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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말씀에 의한 삶

07.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눅 5:1~11)

by 오용주목사 2016. 2. 26.

07.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

5:1~11

 

 

 

지난 주일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반응형 성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거듭났다, 중생했다, 다시 살았다면 그 증거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이며, 말씀을 듣기만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합니다. 이 말은 율법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착하고 선한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며 복을 받고,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으려는 가치관 생각이 율법주의입니다.

) 1주일 금식 -> 금식했으니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야,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여러분은 십일조를 의지합니까? 십자가를 의지합니까? 예배를 의지합니까? 십자가를 의지합니까?

 

또 하나 율법주의는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함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처럼 무너지고 말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 에 대해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니 당연히 순종해야 하지마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 만약 순종하면 내가 복 받고, 이 땅에서 잘되고,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순종합니까? 만약 이러한 것 때문에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더 알게 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헌신 봉사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낙심한 이유도 하나님을 온전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 즉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성경공부를 통해 아는 것을 토대해서 실제 경험으로 아는 앎입니다.

중매쟁이기 신랑감을 중매하는데 사진을 보여주고, 이력과 경력을 다 들었습니다. 그럼 예비신랑감을 아는 겁니까? 관하여 하는 겁니까? 관하여 하는 것이죠. 그럼 이제는 중매쟁이의 말을 토대해서 실제 만나서 경험적으로 알 때 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알아야 하는데 그러기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순종할 때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1) 실패한 사람, 실패한 빈 배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5: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5: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제가 몇 주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세상 사람들은 만선을 이룬 능력 있는 사람을 주목하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능력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실패한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팽개쳐 버리는 것이 이 세상 원리라면, 우리 주님은 실패한 사람도 주목하고, 실패한 사람도 찾아와 주시고, 실패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실패한 사람의 배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한번은 혼자서 우리에게 소원이 하나있네이 찬양을 하는데 후렴부분이 이렇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예밸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우릴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이 찬양을 하는데 참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아니, 우리를 사용할 껀떡지가 있어야 사용을 하죠...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감동이 된 것은 이런 우리를 주님은 사랑하셔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 감사한 겁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나님 많이 원망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부족하고 작은 자이지만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만큼은 맏아들처럼 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서 맨 날 막내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맏아들로, 맏딸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 발견한 것이 하나있는데 여러분,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절망감, 허탈감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빈 배를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시몬 베드로가 고기를 만선이 되도록 많이 잡았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시몬 베드로의 배를 말씀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을 때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생물이기 때문에 빨리 크기별로 대, , 소로 구분해서 경매장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시몬 베드로의 배가 예수님께서 말씀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배였기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밤 고기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역에 도구로 사용되는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 아닌가요?

 

마찬 가지로 지난날 여러분의 눈,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그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일하심에 도구로 사용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난 날 여러분의 삶이 만선을 이룬 삶이었다면 과연 주님이 부르실 때 반응을 했겠습니까? 그때 그 고난이 그 실패가 그 힘듦과 절망이 없었다면 주님 앞에 나왔겠습니까?

 

포도나무교회 한 자매님의 남편, 삼성에 오래 근무하다 사표를 쓰고, 주유소 사업을 했드랬습니다. 처음 한 개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개 더 차렸습니다. 그런데 사기를 당해 2개다 날라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운영하는 주유소를 찾아갔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분이 목사님, 제가 이 땅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는데 행복하지 않다고... 그래서 이제는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아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 때다 싶어 복음을 전했는데 아이고 목사님, 아내가 아들이 열심히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해 주는데 나 까지 나갈 필요가 있느냐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아침 먹었습니까? 물었습니다. 먹었다고... 그래서 아니 아내도 아침 먹고, 아들도 아침 먹었으니 굳이 아침 안 먹어도 되지 않냐고.... 내가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 예수님을 믿는 것도 내가 믿어야 된다고....결국 이 사업의 실패를 통해 그 분이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실패한 우리도 사용하지만 실패한 사업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순종할 때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는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대박인 것은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이 대박이 아니라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대박인 겁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나라 성경에는 두루 뭉실 하나님으로 나와 있는데 원어를 보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광대 하셔서 그때그때 그분의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따라 호칭을 부르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엘로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이름인데 창세기 1장에서 천지 창조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고 어둠에서 빛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기위하여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서 그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으로 들어가면 호칭이 달라집니다. 여호와로 하나님의 호칭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에서의 보편적인 창조기사 중에서 인간창조부분을 클로즙 해서 다시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 2장입니다.

 

보편적 천지 창조는 엘로힘 하나님으로 호칭을 사용했는데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 여호와로 호칭이 바뀌어졌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호칭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할 때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들을 보면 성도들 중에서 2종류의 성도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이 그 인생에 엘로힘으로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 시다. 알아요. 그런데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으로 알고 신앙생활을 하는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누가, 누가 그랬다더라, 누가 기도응답을 받았다더라, 누가 치유되었다더라, 누가 회복되었다더라, 다 누가 누가만 있고 자기 껀 하나도 없어요.

 

또 한 종류는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는 여호와 하나님인 사람들입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능력의 전능의 하나님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엘로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이 친밀감으로 다가오는 나와 관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엘로힘 이었던 절대자가 여러분에게 여호와로 다가오는 사건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3) 순종할 때 선생님으로 알았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게 됨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경험한 사람이 부르는 것이 주여 라는 겁니다. , 당시 호칭의 변화는 영역의 변화라는 겁니다.

 

여러분! 처녀 총각이 처음 만나면 호칭이 ~~씨 이렇게 호칭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사이가 깊어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라고 호칭이 바뀝니다.

 

자기(自己)는 스스로 () 자기 ()의 한자어인데요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로 쓰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라는 말의 뜻은 이야기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다시 가리키는 말로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자기라는 호칭은 상대방을 자기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자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당신은 내 꺼고 나는 당신 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씨에서 자기라는 호칭의 변화는 곧 영역의 변화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로 애인이나 신혼부부에서 자기라는 호칭을 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시몬이 예수님을 선생이여 호칭에서 주여로 호칭이 바뀐 것은 영역의 변화 소속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선생님 - 주님 밖의 영역,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는 자들의 호칭 여전히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주여 - 주님 안의 영역,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는 것을 인식하는 자의 호칭 - 주여, 나의 주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선생님입니까? 주님 입니까? 신앙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자기와 별상관이 없는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세상과 훨씬 친밀함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시몬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생님 호칭에서 주님, 나의 주님의 호칭으로 바꿔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역 안에서 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보고(에이도) - 단순히 고기 잡힌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몬 베드로가 단순히 고기 잡힌 것을 눈으로 보았다면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제안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 동업합시다. 그물질은 내가 전문이니 내가 할 테니 선생님은 옆에서 여기 던져라 저기 던져라 말씀만 하십시오. 그리고 수입은 1/n6:4로 합시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했다는 것은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에이도 인식했다, 느꼈다, 감지했다, 인지했다, 발견했다, 경험했다, 체험했다 는 말입니다. 고기를 잡히게 하신 주님이 어떤 분임을 인식한 겁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서있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구약성경에도 나오는데 이사야 6:1~5절입니다.

 

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우리에게도 이사야와 같은 시몬 베드로와 같은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가능하다고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분의 신적능력 보게 될 때, “에이도할 때 내가 죄인임을 보게 되고 주님을 붙들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인 것을 믿으십니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무슨 말입니까?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바다는 물반, 고기반 인데 왜 한 마리도 못 잡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밤새 물고기를 쫓아내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그래서 절망감, 허탈감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빈 배를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순종 할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되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께 질문?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왜, 무엇을 때문에,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닙니까? 다시 한 번 성경 눅 5:10~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고기 낚는 시몬 베드로를 부르셔서 사람 낚는 사람으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 많은 일들을 행하신 것 아닌가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순종을 통해 자신을 알게 하시고,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뜻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뜻 이루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처음 질문을 다시 던져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까? 그래야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순종해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밴드에 박양미 자매님이 우리 가정의 기도제목을 공유할 수 있느냐고 올려 놓았더라구요. 사람들은 성경의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을 좋아하고 그 인물들처럼 사용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아브라함처럼, 요셉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사용되고 또 그렇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저도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이 지고 가신 피 묻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살고 싶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이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 인류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설교를 마무리 하면서 여러분께 도전합니다.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반응형 성도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사람들의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가겠습니다. 그렇게 다짐하며 함께 오늘 말씀을 녹여놓은 찬양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찬양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엔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