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권별설교/갈라디아서

26.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삶 (갈 5:16~17, 24)

by 오용주목사 2016. 7. 10.

2016.07.10.                                                     26.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삶

                                                       5:16~17, 24

 

 

저는 지난 3주 동안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심고 거두는 것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딱 두 종류인 것 같습니다. 온통 자기 육체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자와 성령을 따라 사는 자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영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상태로 태어나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 반응하며 사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그의 영이 살았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반응하며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 과거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뒤에서 후욕하고.. 여러분 이것 언제 했던 것들입니까? 예수 믿기 전에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 믿기 전에 했던 것들이 지난 주중에 내 삶 가운데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왜 일까요?

 

1. 그것은 중생을 하였지만 과거 자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던 죄의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여러분! 노예근성이 얼마나 집요한지 한번 보세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을 항해 가면서도 왜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줄 아세요? 바로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맛보지 못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만나를 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말이 뭡니까?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지금 열거한 이 음식들은 다 정력과 관계있는 음식들인데 왜 생각났을까요? 한마디로 노예근성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중생하였지만 여전히 과거 육체의 본성이 추구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에 기웃 거리는 것도 다 죄의 노예근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세요, 두려움,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욕심, 명예욕, 자존심, 자기연민, 불신, 판단, 후욕, 매사 부정적, 이러한 모든 것이 타락한 육체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인데 우리는 이러한 것이 죄인 줄 알면서 여전히 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이러한 것들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노예근성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압니다. 자기 나름대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왜입니까? 오랫동안 부정적인 생각에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갈5: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성령을 따라 살라 보려면 자꾸 육체의 욕망이 성령을 따라 살려는 삶을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즉 아군과 적군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사람에게는 지안, 육안, 영안이 있는데 지안은 배워 아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을 보여주면 여러분은 무슨 말인가 하나도 모를 것입니다. 왜 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안은 사물을 보는 눈이죠, 그렇다면 영안은 영적 안목인데 특별히 하나님의 의중과 의도, 뜻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눈이 멀면 어떻게 되느냐? 아군끼리 싸우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싸워서는 안 될 사람과는 코피 터지게 싸우고, 정말 싸워야 할 것과는 적당하게 타협하는 어처구니없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게 싸워야 할 대상인지 사랑해야 할 대상인지... 대부분 싸워야 할 대상과는 싸우지 않고 사랑해야 할 대상과 죽어라고 싸우는 것 아세요?

 

여러분이 지금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을 내는 대상이 누구인지 한번 살펴보세요. 그게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을 내야하는 대상인지 아니면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위로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인지..오늘 내가 가장 사랑해야 그들이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나 아닌가요?

 

그러니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싸워야 할 대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누군가가 아니고, 바로 여러분 안에 있는 저급한 육체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저급한 욕구와 싸워보셨습니까? 이러한 것들과는 적당히 협상하고, 타협하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니까, 짜증을 내고, 분을 내어도 괜찮아, 나는 아직 믿음이 어리니까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를 해도 무방하다고 그렇게 생각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상처가 많으면 상처가 많은 만큼 싸우시고, 믿음이 어리면 어린만큼 싸우십시오. 상처가 많다고 믿음이 어리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방종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피 흘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교 아닙니까? 순교를 각오하고 육체의 욕망과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똑 같은 의미의 말씀을 롬6:11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다시 말에 죄에 대하여 죽은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인 것을 인식하고 육체의 욕망이 올라 올 때 마다 그것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기준에 반응하는 것이 육체의 욕망과 싸우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자 입니다. 따라서 6:14절 말씀처럼 죄가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분노, 시기, 질투가, 불신이, 불안이, 자기연민이,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놈이 죽었는데 우리는 오래 동안 그것을 잘 알지 못해서, 진리를 몰라서 그것에 순종해 왔었던 것입니. 우리가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낙심했습니다. 우리가 자기 연민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불안 하고, 불신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상황과 환경에 반응했습니다. 감정에 욕심에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한다. ? 죄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죽었습니다. 옛 본성에서 나오는 타락된 감정, 욕심은 그것은 이미 우리의 삶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한다, 너희는 이미 놀라운 승리를 거둔 자다. 여러분이 오래 동안 두려움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그 두려움의 족쇄를 풀어 놓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래 동안 시기 질투의 문제에 사로 잡혔다면 그 시기 질투의 문제를 이미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모든 족쇄가 파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루분이 오래 동안 자기 연민에 빠졌고, 불신에 빠졌고, 열등감에 빠졌고, 낮은 자존감에 헤맸고, 불안함에 헤맸고, 두려움에 헤맸다면 주님께서 이미 놀라운 승리를 이루어 놓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의 약속입니다.

 

반면 이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습니다.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지어다이 말은 그렇게 간주하라 믿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는 말이 무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다는 말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 반응한다는 겁니다.

 

2;19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가족에게는 가장인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 아버지를 의지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를 누굴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의지 합니다. 의지 한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날도와 줄 것을 기대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값진 소유물로 택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성에 있다는 말은 인격체 되신 하나님이 나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마다, 하나님을 찾을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뭔가 세게 뭔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찾을 때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더 경험하고 알게 되는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과 관계성에 있을 때 우리 삶에 진정한 승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진리에 동의하고 싶은데 자존심이 나를 방해하며, 분노가 나를 방해하며, 감정이, 질투가 나를 방해해요, 그때 마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지요.

은혜에 풍성하신 하나님 제가 지금 이러한 상태에 있는데 저를 도와주세요. 여기서부터 벗어나기 원해요. 그럴 때 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고 선하고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버려두는 분이 아니라구요,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 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기 위하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며 주님을 구할 때 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로, 진리로 이끄시길 기뻐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보십시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가장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가장 선하고 완전한 길로 인도하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말이 여러분의 삶의 놀라움이요, 기쁨이길 축복합니다. 나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동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음을 인식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말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하자는 말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좇아가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환경을 보니 너무너무 힘들고 좌절이 됩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안도와 주실 것 같아 그러면서 낙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낙심할 것인가, 하나님께 반응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나를 인도해 주시기를 구해야합니다. 그때 성령님이 진리를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그 진리에 반응하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불신의 생각은 떠나가라고 선포하고, 나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죽었음을 선포하고 그리고 진리를 붙잡는 것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드실 것을 신뢰하십시오.

지금 제 앞에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저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제가 동의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할 때 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놀라운 승리로 축복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성령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누구입니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 헬)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것은 합성어입니다.

파라’ / ‘클레토스이 두 단어가 합성된 것인데 파라는 전치사로 곁에, 옆에, 나란히 이런 뜻을 가진 파라’, 그 다음에 클레토스는 부름 받은 자란 뜻으로 성경에서 기록된 보혜사는 원어 그대로 직역을 하자면 곁에 있으면서 도와주는 자이게 보혜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성도님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종류는 성령님을 본적도 없고, 성령님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그러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구요, 또 한 종류는 이 성령님이 보혜사,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임을 너무 너무 실감하고, 경험하고 누리면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로 나눠지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만약 제 같은 목회자가 성령님이 누구신지, 성령님이 뭐하시는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상태로 목회를 한다고 하면은 그건 재앙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혹시 이러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했는데 여전히 고아 같이 신앙생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1)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

(16: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여기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도한다는 말이며,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게 될 때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실제 우리 삶에 사건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미워 죽겠습니다. 이 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움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삶이 잘되지 않습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기준인 것을 알지만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과 욕심이 진리에 동의하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성령의 따라 행하는 삶을 살려할 때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의 욕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육체의 소리와 성령의 소리를 동시에 듣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늘 성령의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우리가 육체의 소리를 내리고 성령의 소리, 진리를 따라갈 때 우리 삶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크기의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2가지 생각이 나옵니다. 하나는 육체의 생각이, 또 하나는 성령의 생각입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생각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각인가? 성령의 생각인가?

여러분! 육체의 욕망에서 나오는 생각은 불안함, 두려움, 좌절, 낙심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하며 그 결과 자기식 처방을 하게 됩니다.

 

(, 사울 왕) 삼상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13: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삼상13: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삼상13: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결과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15:23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사울왕의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했습니까? 육체의 소리, 자기 처방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자꾸 실패합니까? 자기식의 처방의 소리를 받고 그 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왜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내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육체의 소욕을 좇아가기 때문 아닙니까? 성령에 의한 삶이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요, 여기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 자유함, 승리가 있습니다.

 

2) 우리가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복음서의 말미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자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아무런 힘도 없고, 용기도 없고, 패잔병 같은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사도행전에 그 위대한 이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처럼 제자들 곁에서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이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육체를 욕망을 따라 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를 도아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간절히 갈망하며 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4:30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성령을 근심하게 한 것이 있다면 청산하는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내 곁에서 함께 해 주시는 성령님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 ‘파라곁에

내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수 있도록 내 곁에서 도우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다면 도우시는 성령님을 간절히 찾고 구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카운슬러 - 상담자

헬퍼 - 돕는자

컴포트 - 위로자

 

말씀을 맺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문득 한 노래가 생각이 난겁니다. 육체의 소욕을 이 보다 더 잘 노래한 것을 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가시나무새 (시인과 촌장)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처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이것이 우리 모습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노래 가사처럼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이거 우리 모습 아닙니까?

안되는데 하면서 여전히 육체적 본성 저급한 욕구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이러면 안 되든데 하면서 또 반복적으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언제까지 살아가시렵니까?

 

어떡하면 좋습니까?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파라, 내 곁에서, 클레토스, 나를 돕는 분,

하나님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어떨 때 도우십니까? 성령님을 의지할 때,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을 의지 하십시오.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