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운행하시는 성령님
창1:1-5
우리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예수를 믿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데 이 삶을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린데 신앙생활에는 크게 세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인 친밀함 영역 (being)이고, 두 번째는 교회생활 즉 의식의 영역(doing),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이 세 영역이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친밀함, 친밀함, 친밀함만 추구해도 안 되고, 반대로 성경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다하면서 행함만을 추구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면? “친밀함을 토대한 의식과 삶의 조화”라고 정의를 내리면 아주 잘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영역이 서로 균형을 잘 이루기 위해서 그 출발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야 친밀함이 열립니다. 사람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상대방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친해 질 수 있겠습니까?
친밀함이 열리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뭐냐? 우리는 친밀함 하면 아주 신비로운 어떤 환상이나 꿈이나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친밀함이 열리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의식의 영역에서도 삶의 영역에서도 불순물이 섞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순물이 섞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의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도 닦듯이 하나님을 알게 해 주세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성령의 조명과 그 깨달은 말씀에 하나씩 순종하는 반응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1)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 2)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책 정도로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 속에는 이스라엘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그 분의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이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아는 깊이만큼 하나님을 알게 된다.
1. 지난 주일에는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이 창조주시다는 것입니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주어는 ‘나’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붙잡아야할 진리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고의적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종이 되고 싶으세요? 주인이 되고 싶으세요? 주인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세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순간 모든 불행이 시작되어집니다. 여러분! 아담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 것 아닙니까? 탕자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아버지를 떠난 것에서 부터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다, 아버지를 떠났다는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자기 독립선언인 것입니다.
한 때 청소년들 사이에 많이 불려졌던 “내 인생은 나의 것” 노래 기억하시죠?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여러분! 맡겨 주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제가 가끔 결혼주례를 하는데 여러분,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난 3년 정도 살다 이혼할 거야, 이렇게 계획하고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이혼해도 우린 행복하게 살 거야 라 생각하면서 결혼하지 않습니까? 그랬던 그들이 오늘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입니까? 인생 이거 내 것 같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업, 자녀)
여러분! 내 것 같은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러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시냐? 바로 하나님, 이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살라는 겁니다.
2) 하나님이 주권자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종류의 ‘만들다’는 단어가 있는데, 예를 들어,
-창1:7에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에서는 ‘만드사’는 ‘아싸’ 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창2:19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에서 ‘지으시고’는 ‘야짜르’ 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창2:2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에서 ‘만드시고’는 ‘바라’라는 단어를 상용합니다.
그런데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 ‘창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바라’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대단히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또 한곳에 상용되는데 창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은 내가 낳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양육한다. 내가 지킨다. 내가 창조한 것은 내가 끝까지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끝까지 통치하시고 돌보시고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낳고 버려두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창조하시고 낳으시고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2. 하나님이 창조자시며,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삶의 특징
1)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삶
하나님이 창조자시며,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환경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의중을 발견하기를 애씁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 환경에 반응 -> 불평, 원망
똑 같은 홍해 앞에서 모세 - 하나님께 반응 -> 오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라
얼마나 담대합니까? 이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이 창조자시며, 주권자이심을 믿은 믿음 아니겠습니까?
행16장, 바울과 신라 -> 빌립보 감옥 ->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반응
여러분의 반응은? 환경, 생각, 감정, 느낌, 하나님 - 요셉
2)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이 말은 쉽게 말해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가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변화되었는지를 보다가 약간 변화의 조짐이 있으면 기뻐하고 변화의 조짐이 없으면 낙심해 버립니다.
보세요, 여러분! 여전히 주도권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 낙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신뢰하는 자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물질도 풍요하면 기쁨이 넘치지만 물질적으로 어려우면 금방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의 필요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의 전 영적에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반응합니까? 그것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지금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지금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십시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그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릴 때 여러분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반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한 하나님의 인도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아닌가요?
예)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바울....
3)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권을 인정하는 삶에 있어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 -> 감사 ->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 한마디로 감사
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가능함.
상황에 따라서가 아니라, 왜? 내 모든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현재 내가 만나는 모든 문제와 상황과 현실을 통해서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때 감사가 가능합니다.
주권을 인정하지 못하면, 원망, 불평, 낙심 -> 결국 불신에 빠짐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공급하겠다.
주권 앞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기꺼이 주권 앞에 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삶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을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도 이루어 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주기도문 뒤에 모든 것의 전제가 -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 성경적인 기준이기에 내 생각은 하나도 안 중요함.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는데 그때 하나님의 공급, 풍요의 자리로 인도하심.
이 모든 것의 주도권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나타내며 그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가는 삶은 아직 멀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반응합니까? 그것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지금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지금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십시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의 길을 구체적으로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3. 2절에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이 어떻다고 말합니까?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말합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운행하시기 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지구)의 모습을 말한 것으로 그 상태가 한 마디로 무질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혼돈 - 히) “토후”로 무질서, 틀이 없다는 뜻으로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정돈되지 않은 황량한 상태
공허 - 히) “보후” “주인이 없다” 집 짓고 사는 주인이 없는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역시 아무것도 채워지지 아니한 빈 광야와 같은 적막한 상태 무가치한 상태를 말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는 말은 그냥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인 어두움으로 이 같은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으며 또한 무엇도 존재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 운행하기 전의 이 지구의 모습은 한 마디로 아무런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정리해보면, 처음 창조된 지구는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이 지구를 무질서한 상태로 창조하셨을까요? 처음 창조하실 때 한 번에 완벽하게 창조하시면 될 텐데, 피곤하게 먼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한 지구가 혼돈, 공허, 흑암이 가득하였고 이후 하나님께서 그 빈 공간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 가셨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창조에 대한 정보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힌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성령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인 된 인간의 상태가 어떤가를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예레미야 4:23에서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정확히 창1:2의 상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깨어집니다. 모든 불행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여러분! 아담의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겠다는 자기 독립선언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가만히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세요. 만약 오늘 내 삶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하다면 그 이유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 삶의 주도권을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 가 점검해 보셔야합니다.
4. 운행하시는 성령님
창1:2절, 성령님이 운행하기 이전의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에 운행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 “운행하다” 히) 라하프는 “암탉이 알을 품다”의 뜻으로 어미 새가 새 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며 알을 소중히 감싸 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을 인간의 삶의 장소를 조성하시기 위해 깊은 관심으로 포근하고 소중하게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3절 이하, 성령님이 운행하기 시작하니 틀이 만들어지고 질서가 생기고 공허한 곳에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들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의 운행하심 아닌가요? 2절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같은 삶에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운행하심입니다.
정말 지금 우리의 상황이 혼란스럽고, 공허하고, 길이보이지 않는 상황,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요, 성령께서 운행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운행하실 때 어둠은 물러가고, 혼돈스런 내 심령, 가정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공허한 심령에 주님으로 채워 가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운행하다는 단어가 또 한 곳 사용되는 곳이 있는데, 신32:10,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기 “너풀거리며”를 히브리어 “라하프”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아무런 형상이나 존재도 발견할 수 없고 텅 비어 오직 캄캄하기만 한 세상을 성령 하나님께서는 닭이 알을 품는 것처럼, 독수리가 그 어린 새끼 위를 너풀거리듯이 그 위에 역사 하셔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의 하나님, 성령님이 운행하시면 그대로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역사 합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창1:6,9,11,14,24,29, 6번 같은 의미 9번
눅1장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때 마리아는 내가 처녀인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천사가 자세하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말해줍니다. 그 때 마리아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입니다. 창1:4,10,12,18,21,25,31 (7번)
여러분 언제 행복하세요? 누군가 나를 바라봐 주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바라보지만 실패한 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연애인들은 서로 보려고 야단이지만 길거리 노숙자들에게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한 자도 바라보고 계십니다. 인생의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눈동자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아무도 나를 보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도와주는 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고통가운데 고독가운데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내가 고난을 당할 때에, 고통 가운데 빠져서 살아갈 때에, 시험당하여 넘어져 울고 있을 때에,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것 없는 것처럼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보고 계시며 그 자리에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건져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네가 어두워서 보지 못한 그 때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창세기 1장은 반복적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1:5,8,13,19,23,31(6번)
유대, 로마, 헬라 : 저녁이 하루의 시작
애굽 : 아침이 하루의 시작
우리나라 : 아침이 하루의 시작
성경은 하루의 시작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인생이 어떻게 죄로 인해 어둠의 자리에서 구원의 밝은 아침으로 갈 수 있을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됩니다.
죄인이 어떻게 밝은 아침인 생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니 해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밝은 아침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이 저녁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고난의 한밤중에서 울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기억하세요. 아침은 옵니다. 희망의 아침은 옵니다. 다시 기도하고 일어서는 아침은 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또 새로운 날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운행하시면 저녁과 같은 혼돈, 공허, 흑암의 어두움은 물러가고 밝은 아침이 올 것입니다. 새들은 노래하고, 사막과 같은 우리 심령과 가정에 시냇물이 흐를 것입니다.
아직도 창세기 1:2에 머물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에 사시는 분이 계십니까?
성령님의 운행하심의 자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내 삶이 지옥 같았다 하신분이 계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런 희망도, 소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같은 상황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데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고후4:6절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말씀처럼 우리의 예배 가운데, 말씀 가운데 성령님이 운행하셔서 우리 마음에 비추시면 됩니다.
성령님이 운행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무슨 말입니까? 이후 모든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첫 단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아버지 되심의 인정하는 것, 선언 하는 것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입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라는 겁니다. 그리하면 공급하겠다. 주권 앞에 들어오라는 겁니다. 기꺼이 주권 앞에 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삶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말씀처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려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 하셔서 운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와 자녀들 가운데 운행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터 가운데 운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섬기는 섬길 가운데 운행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운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운행 해 주실까? 운행해 주십니다. 그 근거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권을 안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심 - 내가 할 수 없음을 알게하기 위하여
눅7:11-16 나인성 과부 이야기
한 여자가 결혼하기 위해 남편을 골랐습니다. 대충 골랐겠습니까? 이리저리 다 따져보고 골랐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모산 복병이 찾아옴 - 남편이 죽음
남편 죽고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의지하고 희망삼고 살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외아들마저 죽은 겁니다.
장례행렬에 많은 사람들이 따름 - 위로가 되지 않음
그런데 예수님의 위로 -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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