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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절기설교

05.신앙의 조율 (딤후 4:6-13) (2016년 송구영신예배))

by 오용주목사 2017. 1. 1.

2016.12.31.(송구영신예배))                         05.신앙의 조율

                                                                  딤후 4:6-13

 

여러분 연주회에 가 보신일이 있습니까? 모든 연주자는 연주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조율되지 않은 악기는 어떤 연주자의 능력도 무효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율은 악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도, 우리 신앙도, 우리 인격에도 조율이 필요합니다.

조율되지 않은 악기가 연주자의 능력을 무효화 시키듯이, 조율되지 않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사들을 다 무력화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주위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조율되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2016년 한 해를 뒤돌아보면 유난히도 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욕을 먹고 수치를 당한 한해인 것 같습니다. 목사이자 서울의 유수한 신학대학교 교수가 여중생인 딸을 폭행하고 딸이 숨지자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딸의 시신을 백골이 되도록 방치해버렸던 사건,

또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찬양집회, 신앙훈련을 해온 개신교 청소년선교단체의 대표목사가 수년 동안 미성년 청소년들을 유인해 성관계를 맺은 사건,

탈북자들을 신앙으로 섬기는 탈북자의 대부라고 하는 목사의 성추행 사건, 이루 입에 담을 수도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추잡한 사건들이, 그것도 목사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추잡한 짓을 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그들의 신앙, 인격, 은사가 조율되지 않아서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조율이 필요함을 아시고 우리에게 시간의 단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시간을 누가 나누셨습니까? 하나님이 나누셨습니다. 1, 한 달, 하루...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시면서 왜, 그 시간의 단위를 나누어 주셨을까요? 많은 의미가 있지만 저는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조율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 중 나는 인생의 조율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조율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해의 마지막은 축복이입니다. 외로움과 낙담의 12월이 아니라, 축복의 12월입니다.

그렇다면 2016년을 보내고 2017을 새로 맞이하는 이 시간 여러분은 이 새로운 한해를 어떻게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조율되지 않은 악기처럼, 여전히 조율되지 않은 상태로, 이 한해를 시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잘 조율된 악기처럼 내 인생을 잘 조율하여 아름다움을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마약 후자라면,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내 인생을 조율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크게 네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관점(시각)을 조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인생을 살았던 한 신앙인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이 땅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긴 서신서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마지막 4장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 왔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한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날은 점점 추워 겨울이 다가오는 그때에 이제 그는 이 땅을 떠날 마지막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딤후4:6 “전제(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관제는 제사를 다 드리고 난 후 마지막에 그 제단에 포도주를 붓는 행위를 말합니다. 짐승의 종류에 따라 붓는 양이 달랐습니다. 짐승을 태우느라 뜨겁게 달궈진 그 제단에 포도주를 뿌리면 얼마나 빨리 그 포도주가 증발되겠습니까?

바울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 왔음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또한 죽을 방법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이기 십자가 처형은 어떤 경우에도 당하지 않고, 로마 시민권 자에게 종종 내려지는 순간적인 고통을 가하는 참수형이었습니다.

 

저는 바울을 생각하면 옛날 우리 어르신들이 많이 불렀던 한 복음송가가 늘 생각납니다.

주님 뜻대로 살리고 했네 x 4 / 뒤돌아서지 않겠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숱한 어려움과 고난과 비난과 핍박과 위험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뒤돌아서지 않았던 바울, 이런 바울이라면 그의 생의 마지막은 어때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축복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바울의 생의 마지막은 어떤가요? 바울을 기다리는 것은 호화로운 궁전이 아닌 차디찬 감옥 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환영과 존경이 아닌 외로움과 고독함과 쓸쓸함이었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승리의 면류관이 아닌 참수형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한가요. 얼마나 비참한가요. 아무도 없는 쓸쓸한 감옥, 그가 무슨 죄를 지었던가요? 아뇨, 그가 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나리를 위해 헌신한 것 박에 없었어요. 복음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 던진 것 밖에 없었어요. 감옥에 온 것도 억울한데 참수형을 받다니, 세상의 관점,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죽음을 측은하게 여길지 몰라도, 그러나 바울은 이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이 죽음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또 다른 시작임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목이 잘려 솟구치는 피를 그의 마지막 하나님께 드리는 관제 예배로 본 것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사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이 자기의 삶의 질을 좌우한다고 잘못 생각하며 삽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날씨를 탓하고, 재수가 없다고 애기하고, 팔자를 들먹거립니다. 심지어 부모와 배우자를 원망합니다. 내가 좀더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 펼쳐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내가 좀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 했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거라고 애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 인생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각에 따라 좌우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태어 날 때부터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자로 태어났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그보다 더 저주스런 환경이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알듯이 헬렌 켈러는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태어 날 때부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중증장애인으로 태어 났다면 그런 몸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레너 마리아는 그 몸을 가지고 장애인 올림픽 수영대회에 나와 금메달을 땄습니다. 지금은 천상의 목소리로 전 세계를 다니며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생애 꽃을 피워낸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들은 한결 같은 공통점이 뭔가요? 관점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년 동안 어떤 관점으로 살아오셨나요?

세상에는 두 가지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관점과 일시적인 관점, 빛의 관점과 어두움의 관점, 하늘의 시각과 땅의 시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과 어두움과 일시적인 시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넘어집니다. 사소한 시험에도 넘어집니다. 이런 자들은 앞을 보지 못한 자가 더듬거리며 살 듯 늘 더듬거리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당하고 있는 환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시각? 아니면 자기시각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홍해 앞에서, 자기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모세의 반응은 어떤 반응입니까?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관점에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환경 앞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시각을 조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혼나도 반드시 붙잡아야 할 것은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전에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왜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셨는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의 시각을 조율해야 합니다. 똑 같은 환경에서 망가지는 사람이 있고, 빚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관점의 차이입니다. 인생은 관점이에요. 인생은 해석입니다.

 

이 찬송(549)벤자민 슈몰크목사님의 집이 화재로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두 아들마저 잿더미 속에서 불에 타 죽었을 때, 두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 무릎 꿇고 울부짖은 내용이다. 후에 그 울부짖은 내용을 시로 옮긴 것이 이 찬송시가 된 것이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2)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율하려면 우리의 환경을 다루심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 가신다. 특별히 환경과 관계를 통하여 빚어 가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12:2(아브라함을 부르심, 큰 민족을 약속) ->15:5(뭇별의 약속) ->22:17(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 ->궁극적 성취(3:1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짐)

 

다윗: 삼상16:13(기름부음을 받음) ->삼하2:3(헤브론에서 유다 왕, 76개월) ->삼하5:3(이스라엘의 왕 30년 치리) ->10-13년의 세월

 

바울: 9(예수님 만남) ->9:15(소명, 아나니아를 통하여) ->26:16-18(그때 받은 비전을 말하면서 사42:7 예수님의 오심이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의 연속선상에서 바울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알아요) -> 9:17(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 ->11:19-26(바나바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부름) ->13:1-2(안디옥교회에서 파송) ->10년 이상

 

요셉: 37:7-9(비전) ->형들에게 팔리움(17) ->노예시장 ->보디발의 총무 ->감옥 ->(41:41(총리,30) ->13년 정도

 

다루심을 통해 우리의 무엇이 다루어지기를 원하는가를 알아야합니다. (신앙, 인격, 재정, 의지하는 것, 물질..)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시각을 교정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2. 믿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바울은 인간의 관점, 세상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실패한 인생 같이 보였지만 그는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믿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한해를 믿음으로 걸어오셨나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셨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 믿음이 느슨해졌다면 다시 조율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1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탐꾼 뽑아서 보내서 같다 올 때 까지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포도송이 매고 옴. 와 우리가 들어가 살 곳이 저런 곳이구나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그러데 문제는 '그러나'에서부터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쓸 만한 지역은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꽉 잡고 있더라, 그러면서 우리는 이제 죽었다이것이 정탐꾼들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뭐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곳까지 이끌어 오신 것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또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11:6에 에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신실하신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믿음을 조율한 다윗(삼상17:45-47)

이것은 삼상17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이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블레셋의 선봉장은 골리앗(선봉장의 중요성)이라는 장수였습니다.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 정도로 추정됩니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어린갑'은 천위에 비늘 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으로 고대의 전투 때에 왕이나 군장에 의해 주로 착용되곤 하였다.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 57.5kg이다.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린갑에 의해서는 허리나 허벅다리 부분까지도 보호 되었다. 그러므로 이 놋경갑은 다리 부분을 보호하는 장비임이 분명하다.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놋 단창'은 어깨의 뒷부분에 차는 창임. 창자 루는 베틀채 같고, 이것은 멀리 던지기 위해 창자 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 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에 대한 표현이다. 즉 창자 루에 긴 끈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베틀채' 같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창날은 철 육백 세겔 약 7kg이다. 한 마디로 거인입니다.

이러한 골리앗 앞에서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삼상17:11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삼상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똑 같은 환경 속에서 다윗의 반응?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 얼마나 담대함입니까? 여러분 이 둘 의 차이가 뭘까요? 바라봄의 차이입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 입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바라보고 군대를 바라보고 골리앗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이렇게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함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오늘 다윗의 믿음은 어떤 믿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의 행동입니다.

 

그러면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안 믿었나요? 질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모두가 아멘이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안 믿었습니다. 정말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을 믿었다면 그들도 다윗과 같이 행동 했을 것입니다. 입술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외치지만 그들의 행동은 입술과 너무 멀다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 환경 가운데 누구를 바라보십니까? 여러분은 환경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여러분은 자신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이 다윗의 믿음, 이 믿음은 단순히 성경공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습니다. 가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1) 성령의 조명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특별히 언재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시는가? 찬양과 경배, 중보기도때입니다.

 

2)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삶의 현장에서 알아야 합니다.

성경공부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알려면 결국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 봐야 주님을 알게 됨(주님을 줄기차게 따라가 봐야 관계가 형성)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끝까지 가봐야 승리가 있어요. 죽기밖에 더 하겠나 자세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가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더니 그러면서 뭘 경험해요? 아 하나님은 진짜 말씀하신대로 이루신분, 능력의 하나님, 구체적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구나, 그분 안에 모든 전략이 있구나, 이것을 경험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더 깊이 아는 이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따라가 봐야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좋은 일꾼이 되고,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종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세요, 머리로 아는 것 말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세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떤 하나님이세요? 어떤 능력의 하나님이시야구요? 성경공부를 통해서 안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몇 가지나 적을 수 있습니까? 적어보세요. 몇 가지나 적을 수 있는지...

 

삶의 현장에서 내가 믿는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다 보면 도저히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아서 갈등도 고민도 있지만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거기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진리를 경험하는 것, 이것이 놀라운 승리이며, 능력입니다. 이 믿음이 조율되어야 합니다.

 

3. 관계를 조율해야 합니다.

한 신학자는 성경을 한 단어로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관계, relationship

십계명: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의 관계, 가장 큰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1)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율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생명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깨뜨리는 것, , 불신, 불순종(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음)

2)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조율

특히 오늘 본문의 바울은 사람과의 관계를 조율합니다.

딤후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차 선교 여행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마가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마가는 선교여행 중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2차 선교여행 사울은 바나바와 한 팀이 되었어요. 그런데 가는 날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못 데려간다. 바나바는 데려가자, 못 데려간다, 1차 때 보지 않았느냐, 또 데려갔는데 선교에 방해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사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투어 그럼 우리 따로 따로 선교여행가자 한겁니다. 여러분 마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사울에게 찍힌 거예요. 그런 바울이 이 땅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불편한 관계가 있으신가요? 그럼 더 이상 미루지 마시고 그 관계를 조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관계 회복에 있어서 중요한 것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를 하나님이 주셨다)

이것이 흔들리면 뿌리째 흔들립니다. 성도사이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다. 하나님이 주셨음 하나님이 주셨으면 맞추어 살아야 한다. 아니 맞추어 살려고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남편을 머리로 세우셨다. (남편 설교에 은혜를 받자.)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본인이 먼저 권위아래 들어가야 한다. (밥 먹을 때도 남편을 먼저 챙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 아내를 인정하는 것, 처가 챙기기, 가장 근원인 부부가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간의 문제도 회복됩니다.

 

3) 서로 편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원수가 불화살 쏘면 상대방이 뒤집어지는데 이때 기준을 제시하면 큰일 납니다. 불난데 부채질 하는 겪이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편이 되어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후 정신 차리고 난 후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은 또 다른 나다. 그래서 말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왜곡된 관계가 있음

1) 남자가 부모를 안 떠나는 것

부부간보다 어머니와 더 친밀함이 - 문제가 생김.

아들은 아내 편에 서야 한다. - 이것이 법칙이다.

2) 성적인 관계 (고전6:15-20)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 - 영적인 솔 타이

몸에 죄를 범하는 것 - 성적인 범죄, 혼외정사, 음란의 영이 오게 된다.

그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영적인 솔 타이를 끊어야 한다.

음란한 생각이 들어올 때 - 집중적으로 선포하라.

비정상적인 혼적인 묶임은 끊김을 당하고 파해져라

창조적인 묶임의 관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집중적으로 선포함이 필요함

나는 내 아내(남편)를 사랑함을 선포한다.

나는 내 아내 외에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음을 선포한다.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면 혼적인 묶임으로 그것에 영향을 받게 됨

결혼 전의 사귀었던 사람 끊는 것이 필요함

 

4. 필요를 조율해야 합니다.

딤후4: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가지고 오리고 부탁합니다. 겉옷과 책, 책은 어떤 책입니까? 가죽 종이에 쓴 책, 성경책이죠. 하나님의 말씀과 겉옷을 가지고 오라고 애기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제 곧 인생의 마지막을 마지 할 몸인데 겉옷과 성경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인간이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우리는 인간입니다. 영지주의의 문제가 무엇이었나요? 영은 거룩하지만 몸은 악하다. 초대교회 때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영지주의의 영향이 오늘도 여전히 한국교회에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성도들은 영은 거룩하고 소중하지만 몸은 뭔가 좋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나치게 영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영적인 필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필요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겉옷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간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에게 필요가 있음을 전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제자 디모데에게 부탁하여 그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것이 필요하지만 육체적인 것도 동에 채워져야 합니다. 영이 우리의 육신을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때론 내 몸이 내 영을 움직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휴식은 기도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휴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의 존재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영적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육적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진정 나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묻고 기도해야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 프리츠 크라이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악기 상에서 자기가 정말 원하는 악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악기 상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악기를 팔지 말라고 내가 돈을 모아 오겠다고, 그런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수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돈을 다 모아서 악기 상에 왔더니 그 악기가 바이올린 수집가에 팔리고 없는 겁니다. 수소문 하여 그 사람 집에 찾아가 악기를 자기에게 팔라고 하니 거절합니다. 아니 내가 뭐 돈이 아쉽다고 이 악기를 팔겠느냐고...그래서 한 번만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 청을 하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부자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더니 마침내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바로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제가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이 악기를 돌려드립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연주자 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시면서 잃어버려진 우리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악기를 통해 하늘의 음악을 내 삶을 통해 연주하시기 위해, 우리가 조금만 우리의 신앙을 조율한다면, 그 분의 뜻에 맞게 내 시각을 바꾸고, 관계를 바꾼다면, 그 분 앞에 내 삶을 내어 드리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 같이 부족인 이 인생을 통해 놀라운 음악을 연주하실 것입니다.

절망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으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음악, 여러분의 이웃을 좌절 가운데서 건져낼 수 있는 위대한 음악,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거룩케 하는 음악, 하나님은 그 음악을 당신의 삶을 통해 연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삶을 조용히 조율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조율하고 떠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내 인생에 뒤 털어진 부분이 무엇인가요? 가르침 받기를 원합니다. 제 삶을 튜닝하고 싶습니다. 내 마음도, 생각도 아니 내 몸의 부서진 곳도 조율해주세요.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를 조율하시면 당신이 내 몸에 손을 대시면 이렇게 원망과 불평이 많은 세상 가운데 내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잊지 못할 음악을 연주하고 이 땅을 떠나게 될 줄 믿사오니 주여 이 시간 나를 만져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