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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절기설교

17.천천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사9:6-7)(2018년 성탄절)

by 오용주목사 2018. 12. 25.

2018.12.25.                                            17.천천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

9:6-7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 탄생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언한 것인데 그 예언대로 700년이 지난 후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중에 읽은 미가5:1절에서도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나오는데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난다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이 어떻게 성취됩니다.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살고 있는데 그 때 아이구스투스 로마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모든 사람이 다 호적등록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다윗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임신한 마리와 함께 떠납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산기가 있게 되고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이겠습니까? 우연히 아이구스투스 황제가 호적을 명했고 우연히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을 낳게 되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마음을 움직여 호적을 하도록 하게하시고,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하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해산할 날이 차게 되고 그래서 낳게 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각본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떨까요?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오셨다면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이 다시 재림의 주로 안 오실 것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하여 첫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것, 그것도 유대땅 베들레헴에 이것은 우연히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수 백 년 전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예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이요, 약속인 것을 믿으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립니다. 특히 재림에 대해서..

 

그렇다면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오신 이유,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오셨는가를 모른다면 성탄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오셨는가?

 

우리로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왜 나셨는가? 그 이유가 사9:1절로부터 나오는데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오신목적은 회복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9:1절을 보시면 전에~~ 옛적에는~~~말이 있는데 이 말은 분기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에... 옛적에는 어둠이었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분기점이 있습니까? 여러분 간증이라는 것이 다 이런 것 아닙니까? 전에...옛적에는... 어둠이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빛이다. 여러분에게는 이 간증이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복과 그 회복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는 누림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분기점이 있어야 합니다.

BC의 삶에서 AD의 삶으로의 전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한데 이 삶이 있느냐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이게 문제 아닙니까?

부부싸움도 전에...옛적에는 맨날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 때문에 이 모양이라고, 당신이 문제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이었는데 이제는 여보 나 때문이에요. 내가 문제에요, 이런 변화가 있느냐 말입니다. 만약 없다면 그렇다면 예수를 잘 못 믿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똑 같은 게 절대 정상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사도바울은 엡2:12-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도 12절에 그 때에 ~~ 13절에 이제는 처럼 바울의 간증이 항상 이 구도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분기점, 그 때는~~~ 이제는 의 간증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이 번 성탄절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전에는...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누림이 있는 성탄절이 되시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에... 옛적에 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8: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어쩌다가 이런 흑암의 상태, 어쩌다가 이런 고통의 상태, 위를 봐도 고통이고, 아래를 봐도 고통인 상태, 어쩌다가 이런 고통에 빠졌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본문의 배경을 아셔야 합니다.

 

이사야 7장에 보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이것이 남유다 백성들에게 얼마나 두려움이 되었던지 2절을 한번 보십시오.

7: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러한 유다백성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위로해주시는데 4절을 보십시오.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이렇게 하나님이 위로하시는데 당시 왕이었던 아하스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왠 줄 아세요? 아하스나 백성들에게는 당시 강대국인 앗수르의 도움을 좀 받아야 겠다는 생각으로만 꽉 차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위로가 안 되는 겁니다.

 

오늘도 마찬 가지입니까? 관심이 하나님께만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도 크게 다가오지만 관심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고, 앗수르와 같은 이 세상 것에만 있다면 하나님의 위로도 잘 와 닫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8:19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오늘날로 말하면 점쟁이에게 가서 묻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오는데 영향은 딴대서 받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인터넷, 오늘의 운세, 사주, 사람, 점쟁이, 경험, 지식)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카카오스토리에 매일 아침다다 올리는 곳이 뭔 줄 아세요? 오늘의 운세입니다. 오늘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운세입니다. 오늘은 경쟁 방해로 일이 생각보다 더딜 운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눈으로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태도, 또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이게, 교회는 들락거리고 몸은 와있지만 영향은 딴대서 받는 그런 사람의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821, 22절을 만든 원인이라는 겁니다.

8:21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굶주릴 것이라 그가 굶주릴 때에 격분하여 자기의 왕과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8:22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리라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주일이면 교회는 나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삶에 어두움이고, 죄와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마음에 열등의식과 우울함이 있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 공포감, 초초감이 있는 분들은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굴 의지하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만약 말입니다. 여전히 내가 어두움이라면 어떠하면 좋겠습니까?

 

1.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셔야 합니다.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분 보세요? 어둠에 있는 우리에게 밝은 빛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는데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말씀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을까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무엇에 관심을 두십니까? 우리가 어릴 때는 산타 할아버지나, 루돌프 사슴코, 아니면 케롤송, 교회서 하는 연극, 새벽송, 카드나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이런 부수적은 것들에 관심을 두고 그런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절의 본질적인 예수님에 대한 기억, 추억은 별로 없어요. 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만 잔뜩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성탄절이 되어도 예수님께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여전히 어둠 아닙니까?

 

사실 지금 이사야가 이사야서를 기록하는 당시 상황은 한 마디로 인간 왕을 기대했다가 절망의 상태에 처한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 왕의 후손인 왕들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는데 그 왕들은 항상 실망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는 이사야 9장에서 인간의 왕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품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거 우리 모습 아닙니까? 인간의 왕, 인간 대통령을 기대할 것이 있습니까? 오늘 이 사회에서 희망이 있습니까? 온통 올해보다 내년은 더 절망이라는 소식뿐 아닙니까?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식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대신 들려오는 소식은 사건, 사고, 소식뿐 아닙니까?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번에는 바꿔보자, 그래서 바꿨더니 나아진 게 있습니까?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9: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몰두하셔야 합니다. 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닌, 세상의 것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닌,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주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 가정을 다스리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날 다스리소서)

자 그러면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라면 나는 그분으로 인해 무엇을 누릴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3절과 같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9: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무슨 말입니까? 과거에는 어둠이었는데 지금은 밝은 아침의 삶의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과거에는 틈만 나면 절망하고, 틈만 나면 좌절하고, 틈만 나면 마음이 무너져 우울한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빛이신 주님으로 인하여 희망과 기대감과 소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둡고 우울하고 근심과 두려움과 불안과 한 숨 쉬는 것이 변하여서 즐거움이 회복되는 그런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1.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2.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3.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4.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후렴)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여러분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진정 BC의 삶을 청산하고 AD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인가 과거에는 틈만 나면 비관하고, 좌절하고, 틈만 나면 절망하고 그런 존재로 살았다면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아 낙관의 자리, 희망의 자리, 회복의 자리 이런 자리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이 있는가가 그 증거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9:7 하반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점쟁이를 의지하는 태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데 사8: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이미지 - 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여기 실로아 물은 기혼 샘물에서 발원하여 예루살렘 도성의 동편을 끼고 흐르는 작고 가느다란 시냇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샘물에서 나오는 물이 얼마나 힘 있게 흐르겠습니까? 천천히 흐르는 물, 이 물을 하나님의 이미를 말한다면 여기에 반해 눈에 보니는 강대국, 그들이 의지하는 강대국 앗수르에 대한 이미지를 7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8: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의 물이라고 표현하고 또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고 무당들을 의지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이 시대의 문화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와 같지 않습니까? 빠름, 빠름, 자극적이고, 여기에 반해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사랑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지 않습니까? 자극적이지도 않고... 우리 예배가 천천히 흐르는 물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요즘 젊은 애들이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어떠세요? 이 세상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지 않습니까? 매력적이고...그런데 하나님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같이 안습니까? 기도해도 천천히 응답하시고.. 매력도 없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천천히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을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 지금 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 아세요?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잠잠히 사랑하는 사랑인 것 아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이정도 지탱하게 만든 그 모든 원동력은 큰 하수, 강력은 세상의 그 무엇이 아니라 잠잠히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 아세요?

 

여러분 이 하나님을 가장 잘 묘사한 것이 탕자의 아버지 아닙니까? 그 패륜아 같은 자식이 아저지 멀쩡히 살아있는데 유산을 다 받아가지고 정말 흉용하고 창일한 세상에 가서 허랑방탕할 때 아버지의 사랑은 기껏 집 문 앞 에서 기다리시는 겁니다. 저 자식 저거 언제 오나? 와야 되는데... 나중에 재산 다 탕진하고 돼지 쥐염 열매를 먹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아버지에게 돌아가니까 그때도 서 계시는 아버지 이게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잠잠히 사랑하시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사랑,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원하세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은 사랑입니까? 아니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사랑입니까?

 

여러분은 부부사이에서도 어떤 사랑을 원하세요?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은 사랑을 원하세요? 금방 뜨거웠다가 금방 식었다하는 그런 사랑을 원하세요? 자기야 이것도 먹어 그랬다가 금방 밥도 차려주지 않는 그런 사랑을 원하세요? 그렇게 팔팔 끊다가 하루아침에 배신하고 돌아서는 그런 사랑을 원하세요? 아님 천천히 잠잠히 사랑하는 사랑을 원하세요?

 

제 아내 사랑을 보면 천천히 흐르는 사랑 같아요. 주로 둘이서 밥을 먹는데 서로 별말이 없어요. 그러다 한마디 뚝, 오늘 정현 이는 몇 시에 오나? 그러면 몇 시에 오는데요, 대답하고 또 조용히 밥을 먹습니다. 이게 무슨 매력이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소화가 잘 안되다 하면 무를 사다 무밥을 하고, 양배추가 소화를 잘 되게 한다니까 양배추를 대처서 식탁을 올리고…… 이게 천천히 사랑하는 사랑 아닙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을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세요? 잠잠히 기다려주는 사랑입니까? 아니면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같은 사랑입니까?

 

여러분 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자각을 하면 부부관계에도 자녀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히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극적으로 날 위해주는 것이 없지만 한 결 같이 그 자리에서 잠잠히 사랑해주는 배우자가 참 소중하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가정이 회복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의 나오는 이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아 가지고 나는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의지할거야, 나는 하나님 보다 점쟁이를 의지할 거야 그럴 때에도 이사야는 한 결 같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저는 이사야 9:6절에서 한 포인트를 발견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과거형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700년 후에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을 하면서 어떻게 낳고라고 과거형을 사용하느냐 말입니다. 이런 표현을 문법적으로 예언적 완료라고 합니다. 이 예언적 완료는 절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이루어 질것을 강조할 때 예언적 완료를 사용합니다.

이사야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면서 과거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그게 우리 삶에 얼마나 놀라운 영향을 미치는지 아십니까? 그 놀라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뭔 줄 아세요? 감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지선 자매 어머니의 감사

대학생 시설 도서관 같다오나 음주운전 차와 부딪혀 차에 화재가 발생하는 온 몸에 회상을 입은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무려 7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여러 차례 수술을 하였습니다. 눈썹은 다 사라지고, 얼굴을 엉망이 되어버렸고, 손가락 10마디 중에 8마디를 잘라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고를 당한 본인도 힘들겠지만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엄마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하기로 했답니다.

제일 먼저 찾았던 감사제목이 이겁니다. 온 몸이 화성을 입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발은 화상을 입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이 사랑하는 딸의 발을 어루만지며, 발을 씻기면서 하루 종일 감사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 감사는 손가락 8마디가 절단된 가슴 아픈 상황이지만 엄지가 남아 있더랍니다. 그날은 엄지손가락을 너무 너무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엄지를 남겨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버터 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뭘 감사했는지 아십니까? 눈썹은 망가졌지만 눈이 살아있더랍니다. 우리 딸이 운이 살아있어서 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내 표정을 읽을 수 있고 그것을 붙들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분이십니다.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변함없이 한 결 같이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여러분의 삶에 감사가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스바냐 3:17절 찬양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