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창조자 하나님을 알라
창1:1-5
지난 해 어떤 목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 부부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 중에 참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개척교회가 다 그렀겠지만 교회건물이 없으니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 다반사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 건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성도들이 힘들다며 이리 저리 떠나고 나이 많으신 권사님 부부 한 가정만 남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그들이 힘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했을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아! 이분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더라면, 또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지 알았더라면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의 가정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힘들어 할까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이런 남편을, 아내를 만나게 하셨는지, 왜 자녀들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아닙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이 뭡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 아닌가요? (요10장 양과 목자의 비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는 만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다음세대, 다음세대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교회 표어도 다음세대 준비하는 교회,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교회라고 정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책임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보여주고, 알게 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 문제점? 삿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엘리의 치명적 실수?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성경말씀과 순종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언어로 계시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일하심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가 이 모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로 된 말씀이 깨달아지고, 믿어지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 위해서는 엡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말씀처럼 성령의 조명이 필 수입니다. 예) 저자직강
그다음 깨달아진 말씀에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1단계의 앎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이 말씀을 토대해서 실제 기도의 자리로 나가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바쁘고 힘든 것을 알면서도 성경통독을 하게하고, 암송을 하게하고, 요약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신구약 66권이 다 하나님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 신론을 가장 완벽하게 기록한 책 바로 창세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성경의 뿌리와도 같습니다. 창세기 안에 성경전체가 다 들어 있습니다.
특히 창세기 중에서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은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구약 성경66권, 성경전체가 바로 창1:1을 주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 신지, 무엇을 하셨는지, 또 그분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이 모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1:1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 성경전체가 열리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지구나이는 얼마이며, 지구가 만들어진 과정이 뭔지 이런 고고학적, 역사학적인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을 탐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적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다.
창1:1절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 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인생의 주인은 누구다?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인정하며 살라는 겁니다. 간단명료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우주가 저절로 생겼다고 합니다. 예) 시계 부품이 5,000개라고 가정 한다면 그 시계를 분해해서 부품들을 상자에 넣고 흔들면 저절로 조립되는 확률이 몇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령 부품이 있다 해도 불가능한데,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겼다는 겁니다.
또 인간의 기원은 우연한 원자 결합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무기물질이 우연히 유기물질이 되고 이것이 아메바를 거처 -> 양서류 ->파충류 -> 포유류 -> 원숭이 -> 인간, 그러면 무기물질은 어떻게 생겼나요? 저절로?
여러분 보세요? 식물이 자라는데 가장 중요한 제1원인은 무엇입니까? 태양이 비추어 광합성 작용을 해야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태양이 창조되기 전 셋째 날에 이미 식물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낮과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이 있어야 태양 빛을 받아 밤과 낮이 구별이 되는 것인데
태양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미 밤과 낮이 구별되어 졌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주의 질서 자연의 법칙 조차도 자기들 스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주의 질서를 움직이게 하는 제1원인이 하나님이지 태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창1:1절은 이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하님이 창조자시며 내 인생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겁니다. 항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주권자시다.
성경에 “창조”라는 단어 히브리어 「바라」는 대단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 ‘창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를 성경 또 한곳에 사용하는데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에서 창조를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바라’라는 단어는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또 ‘내가 낳았다’ ‘내가 양육 한다’ ‘내가 지킨다’ ‘보호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통치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지구보다 태양에 가까운 금성의 표면 온도 480도까지 올라갑니다. 또 지구보다 태양에서 먼 거리에 있는 화성이 목성은 -120~140이며, 목성 같은 경우에는 얼음으로 덥혀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는 어떻게 태양에서 적당한 거리에서 수천 년이 지나도 궤도 이탈도 하지 않고 자전과 공전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우주 공간에 메 달려 있을까요?
욥26:7 “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북쪽 하늘을 허공(토우) 빈곳, 무를 말하는 것으로 무에다가 하늘을 펴셨어요.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또 땅을 공간에 다시며 지구를 공간에 (타라) 메 달으셨다는 겁니다.
하늘에 별 따기보다 훨씬 힘든 것 하늘에 별 다는 것, 이것을 자연의 법칙이 생기기전에 하나님이 거기에 있으라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런데 둘 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궁창이란? 궁창은 허공인데 무엇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물을 만드시기 전에 그 생물이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공기와 공기의 비율과 그 비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만드신 겁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대기권의 공기는 산소20% 질소8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산소와 질소의 비율입니다. 질소의 비율이 많아지면 생명체가 파괴되고, 산소의 비율이 많이 지면 불덩어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비율이 정확히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산소를 계속 들어 마시는데 줄지 않죠? 그 이유는 동물이 호흡할 때 식물이 광합성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날, 땅과 바다를 가르셨는데, 바다와 땅의 비율은 7:3으로 가르셨습니다. 이 비율이 어긋나면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다의 지표면 점유율이 지금보다 더 높아지게 되면 수증기가 지나치게 많이 증발을 해서 이 땅은 온통 습지가 되어버리고 반대로 점유율이 낮아지면 가뭄이 들어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바다와 땅을 항상 7:3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하나님께서 유지시키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주인 되심을 거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주인으로 인정하는 부류와 창조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부류입니다. (믿는 자-생명, 믿지 않는 자-사망)
질문? 여러분은 하나님이 창조자, 인생의 주인 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기를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3. 타락한 본성(옛 사람)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주인 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껏 주인 행세를 하고 싶은 죄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옛 사람” “타락한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타락한 본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내가 내게 주인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내가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주도권 싸움을 합니다. 이 타락한 본성을 처리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옛 사람을 처리할 수 있을까요?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의해야 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 옛사람도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연합의 원리_
예) 구원이 언제 완성되었나요?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이 언제 작동?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작동되어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사람도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작동: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작동되어지는 것입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 간주하라는 겁니다.
문제는 죽었다고 동의하고 인정하고, 죽었다고 사망확인서에 도장까지 찍었는데 살아있는 것 같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리켜 옛사람의 영향력이라 합니다. (쇼생크 탈출) 선포
3. 우리의 생각의 결과
렘6: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그 생각이 뭡니까? 내 생각은 하나님을 떠나도 스스로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님의 길보다 자기 길이 훨씬 현명한 길이라는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드리지 않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려는 겁니다.
어떻게 내 생각을 처리 할 수 있을까요?
사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 말씀을 토대하여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이론, 논리를 하나님의 이론, 논리 앞에 내려놓는 겁니다. 우리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내 삶의 주도권을 기꺼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사용하는 스마트 폰이 고장 나면 그것을 만든 회사 AS센터로 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의 인생이 고장 나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 가야지요, 그런데 내가 주도권을 잡고 내가 고처 보려고 하니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더 고장 나고 망가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놓지 못하세요? 왜 붙잡고 안달하세요? 왜 입니까?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알지 못하니 믿을 수 없지요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말씀과 순종
말씀 창1:1 하나님은 창조자, 내 인생의 주인, 주권자 + 순종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맛보다는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맛보려면 동참해야 합니다. 어떻데?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일단 믿고,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려보는 겁니다. 한번 맡겨 보는 겁니다. 처음 맡기면 더 엉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정입니다. 그래도 다시 맡기고, 또 맡기면 그러다보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맛보고 맡기고 맛보고 맡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드리는 삶을 자리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5. 지금 내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나님께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말씀처럼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 죄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로 여길지어다 - 하나님께만 반응합니다.
이런 분들은 환경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나는 안 돼,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 그 상처 그 상처로 인한 치유되지 않은 감정과 느낌에 반응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반응하기를 선택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삼상17장에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환경에서 반응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반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루아침에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쫓기는 고난의 현장에서 훈련되어진 결과물입니다. 그 고난의 현장으로 통하여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결과 하나님께만 반응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것은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훈련을 통하여 가능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의도적, 고의적, 계획적으로 내가 원치 않는 환경 속으로 몰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훈련의 장소 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 -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말씀처럼 정금,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성도로 세워질 원하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참 많이 힘들고 어려웠는데 그런데 혹시 그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이 당한 그 짐들을 어떻게 하든지 내가 주도권을 갖고 그 짐을 내가 풀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안 겪어도 될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그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릴 때, 우리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춘천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하게 된 것, 이것이 제 생각이나, 계획의 결과물이었겠습니까? 천만에요. 저는 춘천지역에서 교회를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냐고요?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니 하나님께서 길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며 하나님께만 반응하기를 선택하며 살아갈 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운혜의 빗줄기를 쏟아 부어주실 것입니다. 먼저 회개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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