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목적(1)
창1:26~31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의 고질적인 질병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로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이란? 국어사전에서는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하게 낮추어 평가하는 마음”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안 돼, 나는 못해, 이러한 생각에 꽉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은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을까요? 왜?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우리들마저도 열등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까요? 여러 다양한 원인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내가 누구인가를 잘 모르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K-POp 4에서 어떤 기자가 유희열씨에게 케이팝에 참가한 이진아에 대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진아를 가까이에서 본 그의 음악은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유희열씨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잘해요, 그런데 본인은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사람인가를 모르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이 이진아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은 아닌가요? 내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요?
성경은 우리를 어떤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창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으로 표현하는데 형상: 쩨렘, 모양: 데무트 로
이 둘은 서로 비슷한 동의어로 서로 다른 단어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안하고 강조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의어를 사용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우리 자녀들이 부모님의 성품과 똑 같지는 않지만 부모님의 성품을 닮았듯이, 사람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존재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고후4;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여러분 보세요, 이“형상”이란 말은 사람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적용되어서도 안 되는 단어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굳이 그 단어를 쓰시고 있다는 겁니다.
집에 애완견들이 태어나면 귀엽죠? 예쁘죠? 그러나 아무리 귀여워도 아니고 “이놈이 날 닮았네!” “내 성품을 그대로 타고 났네!”하지는 않습니다. 왜? 개는 아무리 귀여워도 개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굳이 형상이란 단어를 쓰시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한 가족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애기 낳는 도구나, 창조하는 청도 도구나,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기 위한 것이듯,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관계로 나갈 때 기쁨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가정도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의 차이는 관계중심의 가정이냐, 일(기능)중심의 가정이냐의 차이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관계중심일 때는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로 채워 주면서 행복한 관계가 되는데, 일 중심이 되면 당신 때문에...불협화음이 나오게 됩니다.
자녀와의 관계도 관계중심일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공부를 좀 못해도, 부모 마음을 좀 썩여도, 사고를 좀 치고 들어와도 별 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관계중심이 기능중심으로 변질되면 그 때는 달라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관계중심일 때는 기쁨이지만, 일 중심이면 불평, 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왜? 예배의 자리로 나오라 하는지? 기도의 자리, 헌신과 섬김의 자리로 나오라 하는지 아시겠어요? 나와 관계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한 마디로 전의하면 “관계”입니다. 그동안 세상과 관계하고, 돈하고만 관계 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친밀함이 다라고도 표현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하고 있다면 그 증거가 뭐냐?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친밀함 친밀함 하지만 친밀함이 잘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 원인은 우리가 친밀함만을 추구해서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
이 본문은 친밀함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납하심으로 친밀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망각한 채 내가 마음을 먹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합니다. 친밀함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는 친밀함이 아니라 경외함입니다. 우리가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손을 내미시며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친구나 친밀함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그 안에 십자가라는 엄청난 내가 지불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굳이 우리와 친밀해지시려고 그 대가를 치르셨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을 빗대어 “국어시간에 수학공부하고 수학시간에 영어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외함과 친밀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반대로 행동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외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 공경하면서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 크고 존경스러워 감당 할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 경외입니다. 이 경외함은 협박에 의해 억지로, 마지못해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자발적 감정,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감정을 원하십니다.
1단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평로교회 한 자매이야기
누군가 자기를 인정해 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예) 조준호 형제 - 남편을 남편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때 교회 등록 (조준호)
왜 인정받는 것을 좋아하는가?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정회복도 간단합니다. 정하는 겁니다. 좋은 점을 찾아가지고 칭찬하는 겁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도 인정받으시길 좋아하시고 중요하게 생각하실까요?
왜 그렇다고요?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성경에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것 중 하나 >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 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회개의 출발 – 내가 죄인임을 인정함에서 시작
회복의 출발 – 인정
[왕상8:33]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왕상8:35]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대하6:24]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대하6:26]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부흥 – 한 마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합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성령의 의한 삶 -> 출발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출발 –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즉 무시하는 것
사역
행16: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우리가 부모님을 경외하는 첫 번째 단계 :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인정하는 것임. 마찬 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출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 한마디로 나를 인정해 다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싶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정하는 것 같습니다.
인정하는 것 - 구체적으로 (감사, 묻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1단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2단계: 하나님 영향력 안에 있는 것
말로만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인정합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영향력 안에 있는 것이 경외함 2단계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누구의 영향력 아래 놓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의 영향력 안에 있는가?
생각, 환경, 감정, 느낌, 상처, 사주팔자 - 그래서 이사도 제대로 못하고 결혼식 날짜도 자기마음대로 잡을 수 없음
탕자 ->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음 -> 이것이 탕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으면 탕자입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마음이 상한 자를 영어성경에 broken heart - 깨어진 마음
그럼 어떻게 하라고요? 충심으로 통회해야 한다는 겁니다. 회개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살인을 저질러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강도짓 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향권을 벗어난 상태 그것을 회개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향권 안으로 다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마음이 깨어져 고통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신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내 마음이 깨어져 상했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더라는 영국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한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 올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여러분의 상한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시려면 하나님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3단계: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고 누리는 것(말4:2)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너희가 나가서 - 이 말은 무엇을 전제 합니까? 그동안 갇혀있었다는 말입니다.
악한 사탄의 영향력에 갇혀있었고, 내 생각에 갇혀있었고, 좌절과 절망에 갇혀있던 우리가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나가서 송아지처럼 기뻐 뛴다는 겁니다.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하면 사도행전 3장에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평생을 장애로 구걸하는 이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것을 보고 구걸하는데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행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여러분 이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여전히 갇혀있는 삶이 우리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롤 말미 암에 묶였든 것들이 풀려지고 걷기도 하고 뛰고도 하는 모습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탕자가 왜 탕자인 줄 아세요.
위의 3가지 중 단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어요.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음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음
아버지 안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함
이게 오늘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면서 친밀함 친밀함 한다고 해서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 손 내밀어 주심으로 친밀함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친구, 친밀함 하면
진정한 친구는 상대방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로 내가 오해 받을 때에도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낙심하고 있으면 내 어깨를 툭툭 쳐주며 힘을 주는 존재입니다. 또 항상 가까이 붙어 다니고 속마음까지 나누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대단한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만 집중해서 생각하지 과연 내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만한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내 친구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대통령의 친구로서 친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가려가면서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정말 친구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가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할 때 내 뒤를 봐 줄 수 있는 든든한 지지자가 생겼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친구답게 살아야 할 의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수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함으로써 친구다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t신실한 친구 되기 원한다는 고백은 곧 하나님의 친구답게 살겠다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요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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