,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싣고, 작은 것 하나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작은 부분을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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