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신앙생활의 이상 징후(2) ‘그러므로’의 삶
로마서 12:1, 에베소서 2:1-8
지난 주일은 신앙생활의 이상 징후 첫 번째 시간으로 내게 기쁨이 있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신앙생활의 이상 징후 두 번째 시간으로 나는 삶의 변화가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주님으로 인한 본질적 기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주님으로 인한 기쁨, 행복이 없다면 이것을 당연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방치하면 안 됩니다. 반드시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오는 기쁨, 복음의 기쁨을 다시회복하시길 바랍니다. (로마서 정독)
뿐만 아니라 수년 또는 수 십 년을 예수님을 믿지만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본질적으로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도 변화가 없을까요? 이것이 신앙생활의 두 번째 이상 징후입니다. 그래서 여주봉 목사님도 ‘십자가의 복음, 책 서론에서 왜 예수를 몇 십 년 믿었는데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가?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기록한 성경 서신서가 총13권인데 그 서신서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성경이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는 겁니다. 전반부는 교리부분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을 반지로 비유하면서 그 반지의 보석을 로마서라고 하는데 그 로마서를 살펴보면 로마서는 총 16장으로 되어있는데 이 로마서도 크게 둘로 나누어져있습니다. 전반부는 1장에서 11장까지로 우리가 ‘오직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12장에서 16장까지 너희가 이렇게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우리에게 이 “그러므로”의 변화된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사도바울이 말한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러므로’의 삶이 있습니까? 혹시 ‘오직 은혜’만 있고, ‘그러므로’는 없다면 그 신앙은 절름발이 신앙일 것입니다. 여러분! 뭐가 절름발이 입니까? 한쪽 다리는 정상인데 한쪽 다리는 비정상인상태가 절름발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오직은혜, 오직은혜는 부르짖으면서 오직은혜만 있고 ‘그러므로’의 삶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절름발이 신앙 아닌가요?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영적 불구는 아닌지? 그렇다면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죠? 공지천에 가보면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걷는 분들이 계시는 대부분이 몸에 이상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들도 이렇게 노력한다면 영적 불구인 우리도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오직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러므로’의 삶의 자리로 나가는 결단이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삶은 변화가 없을까요? 왜 그러므로의 삶이 없을까요? 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그러므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과거 내가 어떤 존재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 까지를 함축해서 에베소서 2:1~3에서 세절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과거우리 존재를 “그때에, 전에는”으로 표현하는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2:1) 아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죽은 자라고 하니 좀 황당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이 말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사람이 죽듯이 영혼이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천국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단절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뽑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대신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은 표시가 납니다.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그러면 영이 왜 죽은 것입니까? 성경은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허물” 헬) 파랍토마 : 옆으로 미끄러짐 혹은 탈선 진리로부터 벗어남
“죄” 헬) 하말티아 : 과녁에서 벗어남(하나님 중심, 목적, 길에서 탈선, 궤도이탈)
본래 우리가 창조될 때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 죄를 지으므로 영적인 죽음이 들어왔고 육신의 죽음도 들어온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 영이 죽게 되니 하나님도, 천사도, 천국도, 악령도, 지옥도 영적인 존재와 세계는 다 모르게 된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결과
1)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여기서 "그 가운데"란 "허물과 죄 가운데"입니다. 죄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죄짓는 것을 평범한 일로 생각하며 죄 속에서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죄의 실상을 알면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마시고 싶은 유혹 때문에, 사람들이 볼까 숨어서 홀짝홀짝 마시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독약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만 뜨이지 않는다면 죄 지을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를 아는 것입니까? 모르는 것입니까?
2)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영이 죽은 사람은 세상 풍속을 좇아 삽니다. "이 세상 풍속을 좇고" 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 헬) 아이온 세대 시대를 의미 이 세상의 세대를 좇았다는 뜻
이 세대의 가치관을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관 하나님 없는 사고방식을 따라 살았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요한1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갈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따라감 - 머리 스타일 옷도 유행을 따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하면 그것은 해도 괜찮은 줄 압니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요!” 옳고 그른 기준이 세상이고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적 가치관, 세속적 가치관, 세상적 관점을 따라 삽니다. 그러면서도 이 삶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것임을 모릅니다.
마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이거 사람들이 다 하는 것 아닙니까?
3)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사람은 신을 따르게 되어있고, 백성은 임금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귀를 ‘이 세상의 신’(고후4;4) 이라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가리켜 “이 세상의 임금”'(요12:31)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산다는 것입니다. 죄 짓기 위하여 노력해 보셨습니까?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선하게 살아지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들이 왜 한결같이, 죄 짓는 쪽으로, 나쁜 방향으로 끌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죄와 마귀에게 끌려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눈이 가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고후 4:4)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이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렇습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눈이 가리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귀의 실상을 모릅니다. 마귀가 얼마나 교활한지, 인간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세상에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증거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많이 배워서 죄가 나쁘고 욕심내면 안 되고, 싸우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배운 사람들이 더 거짓말하고 알 만한 사람들이 더 싸우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살자가 속출하고 가정은 파괴되고 사회는 분열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참 평안과 안식이 없고, 허무함에 빠지고 살 의욕을 잃어버리고 모든 이들에 대하여 분노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은 저주 아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 3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이 말씀 역시 충격적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면 지옥간다!’ 왜 충격이 됩니까? 다르게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 결국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광고 카피에도 “본능에 충실하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니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는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지옥이 있음을 모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이 살아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은 결코 육체의 욕구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별의별 문제가 많지만 근본 뿌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이 죽어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보아야 합니다. 육신은 살았고 세상 풍조 따라 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배후 영적 실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죽고 마귀의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경만이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아무리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살아도 저주같은 삶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는 이것들을 거스릴 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생명 없는 죽은 고기들이 물살을 거스릴 힘이 없는 것처럼, 연약하고 무력합니다. 영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5) 그 결과 3절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런 허물과 죄악으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 즉,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고 영원한 죽음을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씀
시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말은 영이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며 결국 갈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옥을 부정합니다. 실제로는 믿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지옥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까? 내가 가는 곳입니다.
2. “그러므로”의 삶을 살기위해서 현제 내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보세요? 1절에서 3절까지 하물과 죄로 죽은 나, 그래서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고,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그 결과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런데 4절부터는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호 데오스) 4절 앞에는 원어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존재인데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큰 사랑을 인하여” 4절부터 9절에는 “긍휼”, “사랑”, “은혜”, “자비”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세상 풍조와 마귀와 육체의 욕심에 빠져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시고, 사랑하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은혜”로 주신 “구원”입니다. 우리들의 어떠함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풍조, 마귀, 육체의 욕심을 따라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긍휼, 사랑, 은혜, 자비로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대가 없이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2:8)
따라서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전에는 진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복 받는 자녀가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마귀에게 더 이상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막연하던 천국 소망이 분명해집니다. 예수 믿고 나면 “천국 가면 좋겠다.”가 아닙니다.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계시니 우리도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바울과 같이 ‘그러므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했는가? 왜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가? 엡2:7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어떻게 여러 세대에 나타낼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의 삶을 삶으로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므로‘의 삶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는 위험 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쁨은 사라진지 오래고, 수 십 년을 예수님을 믿어도 삶의 변화를 찾아보기 힘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을 받았다 함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없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행복하지 않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하면서도 그러므로 의 삶의 변화가 없습니까? 여전히 예배도 힘들고, 성경을 읽는 것도 힘들고, 기도도 힘들고, 오이코스 모임도, 삶 공부도, 전도도 힘들고, 사명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듭니까?
그렇다면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받을 사람입니다. 이들은 전도할 사람이 아니라 전도 받을 사람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빠져 있던 죄악과 저주의 수렁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만으로도 감격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성도가 ‘그러므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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