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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예배회복

01.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왕상 18:30~40)

by 오용주목사 2016. 12. 6.

01.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왕상 18:30~40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3주간에 걸쳐 말씀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말씀에 반응하는 삶, 말씀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 말씀 따라 사는 삶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예배의 삶은 밀접한 관계기 때문입니다.

 

12:1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버지의 떠나 내가 네게 지지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시죠?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12:7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러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죠.

12:7 하반절에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죠.

8절에서도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신앙의 사이클입니다. 말씀 -> 순종 -> 만남 -> 예배

 

오늘도 이 사이클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반응하며 믿음으로 좇아갑니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가보면 말씀 끝에서 누굴 만나게 되느냐?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결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반응하는 삶을 사는 성도는 결국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단한 성공자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자로 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우리춘천이레교회 모든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기본이 뭐냐? 말씀, 순종, 만남,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려면 예배가 뭔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예배가 뭔지 몰라 예배에 실패한 교우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 아십니까?

 

1.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영어로 worship인데, worship은 가치를 상징하는 worth(워스), 신분을 상징하는 ship()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이렇게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최상의 가치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이다.

 

옛날 중국영화를 보면 황제 앞에 신하들이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그것이 뭡니까? 최상의 가치를 받기에 합당한 황제 앞에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 납작 엎드리는 것 아닙니까?

예배 또한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예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가치를 인식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식 :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

의식 : 염두에 두거나 생각하다

 

14장에서 하나님께서 홍해 앞에선 모세에게 말씀하신 명령에 무엇입니까? 14: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이 명령에 모세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14: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모세가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나요? 14:21 중반절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14: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결과 출15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본 자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알아)야 할 하나님

 

1) 창조주 하나님

 

요한계시록 4, 5장은 하늘나라의 예배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4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면입니다.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합당하오니 : 가치 있는

 

하늘나라의 예배의 첫 장면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창조주 하나님, 이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만큼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창조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방대한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에 구체화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하게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만들었구나정도로 축소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창조주 하나님, 하면 어떤 의미를 생각합니까? 천지를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 분명히 맞는 의미지만 뭔가 부족함을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창조자 하면 먼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1) 나는 하나님의 의해 만들어진 존재구나 라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의 탈선이 심각한데 그 주범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려서 그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노래는 하는데, 내가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어쩌다보니, 우연히, 실수로 태어난 것 갔기도 하고, 그래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들이 탈선의 주범으로 작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자 하나님이시구나를 알 때 아! 나는 어쩌다 실수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우연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삶에서 경험된 수많은 기쁨의 순간들이나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들이 우연히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감사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나와 관계가 있고 의미가 있고 나를 위해 창조된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자연이 나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나를 위해 만드신 자연을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그런데 오늘 누리기는커녕 꽉 사로잡혀있습니다. 이사를 하나해도 손 없는 날에 해야 한다고 이사 하나도 자기 마음대할 수 있나, 결혼날짜도 이달은 뭐가 끼어서 안 되고, 저 날은 어떻고, 세상에 애들이 태어나는 것도 어떤 날은 안 좋다고 그 날을 피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한다고 안합니까, 세상에 이 모든 것을 정복 하고 누리며 살라고 했는데 꽉 사로잡혀 있으니 무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3)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의해 만들어지고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에 우리는 살아갈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요즘 자살이라는 이슈가 사회적으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실의 이면에는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울증은 더 이상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과거에 자신을 묶어 놓습니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상황, 자신을 부정적으로 만들었던 과거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를 만드신 이가 바라는 삶, 내가 서 있어야 할 그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우울증은 삶의 목적을 향해 달려갈 힘을 끊어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창조된 것을 알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하나님 섭리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과, 또 나를 위해 자년을 주신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되새기면서 내가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힘을 내자 결심합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습니다. 때론 손을 높이 들고, 나의 몸을 숙여 경외심을 표합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는 우리를 방치하고 내버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열방의 통치자로 지금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구원자 예수님

 

5: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성자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는 자가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십자가 하면 먼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람도 자기가 희생할 때나, 투자할 때는 뭔가 기대치가 있거나, 가능성이 보일 때 하지 않습니까? 아무런 기대감이 없는데 누가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겠습니까?

 

그런데 저를 돌아보니 나를 살려놔 봤자 아무런 도움도 될 것 같지 않는데 나를 살리기 위해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 그래서 제가 했던 말,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 중심에서 나온 고백이 뭔 줄 아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주님이 죽으신 이 사건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 들이 때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게 되더라구요.

 

다시 한 번 더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늘 묵상하십시오. 누구에게 들었던 속상한 말 그런 영양가 없는 말들을 묵상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늘 바라보고, 그 십자가를 늘 마음에 새기고, 그 십자가를 늘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예배가 더 회복될 것입니다.

 

3)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 행하시는 하나님

춘천 확인 정연호 성도님 어머니 돌아가신 것을 통해 만나고 듣게 하심

 

3. 예배의 핵심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 임재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엘리야가 드린 예배에 불이 임함으로 제물을 다 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수 없이 많은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엘리야의 갈멜산에서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의 예배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왕상 18장의 배경은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나 바알신을 섬기게 됩니다. 바알신은 비를 주관하는 풍요의 신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비를 내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신은 바알이라고 믿고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한명과의 영적 대결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신이 참 신이냐?’ 하는 대결입니다.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 신이다. 이것이 이 대결의 핵심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850명이 하루 종일 발광하며 기도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기도하자 제단에 불이 임하였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엘리야의 제단에 불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했던 일이 있습니다. 제단을 수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상 18:30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당시 오랫동안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제단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열두 지파의 수를 따라 돌 열두 개로 제단을 수축한 다음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그 위에 12통의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이 시대에 무너진 제단을 수축한 다음에 예배를 드리면서 불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예배가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 하는 예배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불의 응답이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고, 회개의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고, 기쁨과 감사의 회복이 있으면 불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에 불이 임하지 않는다면 제단이 무너지지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가 지겹지는 않습니까? 어떤 분은 예배 때 가장 은혜 받는 것은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이 말을 들을 때 가장 은혜롭다고 합니다. 예배 마치는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시계를 보게 되고, 찬양을 반복하면 신경이 쓰인다면 예배가 무너져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지겨운 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예배를 지겨워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일까요? 우리가 아무렇게나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받으시는 것일까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4:3-8).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 드리다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10:1-2). 사울 왕은 제사드릴 소와 양을 끌고 왔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예배가 진짜 예배인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이런 예배가 과연 가능할까요? 한 시간 예배에 익숙해 저버린 것이 한국교회인데,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 복음의 메시지가 점점 사라져가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가 대세인 현실에서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현실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셨던 엘리야 시대는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우리 보다 더 암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셨을 때만 해도, 역사상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자에게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대가 영적으로 매우 암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로 역사하기 원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제단이 수축되기만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예배를 제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예배부터 바로 드립시다.

4. 우리의 예배 모습

 

1) 관객인가 배우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극장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유한다면, 누가 배우고 누가 관객입니까? 목사는 배우이고, 자신은 관객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은 구경꾼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은 엉뚱한 생각을 해도, 졸아도 연극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며, 나는 배우라고 생각하는 교인은 예배자입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졸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연극을 망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위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기울입니다.

 

제가 왜 몇몇 안 되는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면서 그것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합심기도를 하고, 봉헌을 맡기고. 성경봉독을 하게 하는지 그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오늘 예배 때 관객이 아니고 배우로, 예배자로 예배한다면 우리의 마음 자세가 어떻겠습니까?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참여할 때는 평소와 다른 옷을 입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할 때도 옷을 챙겨 입습니다. 왜입니까? 그날은 평일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할 때, 특별한 모임에 참석할 때, 특별한 사람을 만날 때 입을 옷을 구분합니다.

 

그렇다면 예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예배는 특별한 일이나 모임입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십니까? 정말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예배가 분명 지금보다는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예배 본질이 중요하지 의식이 중요합니까? 물론 본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의식에 담겨있어야 합니다. 의식에 담겨 있지 않는 본질은 더 이상 본질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본질이 없는 의식 때문에 의식이 욕을 먹지만 의식은 본질을 본질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2) 예배의 동기

 

또한 예배하러 나온 동기가 또한 우리 마음에 제단이 무너졌는지 아닌지를 드러냅니다.

 

앞에서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동기가 은혜로운 설교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 섬길 때 특히 화요집회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이런 전화가 자주옵니다. 오늘 설교 누가 하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리는 데 설교 누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온 것은 아닙니다.

 

) 결혼식에 참석할 때 신랑, 신부를 만나서 축하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지 주례자 만나기 위해 가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신랑, 신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주례자를 만나기 위해 갔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 것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금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남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로 은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헌금에 담아 드리는 것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설교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의 동기, 내 육신을 의지하기 위한 예배라면 동기가 잘 못된 것입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예배의 동기라면 그것도 잘 못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수축되기를 원하십니다. 왜 일까요? 하나님께서 임재로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곳에 하나님을 나타내기를 원해서입니다.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마음의 고백이 입술의 고백으로 표현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춘천이레교회에 새롭게 참석하는 지체들이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무너진 예배가 다시 수축되어야합니다. 관객이 아닌 예배자로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자로 예배한다면 우리의 마음 자세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예배는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마음껏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금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바로 드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예배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 한해 우리가 말씀에 반응하는 성도가 됩시다. 말씀위에 기꺼이 자신을 싣는 성도가 됩시다. 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 예배를 바로 드립시다. 그리고 함께 예배하는 자로 섭시다. 바른 예배가 삶을 변화시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