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2오이코스 모임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 행 10:1~16
지난 주일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행복이 넘치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서로를 섬기는 사역의 분배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로 구원 얻는 성도가 더해지는 교회공동체를 꿈꾸어 보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교회를 꿈꾸고 이런 교회로 회복을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런 교회를 꿈꾸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런 교회를 세우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통해 21세기 신약교회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중, 가장 중요한 장이 저는 사도행전 10장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0장은 그동안 구원은 유대인에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구원이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이방인으로 흘러간 첫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10: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는 말씀에 순종과 베드로가 환상 중에 부정한 짐승을 잡아 먹으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방인 고넬료 집에 청함을 받고 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왜 일까요?
1. 자기의 신념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그 이유가 뭐입니까? 바로 자기 신념입니다. 구원은 유대인만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베드로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반응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신념은 어디까지나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누가 들어도 좋다 합당하다고 칭찬해 주는 신념이 있다 하지라도 신념은 신념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는 것들, 심지어 자녀들에게까지 전수 하면서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념의 사람은 나를 믿고 내 생각을 신뢰합니다. 교회생활은 이런 모습이어야지,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지,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하고, 구제는 이렇게 하고, 선교는 이렇게 해야 해....자기 생각을 믿고 신뢰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가 믿고 신뢰하는 것이 신념인지 신앙인지를 돌아보셔야 합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이란? 자기의 신념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으로 바꾸어가는 작업입니다.
신념이 나를 지배할 때 치명적 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여! 그걸 수 없나이다 로 반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신념과 신앙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념을 넘어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요나도 마찬 가지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의도를 모르니 불순종의 길로 가는 것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마음을 모르니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 좋고, 우리는 죽어라 고생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분명히 뭔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유익보다 내 유익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유익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라 할 수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로 “부르심”입니다.
너 이거 한번 해봐, 너 이거 한번 해 볼래....그럴 때 절대로 “노” 하지 마십시오. 이런 저런 핑계되지 마십시오. 그때 “노”하면 하나님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때 네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하라하시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할 때 그 때 하나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하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내 것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베드로 보세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하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제가 누구입니까? 이방인들과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이방인이게 가라하십니까?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자만심, 기득권이 내려지지 않은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얼마나 많은 핑계를 됩니까? 나는 입술이 뻣뻣하다. 나는 혀가 둔하다, 나는 말을 못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핑계는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도리어 방해만 됩니다. 이런 핑계와 이유가 내려져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일로 부르실 때 내려놓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가족일 것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걸리고, 아내가 걸리고, 자녀가 걸립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부모님이 걸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때 이 자세가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 내 아내(남편)는 더 이상 내 아내(남편)가 아닙니다. 아내를 하나님께 내어 내어드립니다” 이런 자세입니다. “하나님 내 자녀는 더 이상 내 자녀가 아닙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내어 내어드립니다” 자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제게 그 영혼을 섬기라고 붙여 주신 것 제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 하느라고 아이를 챙길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그 사람을 챙길 테니까 하나님께서 제 아이를 좀 키워 주십시오. 이 자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만약 하나님께서 네가 알아서 키워봐 하신다면 잘 키울 자신 있으십니까? 자녀들을 매뉴얼대로 키운다고 그렇게 잘 크지 않습니다. 아이는 럭비공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키워주시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자녀를 우상의 자리에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아이를 키워 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세
1)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모든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부르신 일에 두겠다는 자세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일을 잘 감당해 내고 싶은 열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정만 가지고 안 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면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말은 나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이 부르신 일에 두겠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겠습니다 의 자세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말은 다들 잘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찬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과 삶이 다르다는 겁니다. 말을 못하면 밉지는 않지...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데 삶을 보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 주겠습니다 의 자세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10% 말하고 90%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 90% 말하고 10% 겨우 삶으로 보여주니 욕을 먹는 겁니다.
3)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정말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자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로 부르심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아낌없이 사랑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붙이시면 먼저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음 까지....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은 섬김과 기도인데 그 섬김과 기도 안에는 희생이 들어가야지 되더라고요. 그런데 희생이 뭔가? 희생은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희생입니다.
예) 돈 많은 사람이 음식을 많이 차려서 섬기잖아요. 그걸 와서 먹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희생했다는 생각 별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돈 많으니 자기들 밥 먹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놨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돈이 없는 사람이 돈을 써서 섬기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봐 주더라고요. 정말 건강이 없는 사람이 건강을 가지고 섬겨주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봐 주더라고요.
내가 없는 것을 가지고 섬길 때 그것이 희생이라고 받아들여지고 희생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감동으로 받아들여지고, 감동이 될 때 그게 리더십이 생기고 이러는 거다 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희생이 있어야 하나? 시간과 물질(돈)
5. 이 때부터 열매가 맺혀지지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애기하는 열매는 두 가지로 사역의 열매, 성품의 열매입니다.
1) 사역의 열매
개인, 가정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열매
기도응답의 열매
영혼을 살리는 열매
2) 성품의 열매
우리가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화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그런데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애들에게 모범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하다보면 내가 변합니다.
이런 인생이 어렵지 않습니다. 많은 희생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에 한번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할 때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예스라고 반응하면 나는 전혀 그런 삶을 살 거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삶을 살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베드로는 이 삶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잘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근거가 행10: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말씀입니다. 삼세번 하면 생각나는 것 있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죄책감에 빠져 다시 갈릴리 호수로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였지만 주님은 사명을 잃고 깊은 절망의 골짜기에서 방황하는 이런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갈릴리 호수로 찾아오셔서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주님,
이방인들은 구원 받을 수 없다, 구원받아서는 안 되다는 자기 신념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 그래서 일어나 잡아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부인했던 베드로가 똑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될 때에 그 날 밤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의 온유하신 음성이 떠오르지 않았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베드로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나눔과 기도
(1)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세 중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
(1) 말씀을 통해 내 삶에 적용할 한 가지를 정해서 나눠봅시다. (2) 감사한 일과 기도제목을 나눕시다. |
합심 기도 위의 기도제목으로 합심(통성기도, 짝기도)해서 기도합니다.
찬양과 헌금 우물가에 여인처럼, 임재 후렴
마무리 기도 주님의 기도 혹은 담당자 대표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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