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요 4:13-24
여러분! 혹 “캐스티 어웨이”이란 영화를 보신분이 계십니까? 빠른 배송과 책임배송을 모토로 하는 국제 물류회사인 페덱스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요, 그 영화를 보면 주인공 ‘척’이 라는 직원이 하루는 화물수송기를 타고가다 불의의 사고로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도에도 나타나있지 않은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됩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바다에서 생선을 잡고, 과일로 배를 채우지만 그를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과 고독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파도에 떠 밀려온 배구공을 발견하고 그 배구공에 얼굴을 그려 ‘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배구공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로움을 달래 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하나 느낀 것은,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바로 외로움입니다. 고독입니다. 목마름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모습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수가성 여인은 자기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다섯 명의 남편을 갈아치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살지만 여전히 목마름은 해갈이 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인생의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늘 목마름으로 남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아담을 보세요! 결국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의 모든 결핍이 찾아오게 됩니다. 외로움, 고독감, 갈등, 미움, 분노, 깨어진 관계들,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 것들입니까?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겪는 목마름은 이 땅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이 목마름은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길을 열어 놓으시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자들 찾고 계십니다. 아니! 길을 열어놓았으면 됐지, 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부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에덴동산의 그 풍요와 기쁨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싶어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찾기는 찾는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는다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냐? 4:23절에 그 해답이 있는데 ‘영과 진리’로 예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무너진 예배를 다시 수축하는 것입니다.
1. 무너진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무너진 예배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릇된 예배입니다. 아니! 예배면 예배지 그릇된 예배가 다 있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가 뭡니까? 예배는 헬) 프로스퀴네오"란느 단어를 쓰고 있는데, 영어, worship 자기가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중심에 올려놓는 행위를 ‘워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 인생에 돈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인생의 중심에 돈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돈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에 성공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인생의 중심에 성공을 올려놓으면 그 사람은 성공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딱 2종류입니다. 자기 인생의 중심에 하나님을 올려놓은 사람과 자기 인생의 중심에 자신을 올려놓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하나님 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중심에 올려놓은 사람의 특징 모든 것이 ‘여호와로 인하여’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요, 갈멜산의 엘리야의 제사입니다.
[사41:16]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욜2:23]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보세요! 삶의 전 영역에서, 신앙의 전 영역에서 여호와 인하여, 여호와 인하여, 여호와 인하여 즐거워하며, 여호와 인하여 기뻐합니다. 여호와 인하여 감사합니다. 예배하는 것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도하는 것도 여호와로 인하여, 찬양을 드리는 것도 여호와로 인하여 찬양합니다. 이러한 자가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하나님을 올려둔 자의 삶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중심에 올려놓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자기로 인하여”입니다. 예배하는 것도,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도, 헌신하는 것도, 구제하는 것도 모든 것이 자기로 인하여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누구로 인하여서 인가’ 에서 판가름 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인가, 자기로 인하여서 인가, 자기로 인하여 - 가인의 제사,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드린 제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심각한 문제는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성도들의 예배도 여호와로 안하여 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예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유익, 인정받는 것, 칭찬, 평안, 만족, 문제해결, 이 땅에서 잘되는 것 이러한 것을 위해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위한 것이 무서운 것은 출20:4절에 보면 “나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말씀처럼 나를 위아여 만든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해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풍요를 위하여 만든 신이 바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원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치 있는 자리에 올려드리고 그분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뢰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께 찬양하는 자로, 예배하는 자로 지으신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서는 것이 우리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는 시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세밀하게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누구로 인하여 예배하고 있는지... 이제는 여호와로 인하여 예배를 드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예배로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수축되기를 바랍니다.
2. 영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요 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여기 “할지니라” 는 헬라어 “데이”라는 말을 번역한 말인데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영어 성경들은 그 단어를 “mus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본문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세워진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원래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짐승취급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의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요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주님은 그리심 산도, 시온산도 아니라고 합니다.
왜 일까요? 그리심 산의 예배는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유익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시온 산의 예배는 짐승을 잡는 형식만 있고, 의식만 있는 예배요, 이러한 종교 행위를 의지해서 자기 의만을 드러내는 예배라는 겁니다. 이런 예배다 다 쓸모없는 것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무산 말입니까? 신약의 예배는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우리 기분이나 감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예배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첫째,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성령의 인도, 성령의 영향,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에배를 드리면서 무엇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생각, 환경, 감정, 느낌,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은 첫 번 째 증거가 뭐냐?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증거가 무어시냐? 입술이 언어가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우리입술이, 언어가 성령의 통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무슨 말을 하였는가? 행2: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우리의 찬양과 기도가 내 기분 따라서 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통제를 받고 찬양합니까?
우리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늘 성령 하나님을 초청하고, 성령님이 예배 가운데 함께하심을 믿고, 그 분께 민감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다보니 장례예배, 추도예배. 돌예배, 회갑예배, 결혼예배를 섬길 기회가 더러 있습니다. 장례예배, 추도예배. 돌예배, 회갑예배, 결혼예배 특징은 많은 사람들을 초정한다는 겁니다. 목사도 초대하고, 장로님도 초대하고, 권사님, 집사님, 친척들, 친구들 다 초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장 중요한 성령 하나님은 초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마다 성령 하나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입술로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 자신의 말로 고백해 보십시오. 강력한 표현,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합니다. 박종균 헨폰 내 심장,
때로는 우리 몸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도 몸으로 표현해 보십시오. 표현하기를 어색해 하는 교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 한 지체는 손을 들고 찬양하는데 무려 7년이 걸렸다고 고백한 것을 직접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손뼉을 쳐야만, 손을 들고 찬양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든지 경건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나 사실은 외적인 표현은 우리의 중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징입니다. 이것을 body language(보디랭귀지라) 신체 언어라 부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고, 몸으로 표현하는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예배는 더 풍성해 질 것입니다.
둘째, 우리 기분이나 감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으로 예배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몸과 마음이 아니라 영으로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몸으로 마음으로 예배해야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해야 합니다.
찬양 / 내 영이 주를 찬양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예배드릴 기분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특히 예배로 오는 도중에 부부싸움을 하면 더더욱 예배드릴 기분은 아닙니다. 몸은 아프고 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마음이 괴로워 예배도 신앙생활도 다 귀찮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기분이나 감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감정은 세상 일로 상하였을지라도 우리 중생한 영은 다릅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 반응하고 싶어 합니다. 환경 여건을 관계치 않고, 언제나 주님은 찬양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려고 힘쓰면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영으로 예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예배 할 때마다 찬송할 때 마다 느낌과 감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때로 마음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힘들고 짜증나고, 지칠 때가 더 많습니다. 마귀는 우리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데는 선수입니다. 기분은 하루에도 12번 바뀝니다. 그래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면 마음이 회복됩니다. 몸도 치유됩니다. 문제가 해결 받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임합니다. 회개가 터지고 감사가 터지고 사랑이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질병이 고침 받고, 시험과 문제가 해결 받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영으로 예배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만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만 받으시려고 예배자를 찾는 분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하여 생명의 풍성을 주시려고 찾으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3. 진리로 예배하라, 십자가의 감격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익숙해졌지만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인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예배를 노래로 비유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 예배가 노래라면 영은 멜로디이고 진리는 가사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불러지려면 멜로디와 가사가 다 필요합니다. 만약 노래의 가사만 들었다면 아직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멜로디만 들었다 하더라도 역시 노래를 들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배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능력 있는 노래와 같습니다. 그 노래에는 멜로디가 있고 가사가 있습니다. 멜로디는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가사는 십자가 복음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성령의 임재와 십자가 복음을 의지하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하라” 그 진리의 핵심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 귀에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도대체, 너는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너는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가? 물으면 대답할 말이 있습니까? 우리에겐 대답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믿기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이 아닙니다. 감격입니다.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 14:6에서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이 번주는 고간주간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먼저 우리는 주님 왜 죽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우리의 구원을 위해 2)예배드릴 때 마다 십자가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도록 하기 위해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냥 얼마나 아프셨나 생각하며 눈물 몇방을 흘리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을 이루는 삶입니다. 먼저 구원에 감사 감격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십자가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명확히 알지 못할 때, 예배는 사람에게 끌려 나오는 예배요, 그저 예배당에 참석하는 예배요, 분위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나면 예배는 나의 예배요, 예배는 감격이요. 예배는 기쁨이요, 예배는 갈망이요, 예배는 축복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 그는 이미 예배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목마른 인생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축복, 유익) 자기 유익만을 위한 예배, 형적적인 예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임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예배, 형적뿐인 예배에서 돌이켜야합니다. 진정 여호와로 인하여 예배하여야 합니다. 또한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성령의 이끄심과 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그 십자가의 감격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되면 이런 찬양을 고백하게 됩니다. “어린양 찬양하리, 내 평생 그 하나로 충분해요, 어린양 찬양하리 내가 주의 임재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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