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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하나님과 친밀함

17. 하나님을 아는 삶

by 오용주목사 2016. 9. 15.

17.하나님을 아는 삶

엡1:17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친밀함으로 부셨습니다. 이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의중, 뜻, 길을 알아 그 일이 나의 온 삶으로 동참하는 이것이 신앙생활이요, 포도나무 가지의 삶이요, 동역자의 삶이요, 목자와 양의 삶입니다. 이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흘러 넘쳐 열방이 주가 하나님 되심을 알아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인식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나의 온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오늘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를 듣고자 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1.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

1)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에 관하여 성경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교리적으로, 이론 적으로 알면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엄청난 착각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우리 신앙에 치명타를 줍니다.

성경을 통해서 교리적으로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정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모르면 어떻게 목적지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길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목적지가 아니듯이,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은 이정표 같고, 길과 같아서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이정표를 따라가면, 길을 따라가면 우리의 목적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표를 보고 나는 예수님을 이젠 다 안다고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전(출3)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이전(삼상3)

->니고데모가 아는 앎 (요3)

->마르다가 안다고 확신했던 앎(요11)


2)하나님을 아는 앎

그럼 우리가 추구해야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에 관해서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에 관하여 안 주님을 이제는 실제적이며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아야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실제적이고, 개인적으로 아는 앎.

모세 ->출3:1-12

       출34:5-6

이사야 ->이사야6:1-5

바울 -> 교리적으로 너무 잘았고 있었음, 그러나 그가 행9:3에서 실제 빛으로 오셔서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됨. 그 후 바울은 예수님을 알수록,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 사도중에서 지극히 작은자(고전15:9)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엡3:8) ->죄인중의 괴수(딤전1:15)


다윗이 시편18:1절에서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이것을 배워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나의 힘이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기에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라고 고백한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성경이 말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3)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총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엡1: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바울의 기도입니다(15절). 이 기도는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무엇을 기도하느냐 ->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습니다. 실제로 NIV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유병과 우유의 예

우유병이 없으면 담을 수 없음

우유에 비해 우유병이 적거나 구멍이 나있으면 다 쏟아져 버림

우유병이 찌그려져 있으면 우유가 찌그러지게 담겨짐.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즉 바른 신학이나 바른 교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유병은 우유가 아닙니다.


3.주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이론적인 지극 그 자체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리새인들의 신앙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경경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요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5:46-1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마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 장님이었습니다.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죄와 탐심이 가득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외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생명을 자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마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신앙이 타락하면 태가 막힘


4.반면에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 있는지 무엇을 보면 아는가? 삶을 보면 압니다.(롬2장) 이론은 우리의 삶에 전혀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음

- 물리적 변화 ->나무가 의자로, 물질의 본질은 변화되지 않고, 모양만 변화)

- 화학적 변화 ->염산, 나트륨은 둘 다 독소입니다. 그러나 이 둘이 합하면 염화나트륨, 즉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 될 전혀 새로운 물질인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주님을 아는 이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을 실제 아는데서 나옵니다.


이사야6장, 나중에 3년 동안 벌거벗은 채로 행하라 하심에 순종함(사20:2-3)

하나님을 아는 것을 설교하면 사람은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두 극단을 보아야합니다.


좌 극단 -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것이요.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 그래서 신앙은 전통적 교리를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극단이라면

우 극단 - 성경은 안 중요하고 경험만 중요하나고 생각하는 것이 또 다른 극단입니다. 그래서 바래세인들의 의식을 아예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적 올바른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론 -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다윗 -시편27:4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바울 -고린도전서2: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빌3:7-8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해야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이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길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보이실 때 그 길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천국이 저희 것이요, 주님이 아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열망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중과 길을 우리에게 보이실 것입니다. 개인이 하나님과 알기를 열망하고 그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면 여러분 개개인의 비전을 보이시고, 교회가 그렇게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면 교회의 비전을 보이실 것입니다.


나를 왜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보내셨는지, 왜 오게 하셨는지, 어디로 부르셨는지, 지금까지 왜 인도해 오셨는지, 왜 교회를 이곳에 세우셨는지, 왜 이러한 아내, 남편, 자녀들을 만나게 하셨는지..그 하나님의 의중을 보이십니다. 이때 그분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내 삶을 조정하고 동참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