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3 오이코스 모임지
말씀 나눔 : 바울은 자신을 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 소개하였을까요?
삶의 나눔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있는가? 만약 아니라면 그 이유는?
03.예수 그리스도의 종 / 롬1:1-2
오늘은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 1절에 바울이 자신을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대해 살펴보고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서두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종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1. 먼저 “종”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종”이라는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보면 “둘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사실 종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노예’로 번역해야 정확한 뉘앙스가 풍겨지는 단어입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인격이 말살되고 짐승과 같은 취급을 당하는 것이 그 당시 둘로스, 노예였습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인구의 절반인 6,000만 명이 노예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노예를 빗대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노예는 당나귀와 똑 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이런 짐승취급을 받는 것이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당이 그렇게 끔찍하게 사용되던 둘로스라는 단어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 이게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한 것 아닙니까?
2. 그렇다면 바울은 언제부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는가?
바울은 이러한 노예와 자기의 모습이 오버랩 된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나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나를 사셨구나, 아! 그러니 이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구나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고전6:19-20, 7:23). 그럼 그때가 언제 입니까? 비로 자기가 그렇게 공부한 율법에서 가리키고 있는 죄인이, 세리요, 창기가 아닌 바로 나인 것을 표면적이 아니라 이면적으로 알고, 이런 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려 내 죄의 값을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 때 그 때 비로소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의미?
많은 분들이 1절에 나오는 바울의 종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구약 출21장의 귀 뚫린 종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출21:5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출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그런데 이처럼 6년을 종살이하고 이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7년이 되었는데 어떤 노예들
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제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지만 이 자유를 포기하고 주인에게 반납하고 싶다는 겁니다. 자유를 반납하고 나는 계속 주인의 노예가 되겠다고 청원하는 노예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 노예가 자유를 포기하고 평생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것의 증표로 송곳으로 그 노예의 귀를 뚫게 됨으로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종이 얼마나 주인에 대한 은혜와 사랑의 감격이 컸으면 그 자유를 자기 스스로 반납하고 평생 주인의 노예로 살겠다고 결단을 했겠습니까?
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데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감격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그 주인이 자기에게 따뜻하게 사랑으로 잘 대해주었으면 자발적으로 노예 생활을 계속하겠노라고 그렇게 귀 뚫린 종의 자리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바울이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이 표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눈물이 있는 겁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에게는 자기의 그 화려한 스펙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하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입은 종이다. 내가 그 분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그 감격이 바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5:8절에 바울의 이 감격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사라진 겁니다. 모양은 있는데 감격이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겁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토미 테니가 쓴 종의 마음에 나오는 한 표현 “섬김의 정신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불붙는 것이다” 여러분 이론과 논리를 배워서 낮아지는 자리로 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 나 같은 것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눈물 이것이 자발적인 종이 되어 낮은 자리로 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2) 귀 뚫린 종의 개념이 중요한 것은 소속감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한 이 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소속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는 의지적 표현이 담겨있는 겁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는 말은 종은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인이 없는, 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이 말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소속의 문제는 영향의 문제입니다. 내가 어디에 영향을 받느냐가 내 소속입니다. 나 분명 크리스천인데, 교회 다니는데 그런데 실제 영향을 받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관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치명적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겁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노리는 타깃은 우리로 하여금 죄 한번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되고 주님의 영향을 받는 다면 그 증거가 뭐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말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두 이름이 있습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용서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주어진 것입니다. 의롭다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반드시 의롭게 살게 하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살인강도를 저지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시다. 그가 사면을 받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큰 은혜이겠지요. 그런데 그의 인격이나 삶이 변화되지 않아 다시 죄를 지었다면 죄 사함을 잘해 준 것입니까?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죄 사함만 주는 것이라면 얼마나 불완전한 구원이겠습니까? 복음은 죄 사함만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의미입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300년을 지하 무덤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교리를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무너집니까? 살아계신 주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300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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