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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절기설교

01.나타나심의 은혜 (요 21:1-11) (2016년 부활절)

by 오용주목사 2016. 12. 6.

01.나타나심의 은혜

21:1-11

 

 

혹시 아웃 브레이크라는 영화를 보신분이 계신가요? 1967년 아프리카 자이르(Zaire)의 모타바 계곡 용병 캠프에서 의문의 출혈열이 발생, 군인들이 죽어가자 미군에 긴급 의료 지원 요청을 한다. 하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미군은 혈액만 채취한 뒤 일방적으로 용병 캠프에 폭탄을 투하 모두 몰살시켜 버린다. 그 후로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 자이르에서 다시 출혈열이 발생감염자는 모두 사망하자 미국에 다시 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주인공 닥터 샘 다니엘즈 육군 대령(Sam Daniels: 더스틴 호프만 분)은 국방부 소속으로서 전염병 예방 및 통제 센터(CDC)에 파견되어 있는데 정체불명의 치명적 전염병이 돌고 있는 자이르 우림 지대의 오지에 들어가, 이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열대 정글의 심장부까지 들어간 샘은 에볼라 바이러스보다도 더 빠른 잠복기로 치사율 100%의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균이 휩쓸고 간 마을을 발견한다. 마을 주민들은 절대 다수가 이미 죽어버린 상태로 장작더미처럼 겹겹이 쌓여있고 극소수의 생존자들마저 죽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샘의 아내까지 이 바이러스에 감염 되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원숭이 숙주 해독제를 발견하게 되고 먼저 아내에게 약을 투여합니다. 아내가 회복된 것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투여하면 회복되는 것을 압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부활절 예배는 굉장한 의미가 있는 예배입니다. 죄라는 치명적 바이버스로 인하여 죽어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해독제로 인하여 다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해 주는 것이 부활이고(추장 아들의 예),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우리의 부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 부활절 설교를 무엇으로 해야 하나 생각하다 본문 요21장을 정했습니다. 정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데 몇 가지가 감동으로 밀려왔습니다.

 

1. 그 첫 번째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1: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이 나타나심의 왜 중요한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시는 사랑입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나타 난 바 되었으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즉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나타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이요,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단 한 구절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려고 시간과 지면을 할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에 실재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누가 전도지 들고 가서 전도해서 믿게 되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그 나타나신 주님을 영안을 열고 보았기 때문에 예수 믿은 것 아닙니까?

 

엠마오로 낙향하는 두 제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과 낙심을 않고 엠마오로 낙향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여기 지금 예루살렘이 지금 어떤 형편입니까?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현장입니다.

 

그러고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것은 교리가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그것은 자기들이 경험한 실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 ‘십자가 복음하는데 여러분! 그 십자가 복음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리가 아니라, 신학이 아니라 실제적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고전13장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을 보십시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이 책상 앞에 앉아서 소설을 쓰듯 자기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대로, 성경대로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죽으시고,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5절을 보세요, 15: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15: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에서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에게도 나타났고, 누구에게도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까지 나타났다. 그러니까 그가 전하는 복음은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왜? 힘이 없습니까?

내게 나타나심이 없기 때문 아닌가요? 맨날 하는 말이, 누가 봤다 하더라, 누구에게 나타났다 하더라,

 

그러고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늘 우리 같이 신약 성경도 없었고, 신학도, 신학교도 예배당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복음이 실제 그들의 삶속에 경험되어지는 사건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초대교회의 힘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위시해서 너무나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러분 누가 자기가 경험하지도 않은 이론에다가 대고 목숨 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11제자를 위시해서 너무나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큰 증거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누가 목숨 걸고 사기 칩니까? 사기 치다 목숨이 위태로우면 도망가는 것 아닙니까? 그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이게 어떻게 가능 하느냐?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 나타나신 주님을 그들이 경험했기 때문에 기꺼이 거기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의 은혜를 축복합니다. 찬양 / 주님의 영광 나타셨네

 

2. 누구에게 나타나셨는가? 실패한 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3절에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를 보세요.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갈릴리바다에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물위로 걸어오라 말씀하실 때 물위에 뛰어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듣고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차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 호언장담했던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여러분,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예수님의 제가라면 이정되는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모습을 보세요.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영락없는 실패자의 모습 아닙니까? 다시 옛 날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왜 일까요? 자기가 자기의 용서하지 못해서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옛 날로 돌아갔지만 또 실패 했다는 겁니다. 3절 하반 절에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제가 감동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실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을 찾지 않습니다. 뭐 덕 볼 것이 있다고 찾겠습니까?

탕자가 돈 떨어지니 친구 떨어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주님 만나기 전에도 실패한 인생, 주님 만난 이후에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한 인생,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갔는데 돌아가서도 여전히 실패한 인생, 그 보잘 것 없고, 초라하기 그지없고 비참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여러분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주님은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만 임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초라하고, 낙심하고, 가정은 깨지고, 일은 안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초라한, 연약한 어떤 그 사람에게도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3. 왜 실패하는가?

 

저는 누가복음 5장이나 요한복음 21장에 시몬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을 보면 이해가가지 않은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지금 이들이 누구입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고기잡이에 달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그들이 만선을 이룬 것도 기적이지만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은 더 큰 기적 아닙니까?

 

저는 상상해 봅니다. 밤새 고기를 쫓고 계시는 예수님, 베드로가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를 쉿! 왼편으로 다 도망가게 하고, 왼편에 그물을 던지면 고기를 다 오른편으로 도망하게 하시고, 깊은데 그물질 하면 얕은 곳으로, 얕은데 그물질 하면 깊은 곳으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도록 고기를 쫓고 계시는 예수님, 그림이 그려지세요.

 

우리 중에 한번 적용해 보자구요. 아니 일이 안 풀려도 그렇게 까지 안 풀릴 수가 있느냐구요. 이걸 해도 안 되고 저걸 해도 안 되고, 이것도 실패하고 저것도 실패하고 하는 것 마나 대박을 터뜨리는 것보다 이것이 더 기적 아닙니까?

 

마찬 가지로 고기잡이의 전문가인 베드로가 밤새 그물질 했는데 어떻게 한 마리로 잡을 수 없었는가? 안 되도 이렇게 안 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여기서 감동을 받는 겁니다.

 

왜 일까요? 주님 없이 고기의 만선을 이루면 주님 없이 살 것을 아시기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밤새 고기를 쫓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그래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낙심하고 초라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을 때 주님의 기대하심이 뭘까요?

 

그래 조금 더 고생해라, 조금만 더 절망해야, 조금만 낙심해라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이제 잠시 시간이 지나면 나와 함께 만선의 기쁨을 너희들이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 아닙니까?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구조대원이 다가와서 구해주지는 않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더 힘 빠지도록, 더 물 마시도록, 여러분! 지금 이 구조대원이 무엇을 기대하고 기다립니까? 더 힘 빠지도록 그래서 자기 힘으로 그 무엇하나도 붙잡을 수 없는 상태기 돼야 그래야 안전하게 구조할 수 있으니까 기다리고 있는 구조대원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혹 우리 중에 그런 분이 계신가요?

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는 인생, 하는 것 마다 안 되는 인생, 그러나 의도적으로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도록 쫓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 알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 시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셔서 주님과 동행하는 우리 인생가운데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그 날을 마음으로 준비하여 예비하며 어떤 상황 앞에서도 좌절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 없이 했던 수많은 몸부림을 내려놓고 부활하신 주님, 내게 나타나 주신 주님, 나타나시되 이렇게 좌절하고 아파하는 나에게 나타나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실 때 순종함으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4. 그러면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1) 자기의 처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고기를 잡았는지 못 잡았는지 몰라서 물었겠습니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창3: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것과 흡사합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찾지 못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 속에는 아담아 네가 왜 거기 있느냐 라는 말입니다. 왜 그러고 있느냐 는 말입니다. 이 모든 에덴동산을 다스릴 권세를 네게 주었는데 왜 거기에 숨어 웅크리고 있느냐 말입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 말씀 속에서는 무슨 말씀이 담겨 있습니까? 너희들이 밤새도록 너희들의 실력으로, 너희들의 경험으로 그물질을 하였지만 너희들에게 수고의 열매가 있느냐?

 

주님이 듣고 싶은 대답은 무엇입니까? 딱 한마디입니다. 가로되 없나이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주님 없이 그물질을 해댔지만 그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 와서 해드릴 수 있는 가장 놀라운 고백은 딱 하나입니다. 주님! 내 의지로, 내 힘으로, 내 경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에게 고백될 가장 소중한 고백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이 물으시는 말씀이 뭡니까?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 이거 뻔 한 이야기 아닙니까? 당연히 낫고 싶죠, 그래서 지금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주님이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주님은 친히 그 입술을 통하여 예,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 내가 아직 38년 동안 이 문제가 해결 되지 않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 대답을 듣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실패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듣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 주님 없나이다. 네 주님 네가 낫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대단한 것 보여 드리려고 하지 마세요, 거창한 것 보여 드리려 하지 마세요. 빈 배, 빈 그물을 보여 드리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의사 앞에 선 환자가 보여 줄 것은 대단한 건강 보여주는 것 아니잖아요? 그냥 내가 치료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 하나면 충분 한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 앞에 빈 그물, 빈 배, 내 모습 그대로 보여드리면서 주님, 내가 없나이다. 내가 낫고자 합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말씀은 영적으로 너무 무디어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의 말씀인데,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상태입니까?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처럼 주님이 문 밖에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눈먼 상태였습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모든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가운데 임하십니다. 그러면 문제가 뭘까요? 우리의 영안이 닫혀서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눈이 머니 자기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구약의 엘리 제사장, 사울 왕도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셔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나요? 아니에요. 문제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영안이 어두우니 자기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가를 몰랐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어떤 성도에게는 임하시고, 또 어떤 성도에게는 안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예외 없이 다 임하시는데 그런데 영안이 닫혀져서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뭐라고 권면합니까? “안약을 사서(상징적) 눈에 발라 보게 하라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성령님께서 저와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축복이 있는 부활절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이렇게 순종했더니 그 결과가 뭔가?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5. 여러분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데 왜 그것이 중요하냐?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2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21: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21: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일백쉰센 마리는 숫자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만선의 기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이 만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사탄은 정 반대입니다.

제가 악어를 조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악어 입에 머리를 넣는 것 보셨죠?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하면 풍선을 가지고 조련시키는 겁니다. 풍선을 입 안에 넣으면 악어가 입을 다물면 뻥하고 터지는 것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사람 머리를 넣어도 입을 다물지 않는 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탄은 우리가 한두 번 실패하고 절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통해서 절망이 우리가 길들여진 악어가 되기를 사탄이 원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밤새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잡을 수 없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애들아! 너희들에게 고기가 있느냐?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이 토해내 짐으로 여전히 내가 낫기를 원합니다. 여전히 만선의 기쁨을 누리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시켜주시기 원하시는 메시지가 여기 잇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무슨 일로 마음이 상하셨고 무슨 일을 시도하다가 반복되는 실패를 통해서 주저 앉으셨는지 모르지만 오늘 실패한 자들에게 임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 음성이 들려지길 원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고 보면 오늘 성도들은 2 종류입니다.

부활하여 우리에게 나타난 주님을 경험했느냐 못했느냐,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목도 했느냐, 못했느냐, 우리의 눈이 성령의 안약으로 인해 보게 되었느냐, 보지 못했느냐 이 두 종류 아닙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연상케 하는 너무 좋은 찬양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이 전혀 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오늘 이 찬양 같이 부르실 때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상한 마음을 가지고 부활하신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우리 합심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어제의 그 빈 배가, 어제의 그 빈 그물이 어쩌다 빈 그물 빈 배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밤새 고기를 좇아내시면서 애야, 조그만 더 가려라, 조금만 더 참아라 나와 함께 놀라운 만선의 기쁨을 이루어 나가자 이 소망을 붙잡고 기도하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와 같이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애들아 고기가 있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질 때에 네, 38년을 애써도 고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낫기를 원합니다. 이 부활의 기쁨이 이론으로 끝나는 부활절이 아니라 우리 생애에 사건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런 저와 여러분 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