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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말씀에 의한 삶

06.말씀에 반응하는 성도(마7:24~27)

by 오용주목사 2016. 2. 21.

06. 말씀에 반응하는 성도

7:24~27

 

   

지난 23일 온 국민이 깜짝 놀랄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있었습니다. 학교에 장기결적을 한 한 여중생이 있었는데 세상에 자기 집에서 사망한지 11개월 만에 심하게 부패한 백골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숨지기 전 작년 315일에 아버지로부터 매를 많이 맞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16일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이 잘 달래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 근대 아버지가 돌아온 딸을 5시간동안 폭행을 했고 이 아이는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정말 엽기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딸의 시신을 방에 뉘어 놓고 이불을 덮고 시신이 부패하면서 악취가 나니까 방향제를 사서 뿌리고 향초를 피우고, 또 물먹는 하마 같은 제섭제 까지 동원해가지고 습기를 제거하면서 딸의 시신이 백골이 되도록 방치해버렸던 것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딸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연락해 왔지만 우리 딸이 가출을 해서 연락이 안 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딸이 사망한지 보름 만에 경찰에 가출신고를 합니다. 그리고 11개월 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지냈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 부천에서 한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라는 것입니다. 서울에 유수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까지 가서 바울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모교로 돌아와서 강의를 하고 있는 신학교수이기도 합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목사인 이 아버지는 딸을 살해한 뒤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유머가 넘치는 인기 강사로 통했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모두가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오랜 시간 공부했던 성경, 특별히 바울신학이 그의 삶과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끼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런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괴물로 변하는 것을 막아주는데 그 신학지식이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인격과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슬픈 현실 아닙니까?

 

이 사건을 접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도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사로서 이 말씀이 나 자신에게는 얼마만큼 작동되어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가? 나는 내가 전하는 말씀을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는가?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도 영적으로는 본질적으로는 이 엽기적인 신학교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실 여러분, 우리가 안 들켰을 뿐이고, 안 들킨 것이 훨씬 많은 사람들 아닌가요?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사람들이 다 몰라서 그렇지 만약 공개된다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겸손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인 문제인가요? 한 마디로 머리로는 성경지식이 점점 쌓여 가는데 그 지식이 삶 속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이 철저한 이분법적 생활태도, 이것은 사실 우리 모두의 문제 아닙니까?

 

예수님도 이러한 모습을 개탄하고 있지 않습니까?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신앙의 이력이 길어질수록 지식적인 신앙과 삶에서 실천되는 신앙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이 현실, 입술의 고백은 있어나 삶의 변화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서 이제는 우리 모두 직시할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시작된 산상수훈은 주옥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남기고 오늘본문 727절을 끝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성도는 동일하게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잘 새겨보아야 한다는 도전인 것입니다.

 

1.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결론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일뿐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4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참된 제자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주추를 반석 위에 두었기 때문에 어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금방 무너집니다. 무너질 집을 힘들게 지으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금방 무너질 집을 힘들게 짓는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양만 있지 엉터리 제자, 엉터리 신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바로 이 말씀이 마태복음 5, 6, 7장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주옥같은 산상수훈의 총 결론부인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실천하라, 실천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이다. 이 결론을 우리도 분병이 기억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번 해 보십시다.

 

먼저 마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에 밑줄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에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두 구절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어디까지가 같고, 어디서부터 다른지

일 치

다른 것

결 과

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짓는 지혜로운 사람

참된 제자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짓는 어리석은 사람

엉터리 제자, 무늬만 제자

 

그런데 여기서 집이 무너지는 것은 무엇을 위미 할까요?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이 말씀에 비춰보면 집이 무너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그렇게 배웠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진심으로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다면, 고백할 수 있다면 구원 받은 사람 아닌가? 확신이 있죠? 고린도전서 21: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고전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서는 주여, 주여 하고 예수님을 부르는데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선언하십니까? 여러분 뭐가 맞습니까? 이 답을 줄 수 있는 구절이 오늘본문 바로 위에 마7;16~2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무슨 말입니까?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에서만 포도가 열립니다. 무화과나무에서만 무화과 열매가 열립니다. 여러분 왜 포도열매가 열립니까? 포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해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행동이 신분을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신분이 행동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포도열매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being -> doing을 결정합니다. being에서 doing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리기 직전에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산상수훈 전체의 말씀을 실천해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참된 제자라면 반드시 이런 산성수훈의 열매들이 너희들의 삶속에서 나타난다 선언인 것입니다. 반대로 이 말은 열매가 없다면 참된 제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본문 24~27말씀의 핵심 내용입니다.

 

7:24~27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4, 26절의 나의 이 말을 듣고는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구절 행하는 자행하지 않는 자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확연하게 나누어 질 것입니다.

 

마치 옛날 출발동서남북을 기억하십니까? 먼저 질문이 나오고, 시간을 주고 난 다음에 O. X로 나누어서면 줄이 생기고 한쪽은 탈락하고 한쪽은 계속 올라가고 기억나시죠? 그런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을 다 섞어 놓아도 나중에 말씀을 듣고 행하는 부류와 말씀을 들어도 행하지 않는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비단 설교뿐 아니라 개인적인 성경읽기, 말씀 묵상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읽기만 하고 듣기만 하고 묵상하기만 하지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과 말씀대로 조금이라도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입니까? 지난주일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한번 적용을 해보셨습니까? 지난 한달, 지난 1년을 쭉 돌아보시면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쪽입니까?

여러분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가깝습니까? 조금만 정직하게 자신을 점검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시작이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은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말씀대로 실천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겼고 노력도 없고, 관심도 없고, 또 그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불편함이나 답답함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면 어떤 고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와 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좋은 나무이면 좋은 열매가 있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말씀의 실천 없이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신학이 있고 아름다운 성경공부와 설교가 준비되어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잘 훈련된 묵상이 개인의 삶을 장식하고 있다 할지라도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 신앙이요, 껍데기 기독교입니다. 껍데기로는 영혼 구원하는 것도, 제자 만드는 것도, 비전도, 미션도 21세기 신약교회도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다 보니 임종을 앞둔 분들을 많이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차이가 뭔 줄 아십니까? 반응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반응하지만 죽은 사람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살아있는가, 신앙적으로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무엇으로 판가름 나는가 하면 반응에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말씀에 반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살아있지만 죽은 자 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성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이 한해 이렇게 다짐하고 하나씩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반응형 성도가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삼은 일을 위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망가진 두부를 사기도 하고, 밖에서 장사하는 분들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해보기도 하는 말씀을 듣고 삶에서 실천해보려는 반응형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데 여기서 놓치지 말나냐 할 정말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모래위에도 집이 지어져 있고, 반석 위에도 집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래위에는 집이 안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멋지게 지어져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씀을 듣고 실천을, 반응을 하기는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외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초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즉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기초위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22절을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절에 행하다 와 21절에 행하다 둘 다 헬) “포이에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자기들의 행함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함이라는 확신 속에서 굳게 믿고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했잖아요, “포이에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함이 23절에 보면 주님에 의해서 부정당합니다. 7: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무엇을 잘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잘못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귀신들린 자들을 고처준 것이 잘못된 것인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해서 기적을 행해서 기적과 이사를 통해서 연약한 이들을 도와준 것이 잘못인가요? 이것 다 잘한 일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오늘날 교회가 열심을 부려가면서 추구하고 행하고 있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 하십니까? 왜 주님은 그들의 행함을 불법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을 하기는 한지만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1)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 스스로 노력으로 영생에 도달 할 수 없고, 우리 착하고 선한 생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통하여 영생에 도달 할 수 있고, 자기들의 행위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구제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성경공부하고,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모래위에 지은 집이요, 넓은 길,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요(13), 거짓선지자란 말입니다.(15)

 

그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열심히 구제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성경공부하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행하지만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요,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알기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2) 43: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자기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행치 않았고,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또 그들은 말씀을 열심히 공부했고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적을 행하는 자도 있었고, 권능을 행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제나 봉사나 섬기는 착한 일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을 먹어야 합니까? 당시 이 욕은 가장 더럽고 충격적인 욕이었습니다. 왜 그들의 착하고 기특한 행위가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합니까?

 

그들의 행위의 모든 목적이 다 자기목적, 자기 영광을 챙기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장으로 가서 인간의 행위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시죠. (6:1~6)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 영광 챙기기 위해서하는 모든 착한 일과 종교행위가 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법을 행하는 것, 모래위에 집은 것,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들이 주여, 주여 라고 애타게 부르는 이유는 자신들에게 권능 달라고, 능력 달라고 그래서 내가 뭔가를 해서 내가 좀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주여, 주여 부른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이야기가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반석 위의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석위에 짖는 집은 선한 행위와 열심 있는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이고, 모래위에 짖는 집은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이라는 성경해석은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행함으로만 본다면 모래위에 짖는 행함이 더 화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행함은 마지막에는 무너지고야 말 행합니다. 왜 이 행함은 자기의 인기, 만족, 가치, 자존심, 영광을 위한 행함일 때 그 착한 행함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착한일, 종교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길 가운데서 했고, 헌금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했고, 구제를 해도 나팔을 불면서 했고, 금식을 해도 자기가 금식하는 것을 선포하면서 했던 겁니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반석위에 지은 집은 그 어떤 행함을 행해도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예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나 선행이나, 우리의 봉사, 선교, 구제, 헌금을 한번 돌아보자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기를 잘아하고, 자기를 나타내고, 내 자존심을 세우고, 나를 드러내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100%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은 창수가 나면 다 사라질 모래위에 지은 집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고, 불법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지복하고 회개한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보고 싶은 눈물,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는 눈물은 바로 이러한 눈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종교적 열심이나 선행이나, 우리의 봉사, 선교, 구제, 헌금을 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하면서 왜 나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한 행위가 나오지 않을까 반성하라고 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헌금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날 위해 첫 번째 헌금으로 드려졌잖아요. 그래서 나도 나를 드리는 것이 헌금인데 왜 나는 그게 안 되고 헌금을 자꾸 자기 마일리지가 쌓이는가에 관심이 있느냐 말입니다. 헌금을 하면서 이러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구하는 자리로 한 걸음 한걸음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의 의를 보게 하여 철저하게 무너뜨리게 하고,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게 하지는 않고, 사람들을 붙들어두기 위해 인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부추기는 설교를 해서 그들의 에너지와 소유와 열심을 노략질 하하는 이들을 가리켜 노략질하는 이리, 거짓선지라도 성경은 말합니다.

 

착하게 하세요, 경건하게 사세요, 정직하게 하세요, 헌금 많이 하세요, 기도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에 들어갑니까?

 

이러한 것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설명해 주지도 않고 이런 한 행위만을 강조해서 행위를 끄집어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스스로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 해서, , 나는 굉장히 괜찮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라고 여기게 만들어주는 이들이 노략질하는 이리요 거짓선지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15절에 나오는 거짓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들을 그들의 열매로 분별하라하십니다.

 

그러면 참 열매가 뭘까요? 구제의 열매, 정직의 열매, 청빈의 열매, 선한 삶의 열매, 이러한 열매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 열매라면 그러면 간디, 무디, 법정스님 같은 분들이 최고 아닙니까?

 

그럼 성경에 열매로 그들을 안다라고 할 때, 거짓선지자들이 절대 맺을 수 없는 열매가 뭘까요? 바로 믿음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자체가 자기부인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나라는 존재를 부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처럼 믿음에 의해서 자기가 부인이 되고 성령에 의해서 그들 속에 맺혀지는 것이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그 열매를 세분하여 기술하는데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이런 열매들이 맺혀지고 있나요? 성령의 열매는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입니다.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 이 열매가 맺혀지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나를 나타내고 드러내기 위해 맺어놓은 가짜 열매들이 먼저 제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맺으시는 진짜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내가 종교해위를 하는 모든 것의 결론이 나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라면 나를 카타내고, 드러내고, 내 체면을 세우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성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우리의 영생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절대 자신의 구원을 위에 착한 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절대 자신의 성공을, 자가의 소원이루기 위해 백일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을 아는 자는 절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구제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 은혜를 나누는 차원으로 구제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헌금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아들 예수의 목숨으로 우리를 위해 헌금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나 자신을 전부 주께 맡긴다는 신앙고백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이 땅에서 열심히 착한일해서 의롭게 되고, 인기도 누리고 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천국도 가기를 원하는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도 감동하지 않을까? 감동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을 믿어야 감동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길 원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신다니까요.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그 교수(목사)의 문제점은 말씀은 알았지 실천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반응 하는데 있습니다. 죽은 영이 중생하여 살아있다는 증거는 반응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에 반응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나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은혜만을 의지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를 나타내고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지 않고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요, 반석위에 지은 집이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요,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