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28) 07.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
눅 5:1~11
지난 주일은 “하나님 말씀에 반응하는 반응형 성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 말씀에 반응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내가 거듭난 증거, 중생한 증거가 뭐냐? 바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은 자기의 선한 행위, 착한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 1주일 금식 -> 금식했으니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야, 행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식을 했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은 자기의 행함이 자기의 인기, 만족, 가치, 자존심, 자기의 영광을 위한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행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에 순종해야 할까요? 그래야 복을 받고, 이 땅에서 잘 되고, 자녀 좋은 대학가고, 성공하기 때문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 때문에 순종한다면 이 사람은 아직 신앙이 미성숙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궁극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 말씀이 생명임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 민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여러분 이 말이 당시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이해했겠습니까? 차라리 약초를 매달고 처다 보라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이 뭐라하고 있습니까? 민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요3:16 보시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이 말씀이 생명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필 수 인데, 오늘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더 알게 됩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저를 믿으세요? 만약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믿는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고, 헌신 봉사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고 버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금 낙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많은 이유를 하나로 집약하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 가운데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라고 하신 분계신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 즉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성경공부를 통해 아는 것을 토대해서 경험으로 아는 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안다”는 구약에서는 “야다” 신약에서는 “기노스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두 경험적으로 아는 앎을 이야기할 때 사용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한번 순종해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다. 이 사실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에 의지하여 실제 기도를 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1) 실패한 사람, 실패한 빈 배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눅 5: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난 월, 화, 수 아내가 사모 세미나에 참석하고 왔는데 그게 참석한 사모님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나는 못해, 나는 할 수 없어, 하나님은 더 이상 나를 사용하지 않을 거야, 열등감, 패배의식에 꽉 사로잡혀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분들이 왜 이렇게 열등감,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있을까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을 모르니 자신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케팝스타 심사위원 유희열 -> 자기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가를 모른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그 사모님들이 왜 이렇게 열등감,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있을까요? 하나님을 모르니, 실패한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모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기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 발견한 것이 하나있는데 여러분,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절망감, 허탈감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빈 배를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하셨고,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는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시몬 베드로가 고기를 만선이 되도록 많이 잡았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시몬 베드로의 배를 말씀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을 때 그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저는 불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생물이기 때문에 빨리 크기별로 대, 중, 소로 구분해서 경매장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시몬 베드로의 배가 예수님께서 말씀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배였기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밤 고기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역에 도구로 사용되는 변장하고 찾아온 축복이 아닌가요?
마찬 가지로 지난날 여러분의 눈,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그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일하심에 도구로 사용되는 축복의 통로가 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순종을 통해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5: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중요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뭐냐?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 성경에는 두루 뭉실 “하나님”으로 나와 있는데 원어를 보면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광대 하셔서 그때그때 그분의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따라 호칭을 부르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엘로힘’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엘로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이름인데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만들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고, 어둠에서 빛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하기위하여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서 그 이름을 썼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보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 그대로 되니라”가 7번이나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으로 들어가면 호칭이 달라집니다. “여호와로 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에서의 보편적인 창조기사 중에서 인간창조부분을 클로즙 해서 다시 강조하는 것이 창세기 2장입니다.
편적 천지 창조는 ‘엘로힘’ 하나님으로 호칭을 사용했는데, 왜? 인간을 다루는 부분에서 ‘여호와’로 호칭이 바뀌어졌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호칭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강조할 때 여호와 하나님으로 호칭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들을 보면 성도들은 딱 2종류로 구분됩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을 그 인생에 “엘로힘”으로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나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누가, 누가 그랬다더라, 누가 기도응답을 받았다더라, 누가 치유되었다더라, 누가 회복되었다더라, 다 누가 누가만 있고 자기 껀 하나도 없어요.
또 한 종류는 하나님이 나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여호와 하나님’인 사람들입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능력의 전능의 하나님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엘로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그 하나님이 친밀감으로 다가오는 나와 관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엘로힘 이었던 절대자가 여러분에게 여호와로 다가오는 사건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 가정에, 일터, 교회에 여호와로 경험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순종할 때 선생님으로 알았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게 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함을 경험한 사람이 부르는 것이 주여 라는 겁니다. 즉, 당시 호칭의 변화는 영역의 변화라는 겁니다.
여러분! 처녀 총각이 처음 만나면 호칭이 ~~씨 이렇게 호칭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사이가 깊어지고 친밀감을 느끼게 되면 ‘자기’라고 호칭이 바뀝니다.
자기(自己)는 스스로 自(자) 자기 己(기)의 한자어인데요 우리말의 2인칭 대명사로 쓰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라는 말의 뜻은 이야기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다시 가리키는 말로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자기라는 호칭은 상대방을 자기처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자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당신은 내 꺼고 나는 당신 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씨에서 자기라는 호칭의 변화는 곧 영역의 변화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로 애인이나 신혼부부에서 자기라는 호칭을 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시몬이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이여’ 호칭에서 ‘주여’로 호칭이 바뀐 것은 영역의 변화, 소속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시몬 베드로의 과거의 BC의 영역은 어디였습니까? 가버나움이었고, 갈릴리 바다였습니다. 그의 소속은 이 세상에 속해있었습니다.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자기가 자신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의 눈앞에 있지만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런데 그가 말씀에 순종을 통해 주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구나,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구나, 내가 있어야 할 영역은 주님이 일하시는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지리요, 예수 그리스도 안이 내가 소속이구나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선생님입니까? 주님 입니까? 신앙생활을 하지만 여전히 자기와 별상관이 없는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날 예배는 드리지만 나머지 한 주 동안은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주일은 교회에 소속했다가 나머지 일주일은 세상에 속한 자로 살고, 주일은 예수님께 속했다 나머지는 세상에 속한 사라로 살지는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시몬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생님 호칭에서 주님으로 주님의 영역안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말 중에서 가장 기분 나쁜 말이 있다면 “당신은 죄인이다”는 말이며, 또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는 말 또한 죄인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리에 핑계를 됩니다. 아니 하나님이 주신 그 여자, 하와 때문이라고 책임을 하나님과 하와에게 증가 시킵니다.
그런데 오늘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맨 정신으로는 쉽지 않는 고백이죠, 아마, 고기 잡힌 것을 정신 줄을 놓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는데 “보고”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에이도”라는 단어인데, 여기 보았다는 말은 단순히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눈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시몬 베드로가 단순히 고기 잡힌 것을 눈으로 보았다면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지 않고 이렇게 제안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 동업합시다. 그물질은 내가 전문이니 내가 할 테니 선생님은 옆에서 여기 던져라 저기 던져라 말씀만 하십시오.
그런데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했다는 것은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에이도” 인식했다, 느꼈다, 감지했다, 인지했다, 발견했다, 경험했다, 체험했다 는 말입니다. 고기를 잡히게 하신 주님이 어떤 분임을 인식한 겁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 서있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구약성경에도 나오는데 이사야 6:1~5절입니다.
사6: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오늘 우리의 문제가 뭡니까? 이 “보고” “에이도”가 없어서 이 모양 아닙니까?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 것을 보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사야와 같은 시몬 베드로와 같은 이러한 경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가능하다고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분의 신적능력 보게 될 때, “에이도” 할 때 내가 죄인임을 보게 되고 주님을 붙들게 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눅5: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것 하시려고 그 많은 수고를 하신 것 아세요? 시몬 베드로를 주님 만나게 해서 더 큰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하여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시몬 베드로가 실패하면 무척이나 힘들어 할 것을 아시면서도 밤새도록 물고기를 흩고 계셨던 주님, 그 주님을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더라구요.
우리가 뭐라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실패한 우리, 누구하나 관심도 없고, 누구하나 찾아와 주지도 않지만 그런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시고, 주목하시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신적능력으로 고기를 잡게 하신 이 모든 것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생각하면 자꾸 가슴이 먹먹해 지더라구요.
여러분! 우리는 내 뜻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 뜻 이루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이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로 올라간 구레네 사람 시몬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사람들의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할 수 없는 것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할 수 있는 은혜를 부어주세요.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녹여놓은 찬양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을 찬양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엔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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