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특징
히3:7-19
지난주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수인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형용을 보는 것, 말씀이 거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친밀함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실제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어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이론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리로 전환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십자가의 복음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삶도 하나씩 비춰지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신앙의 첫 단추와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수요성경공부를 통해 거짓신앙체계를 배우고 있는데 우리가 왜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 깨뜨려야 하는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기복신앙, 인본주의를 깨뜨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것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위한 수단으로 깨뜨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될 때, 그리고 그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물 때 하나님의 임재, 회복, 하나님의 실재가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첫 단추요 핵심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아무리 사모하고, 아무리 능력을 경험해도 하나님과 친밀함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예를 보면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1.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친밀함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첫째 - 요6장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요6장에서 놀라운 기적의 떡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요6:22-25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보세요! 얼마나 큰 기적을 경험하고 또 사모했는지.. 그런데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자 그 많던 그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그들이, 그렇게 사모하여 나온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떠났습니다.
요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왜? 그들에게 영적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왜 그토록 큰 기적을 경험하고 사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영적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렇게 사모하여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전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여러분 이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기적은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기적 가운데 살았습니다.(애굽의 10가지 재앙, 구름기둥 불기둥, 홍해, 마라, 만나, 반석에서 물, 옷, 신발..)
이렇게 엄청난 기적들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친밀함이 전혀 열리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사모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능력을 경험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함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함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2.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특징들
하나님의 손을 구하면 다음의 특징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분노케 합니다.
히3:7-19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행사”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데 또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습니다.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보세요! 40년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을 격노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있는 사실조차도 몰랐습니다.
기억 -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신임(기뻐하시는)하는 싸인 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별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실제 하나님을 분노케 하면서도 모르는 이유는 은사가 나타나고, 교회가 성정하고,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가정에 별문제가 없고, 남편 사업도 별문제가 없으니 하나님이 자기를 제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이루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사를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신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는 별개라는 사실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렘12장은 유다에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로 임한 시대말 적인 상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BC 605년에 1차 포로로 끌려가고, BC 597년에 2차로 끌려가며, BC 586년에 완전히 패망합니다. 그런데 BC 597 2차 침공 시 나라는 거의 패방직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잡혀간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이 코앞에 와 있는데도..
아무리 예레미야가 말을 해도 안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시험에 든 것 같습니다.
렘12:1-2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여기 악한 자, 반역한 자 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상 적으로 형통하고, 평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사랑한 싸인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그토록 말을 해도 안 들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계3:14-17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적으로 잘되었던 교회입니다. 급성장한 교회였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칭찬 한마디 없는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못 보았나요? 세상 적으로 잘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들을 신임하는 싸인 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축복의 개념마저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축복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외부적 사역의 확장이 하나님의 신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임과는 별개입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둘째 -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길을 모르게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길을 모릅니까? 하나님의 손을 구한 삶에서는 하나님의 길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보세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를 몰라다는 겁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3가지를 계시하시는데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목적, 길(방법)을 계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왜 계시하십니까? 모세로 하여금 그 일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한 자체가 동참하라고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로 초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우리 삶을 조정해야 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에서 양치는 일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 아내에게 찾아가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그렇게만 하고 삶을 조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목적을 계시하는 것은 나로 그 일에 동참하게 하시 위해서입니다. 동참하려면 내 삶을 조정해야 합니다. 내 삶을 조정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그런데 대가는 지불하길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실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대가가 대단히 클 수 도 있습니다. 우리 삶이 조정되고 동참되어지면 그때 주님이 앞서서 인도해가십니다. 구체적인 길(방법)을 지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야훼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까요?
*모세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려면 믿음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려면 주님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믿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하셨듯이 모세와 함께하실 것이며 그때 약속하신 그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야훼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모세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것이 무엇으로 증명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이끌고 여기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싸인 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싸인 이 아니고 나중에 싸인 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심을 보이신 것이죠.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을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을 때만 계시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 목적, 길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신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끈 하나님의 목적이 나오는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자기들을 광야로 이끌었는지, 하나님이 광야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의도, 의중, 목적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지만 하나님의 목적, 의도, 의중, 시대를 향한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노아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방주를 만드는 것인데 집집마다 다니며 회개를 외쳤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기쁘하셨겠느냐는 겁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당신의 죄로 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말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그릿시냇가에서 그 후에는 사르밧 과부 집에 가서 숨으라고 했는데 아합왕에게 말한 담대함을 가지고 집집마다 다니며 회개를 외쳤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셨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 시대를 향한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이 무엇인지, 왜 이 땅에 보내셨는지 그 의중과 목적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의 의도가 보이는가? 언제 하나님 자신, 목적, 길이 보이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길을 모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입니다.
셋째 - 불신이 그 특징입니다.
불신이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히3: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하나님의 계획에서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한 불신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시78:12-22 “12-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18-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19-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22-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이 시편78편은 출16장 사건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불신은 큰 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믿음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의 대명사로 머리에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환경의 1/100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저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불신인줄 모릅니다. 왜? 믿음의 이해가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믿음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에 관해서 교리적으로 믿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이 열리지 않으니 하나님의 목적 길을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알아야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을 모르니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똑 같은 상황에 있었지만 그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어쩌면 리더인 모세가 훨씬 힘들었을 텐데.. 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출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이러한 믿음에 설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 자신, 목적, 길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적, 길, 그 분을 모르니 믿음으로 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넷째 - 세상 사랑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방해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세상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세상 사랑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내셨습니다. 이제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셨던 일은 그들 속에서부터 애굽을 빼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빼내는데 는 하루가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부터 애굽을 빼내는데 는 사십 년이 걸렸습니다. 아니 40년이 걸려서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흩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속에서부터 애굽을 버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애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신체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애굽을 그리워하며 회상했습니다.
출애굽기16:2-3 “2-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것의 정점은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7:39-41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애굽 때문이었습니다. 그 세상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은 모세의 말에 청종하기를 거부하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무서운 사실은 이 세상 사랑으로 인한 우상 숭배와 그 죄의 영향력이 이스라엘이 패망한 그 날까지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금송아지가 가득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들이 우리 지체를 누구 혹은 무엇에게 드려 순종하든지 우리는 그것의 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 지체를 죄에게 주어 순종하면 죄의 종이요,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입니다(롬 6:16).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경배하고 예배를 드릴지 모르지만,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버는데 있어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칙은 간 곳이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면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처럼 여기며, 돈에 관한 한 돈의 법칙만을 따를 뿐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말로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주님이라고 고백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돈 앞에 엎드려, 다시 말해서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당신이 바로 우리를 인도하는 신입니다’라고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과 정확하게 똑같은 일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세상 사랑함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오늘날 우리 가운데 팽배한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열매입니다.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다섯째-참다운 순종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가데스바네아의 사건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신명기 1:19-21)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 산에서 발행하여 너희의 본바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2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가데스바네아는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선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취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에만 의존하여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드디어 맹세하사 그들을 흩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온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리라고 축복하셨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라면, 그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순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참다운 믿음도 따라서 참다운 순종도 없습니다.
순종과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순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해하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입니다.
순종도 믿음이 있어야 순종이 가능합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는 하나님 크기의 일이기에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삶이 뭐냐?
시편103:7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그리고 모세에게는 무엇을 보여주셨습니까?
(시 103:7)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사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 ?그 행위를?의 ?행위?라는 단어는 원래 원어에는 ?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새 번역이나 모든 영어 성경에는 다 ?길?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행사만을 보여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길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신29:2-4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 목전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가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4-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 볼 수 있고, 길이 안 주어졌습니다. 영적분별력이 안 주어진 겁니다. 왜? 그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구한 것이 오직 하나님의 행사 곧 하나님의 손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다음 과에서 살펴볼 모세의 삶을 보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 먹을 것을 구하고, 마실 것이 없을 때 마실 것을 구하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 따름입니다. 자주 그들은 매우 절박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그것들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 어떠한 하나님의 길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와 처지를 따라 도움의 손길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셨지만 이 삶에서는 영적 분별력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영혼을 소멸하는 병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우리들은 영혼을 소멸시키는 무서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6:12-15) 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13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요청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어떻게 하셨습니까?(15절) 파리하게 하셨습니다. 영혼이 점점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멸하는 병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의도를 알기시길 원하였지만 그들의 영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파리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은 서서히 말라 죽어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길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분별력은 점점 상실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눈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결국에는 신앙의 모양은 있으나 그 실재가 없는 바리새인들의
삶과 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13:14-15의 말씀처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믿음의 삶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도 불가능해 집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은 이처럼 무섭습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도들의 삶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것과 너무 흡사합니다. 오늘날 그들은 많은 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 기도, 금식 기도, 다니엘 기도, 여리고 기도, 기도원 특별기도 성회, 릴레이 기도 등. 그리고 입시 때가 되면 큰 교회들은 새벽기도 시간에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붐빕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의 기도는 그들이 세워놓은 목표와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과 역사만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의 손만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나타난 특징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종류의 신앙의 각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도 응답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응답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점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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