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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성령의 기름부음

제4장 오늘의 기름부음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제4장 오늘의 기름부음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가로되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하니라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13)

어제의 기름부음, 오늘의 기름부음, 내일의 기름부음, 혹은 어제의 사람, 오늘의 사람, 내일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기름부음 시리즈 설교는 그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한 메시지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사울이 나옵니다. 그는 어제의 기름부음과 어제의 사람을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둘째, 사무엘이 나옵니다. 그는 오늘의 기름부음과 오늘의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셋째,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은 내일의 기름부음과 내일의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 제4장 오늘의 기름부음
오늘의 사람, 혹은 오늘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무엘은 오늘의 사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사람으로서 사무엘에게 나타난 중요한 면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들을 한 마디로 줄여 언급하자면 오늘의 기름부음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어제의 기름부음과 결별하고 내일의 사람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울은 여전히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놀라운 사역들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야말로 “이 시대의 사람이다”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무엘은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이미 떠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신임이 이미 떠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목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제 사울과 결별해야할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령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경우에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속히 오질 않아 우리가 모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다고 해서, 사울이 바로 왕의 권좌에서 물러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 후로도 18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셨던 왕으로서의 사울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신임을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점입니다. 사울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훗날에야 자기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난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기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내가 그를 위해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삼상 16:1上)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울과 결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어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삼상 16:1下)

자, 그렇다면 오늘의 사람 곧 오늘의 기름부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옛 기름부음과 결별하고 내일의 기름부음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과 결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을 왕으로 세운 자가 사무엘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자도 사무엘입니다. 사울에게 기름부음 자도 사무엘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이라고 소개한 자도 사무엘입니다. 백성들 앞에서 사울을 세움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울을 따르도록 격려한 자도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사무엘이 사울의 왕국에 매우 깊이 관련되어 있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사무엘에게 사울과 결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떠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내용 같습니다만, 오늘의 기름부음이 있는 자 곧 오늘의 사람은 지금도 이 시대에서 어제의 기름부음과 결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기름부음이 어제의 기름부음과 결별하는데 있어서 스티그마(stigma)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름부음을 따라 갈 때, 이 스티그마(stigma)는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스티그마(stigma)

스티그마(stigma)란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 그대로 스티그마(ςτιγμα)라는 말입니다. 기름부음에는 stigma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오늘의 기름부음이 어제의 기름부음과 결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뭐라고 반응을 보였습니까?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사울 왕이 알았으면 당연히 사무엘을 죽였을 것입니다. 왕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감히 누구에게 왕이 되라고 기름을 붓는단  말입니까? 역적으로 삼족이 참수를 당할 일입니다. 한참 성공적으로 잘 나가고 있는 사울 왕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울 왕은 이제 끝났다”  “이제 새 왕을 다시 세워야만 한다.”라고 한다면 어느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이것이 stigma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1절-13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바로 이부분과 관련하여 정확하게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히 13:11)

여기서 「영문 밖」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outside the camp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거하던 곳을 우리말로 ‘장막’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장막 밖에서 짐승의 몸이 불에 태워졌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도 그러하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2)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짐승들이 이스라엘 진 밖에서 희생 제물로 태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후에 13절이 나옵니다.

“그런즉 따라서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려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분 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면서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양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에 관한 얘기를 익히 들었습니다. 그 찬양 또한 많이 들었습니다.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왜 영문 밖으로 나가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양들은 이스라엘의 장막 밖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문 밖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문 밖에서 돌아가심으로 그 모든 제사들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친히 그 예언들을 성취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예수님을 만나려면 영문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영문 밖”이란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하나는 ‘영문 밖의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영문이란 장막(tent)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제도화된 종교’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 대변되어지는 그당시 ‘제도화된 종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도화된 종교란 하나님께서 과거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그 역사의 모양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고착되어서 제도화되어버린, 다시 말하면 어제의 기름부음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어제의 기름부음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도 제도화된 종교를 통해서는 한 시대에 부흥으로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틴 루터 시대건, 요한 웨슬레 시대건, 하나님은 영문 밖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어제의 기름부음 가운데에서는 역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제의 기름부음을 떠나, 새롭게 되어,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 구절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가되 능욕을 지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어제의 기름부음을 떠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나아가려면 반드시 능욕을 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살펴볼 스티그마(stigma)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제가 여러 다른 영어 성경들을 찾아보다가 뉴 잉글리쉬 바이블(New English Bible)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번역본에는 우리말의 ‘능욕’이라는 단어를 “스티그마를 지고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문 밖의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려면 반드시 스티그마(stigma)를 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기름부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신임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여전히 오늘날도 하나님의 역사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에게서 이미 하나님의 신임이 떠났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압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이 어제의 기름부음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라고 한다면, 내일의 기름부음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름부음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을 따라 갈 수 있는 담대함이 요구되어 집니다.

그럼 스티그마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름부음은 바로 이 스티그마를 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내가 내 몸에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흔적’이 바로 스티그마(stigma)입니다. ‘흔적’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와 헬라어 단어가 스티그마 라는 단어입니다. 어느 성경에는 ‘흔적’을 영어로 ‘mark’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말도 우리말의 흔적과 비슷한 뜻입니다. “내가 예수의 스티그마를 내 몸에 지닌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스티그마(stigma)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스티죠(ςτιζω)라는 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스티죠(ςτιζω)라는 말은 “찌르다 혹은 문신”의 의미도 되고, 또 다른 의미로는 날카로운 도구로 몸에 mark(표시)를 내는 것입니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는 야생마를 잡으면 자기 소유인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뜨겁게 달군 쇠도장을 말의 신체 일부분에 찍었는데, 이것을 stigma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신은 주로 노예들이나 또는 도망가다가 잡힌 경우와 다른 사람의 물건이나 돈을 훔친 경우처럼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찍었습니다. 그러므로 stigma란 한마디로 수치나 오욕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의 이 흔적을 내 몸에 가졌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스티그마는 ‘부끄러움’ 혹은 ‘수치의 한 표시’로 볼 수 있는데, 헬라어에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스칸달론(ςκανδαλον)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스캔들이란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 “복음은 거치는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거치는 것”이란 말이 바로 이 스칸달론이란 말입니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것,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 이런 것들이 스칸달론인데, 이 단어의 의미와 어원이 스티그마와 같습니다.

자세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가시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치는 것,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스티그마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성부 하나님의 스티그마는 하나님의 주권 그 자체가 스티그마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부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시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가시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자신의 영역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신 바대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요구하실 수 있고, 우리의 삶 속에 주권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스티그마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스티그마

성자 하나님의 스티그마는 그분이 주신 은혜자체가 가시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죽음만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그 진리 자체가 스티그마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하느냐? 왜 다른 종교는 다 틀리다고 하느냐 그래서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건 그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많은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용할 수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에는 거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거치는 것, 곧 스티그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서는 믿음뿐입니다. 인간적인 어떠한 의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순간순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거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그것 때문에 율법주의와 이단들이 나옵니다.

성령 하나님의 스티그마

성령님의 스티그마는 그분의 임재 자체가 스티그마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령님의 임재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고, 넘어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부가 가지고 있는 스티그마, 성자가 가지고 있는 스티그마, 성령이 가지고 있는 스티그마가 서로 다를지 몰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고 그것이 기분 나빠서 화를 낸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도, 예수님을 향해서도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삼위가 하나이듯 스티그마 역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성령이 임재 하신다 하실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왜냐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스티그마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티그마에 가시가 있는 목적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티그마에는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티그마에 가시가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스티그마의 목적은 바로 우리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참으로 예리하게 보고 표현합니다. “Every generation has stigma.” 즉, “모든 세대는 그 세대의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어  “그 스티그마를 통해서, 그 가시를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이 테스트 될 것이다. 어제의 스티그마는 더 이상 오늘날의 스티그마가 아닐 수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제의 스티그마는 오늘은 더 이상 스티그마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한때, 우리나라의 오순절 교단을 통해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성령의 역사로 방언이 터질 때 한국의 대부분의 교단과 교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방언하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방언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상처를 입고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 어제의 스티그마는 더 이상 오늘의 스티그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날 방언한다고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또 다른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왜냐면 스티그마는 각 세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과 30절, 바리새인들의 예를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단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 묻혀있는 선지자들이 참된 선지자들이었음을 인정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는 톱으로 켜져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리세인들의 조상인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죽인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그 당시 제도화된 종교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스티그마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인 바리새인들은 이사야가 참다운 선지자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면 더 이상 이사야의 메시지는 바리새인이 살고 있던 시대에서는 스티그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처음 나타났을 때 엄청난 스티그마였으나 오늘날 더 이상 아닌 것처럼,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참선지자인 것을 이미 받아들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심지어 그들의 무덤까지 단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냐면, 지금 바리세인에게는 과거의 스티그마는 더 이상 스티그마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받아들이지만, 그 시대에 이사야보다 더 큰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렇게 함으로써 너희가 그 조상의 자손인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에 나타난 스티그마에는 안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이미 정착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는 그 스티그마를 달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떠한 자세를 취했던지 이제부터는 신중해져야 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만약에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래서 내가 바리새인이 되었다면, 나도 과연 그들처럼 되지는 않았을까?”  어떤 때 생각해보면 참 두렵습니다. 내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천만다행이지, 내가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도 그렇게 안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어떻게 했을까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드러내게 하시려고 스티그마를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각 세대에는 그 세대마다의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성도들의 중심이 테스트됩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히브리서 11장을 인용하면서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나 인도하심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전례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례가 없는 것,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메시지와 그 중심되는 내용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 이러한 것들은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포되고, 그것이 역사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5장 24절에 나옵니다. 노아도 역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6장 10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에녹과 노아는 시대와 사명은 달랐지만 똑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구약 시대나 신약시대나 영원히 변치 않을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그 시대마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하시면서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 가셨습니다. 성경은 “더이상 보이지 않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에녹의 얘기를 들었을 때, 자기도 하나님과 똑같이 동행하니까.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도 데려가실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에게는 배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에녹에게는 시키지 않으셨던 일입니다. 이것은 노아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노아에게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배도 작은 배가 아닙니다. 축구장만한 어마어마한 상상을 초월한 배를 지으라는 얘기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러한 사실을 이웃들과 나누었을 때, 노아를 비판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 미쳤구만, 아니, 그렇게 큰배를 쓸데없이 왜 지으라는 거야. 그런 전례가 어디 있어, 조상들에게 그렇게 얘기한 적이 한버닝나 있어, 전혀 그런 적이 없었는데, 왜 하필 노아 너에게만 그렇게 하라고 하시냐, 넌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어” 이렇게 얼마든지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말씀하신 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되, 그 시대마다 하나님과 동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인도하시고, 시키시는 일은 다 달랐습니다. 이것이 스티그마입니다.

그러므로 스티그마는 그대로 스티그마로 남아있도록 해야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따라서 계속 나아가야합니다. 알트  킨들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각 시대는 하나님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 가를 주시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한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따라가려면 스티그마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의 중심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이 이론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당장 나타납니다. 성도들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바로 나타날 것입니다. 적용한 바로 그 주간에 바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평가만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바보가 되어야합니다.

스티그마에 나타나는 가시들

그러면 스티그마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 것일까요? 주님을 따를 때,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스티그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일까요? 폴 케인 목사님께서는 스티그마를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다 하나를 더 추가해서 다섯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가 더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성령님의 움직이심을 따르는데 나타나는 스티그마들입니다.

1. 창피와 모욕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면서 창피와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찬양 팀들이 생기기 전에는 제가 집회 때마다 찬양을 인도했습니다. 찬양을 인도할 때,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찬양의 원칙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그때 불려지는 찬양은 바뀔 수 있고, 모양도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에 대한 이해와 가치와 그 모든 원칙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온 맘으로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님을 기뻐하는 그 마음으로 찬양을 드립니다. 그것이 원칙이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흔히 말하는 복음성가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은 직접화법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찬양을 드리면서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때로는 눈을 감고 온 마음을 다해서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면 행동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손을 들기도 하고 춤을 추며 찬양을 합니다. 외국 세미나에 참석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찬양을 드리기도 합니다. 찬양 도중에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뜁니다. 이건 애도 아니고 이렇게 찬양을 한다면 사람들이 볼 때 우습게 보여 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교회 같은 경우에 처음 이렇게 찬양을 인도하다 보면 사람들이 예배하러 왔다가 나갈 때 피식 웃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찬양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멸시와 모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져야 할 스티그마입니다. 왜 이러한 것들이 스티그마가 됩니까? 중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를 중요시 여깁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모양을 매우 중요시 여깁니다. 유독 우리나라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유교적인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체면과 체통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목사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똑같은 바리새인들에게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기 보다 너희가 너희 스스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구하기를 원했고, 너희가 스스로 서로 칭찬하기를 너희가 기뻐한다.”(요5:44)

만약에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체면이 구겨지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금방 돌아설 겁니다. 자기 체면이 상하는데 그렇게 할 리가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사람의 중심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따라 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영적이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창피와 모욕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사람은 스티그마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할 담대함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가시를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오해를 받음

오해를 받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이 침을 뱉으며 욕을 합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조롱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갈릴리에서부터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에게도,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져야하는지 설명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따르면서 져야할 스티그마 중에 하나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를 보십시오. 어느 날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너는 은총을 입은 자라, 너를 통해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다.” 그러자  놀란 마리아가 “저는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천사가 또 말하기를 “아니다. 성령을 통해서 네가 잉태하게 되리라.” 믿음은 모험이고 무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지요. 마리아는 이 일로 인해 파혼을 당할 처지에 놓였는데도 정혼자 요셉에게 아무런 변명도 못합니다. 오해를 사면서 까지 도저히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사생아를 낳았다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사람들의 오해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져야할 스티그마 중 하나입니다. 모양은 다를지 모르지만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려면 그런 일이 있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 같은 경우에는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을 했습니다. 오히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주인에게 그 반대로 완전히 나쁜 놈으로 몰렸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변명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요셉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해도 통하지도 않을 때였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을 따라가면서 져야할 스티그마 중의 하나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3.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기다리는 것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성공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할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순종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슈는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관건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명령하시기를 아합 왕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증명하라고 했습니다.(갈멜산에서 불을 내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임) 그런 다음에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과부 집에 가서 숨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성공적인  사역이 그의 중심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려면 이러한 자세(중심)가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 놀라운 성공적인 사역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과부 집에 숨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쉬울까요?

4. 때로는 무방비 상태가 되는 것

우리가 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어할 길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혹은 아까 말한 그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서처럼 말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때이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제가 1991년 말경에 시험에 빠졌는데, 진짜 방어할 틈을 안주셨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강의 다닐 때, 알게 된 한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 와서 사례비도 안받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와서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 보고 결정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처음이라 경험도 없고,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교회에 와서 열심히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자가 금식기도를 자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금식기도 자주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금식기도할 때 혼자 조용히 기도하면 좋은데, 꼭 성도들에게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5일 금식기도 떨어졌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금식기도가 끝난 뒤에도 기도가 끝났다고 성도들에게 또 다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 집에도 찾아갑니다. 그런데 금식기도를 5일 했으면, 5일은 보호식을 해야 되는데, 2. 3일도 안지나서 또 이번에는 “3일 금식 떨어졌다”고 다 전화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이 여자가 나중에는 뭐라고 하면서 다니냐면, 자기는 기도를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관한 일은 자기한테 말씀하시고, 목사님은 기도를 안해서 은혜가 없으니까 말씀을 안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이가 없는데도 제가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왜 할말이 없냐면, 목사가 성도들에게 앞에서 “나도 은혜 있어, 나도 기도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변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완전히 그 여자 생각대로 나가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단 빠진적이 있었습니다. 할 얘기가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계기로 해서 하나님이 저를 바꾸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때로는 진퇴양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그 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를 때 있게 되는 스티그마 중 하나입니다.

5. 외로움

외로움, 사실 외로움은 오늘의 사람, 오늘의 기름부음과 같이 가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누가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 요나단이라는 친구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참다운 친구가 필요합니다. 다른 차원이 아니라, 사랑함으로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 돌아 온 후, 지하에서 혼자 개척할 때, 한국에서 같은 신학교를 나온 사람도 없고,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집회를 하도록 인도하시고, 서로 힘이 되고 얘기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하나님께서 많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러한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할 한 가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혼자 서야 합니다. 어느 순간엔 절대로 어느 누구도 곁에 설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가 시험들었을 때, 하나님이 제일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젠가 지금의 교회에서 어려운 시험에 들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부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삼일 동안 굶은 오천 명의 장정을 먹이셨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하면 이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화요모임에 오시는 사모님 중에 종양이 순식간에 성령의 불에 타버려 사라진 일이 있고, 또 간경화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던 환자가 순식간에 성령의 불이 임함으로 간에 있던 독성이 다 죽어 병이 치유된 일도 있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삼일동안 굶은 장정을 오천 명이나 먹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자들이 줄 때는 조그마한 조각, 그러니까 보리떡 다섯 개를 열둘로 나눴으니까 얼마나 작은 조각이었겠습니까? 또 작은 물고기를 한 마리당 여섯 조각으로 나눴으니까 얼마나 작았겠습니까? 그러나 떡과 고기를 떼어 줘도, 떼어 줘도, 남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나머지가 열두 광주리가 된 겁니다.

아마 제자들과 예수님께서는 그날 밤이 새도록 낮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잠을 못 자도록 얘기해도 충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워낙 큰 기적이었으니까요. 우리 같으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이루신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보내 놓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 위해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외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이 없이는 오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시점에서는 하나님 앞에 혼자 서야 합니다.

이제는 새물결 선교회에서도 서로 힘을 합해서 서로 협력하고 서로 돕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부분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매우 중요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설 수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혼자 서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헌신되어지는, 그 관계만을 통해서 이 모임이나 우리의 협력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사람 간에 혹은 교회 간에 혹은 교회 안에서 그룹들간에 어떠한 조직 간에 어떠한 언약 그것도 서로 간에 단순한 인간적인 충성과 헌신적인 관계로만 기초된다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모임과 그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데, 이와 같이 각자가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서는 그것이 토대가 되어지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되어질 수 없습니다. 저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부분에서 훈련을 많이 시키십니다.

어떤 때 여러분들은 저를 매우 차갑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저에게 어떠한 좋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선 저에게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의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과 주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여러분을 기꺼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여러분을 섬길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별로 줄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는 대로 나눠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그 믿음 외에는 어떠한 사람도 의지하는 믿음을 갖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에 그렇게 했다가는 그분은 머지않아 시험에 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놓아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때, 때론 성도들과 힘을 합해서 일을 합니다. 성도들의 협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혼자 서야 합니다. 이 외로움이 없이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따라가는 스티그마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믿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들을 불신해서도 아닙니다. 차갑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제의 기름부음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교단들의 역사가 대부분 백년이 넘었습니다. 침례교만 하더라도 백 년이 넘었습니다. 저도 교단에 속해 있는 목사이기에 교단을 비방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 모두가 교단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얘기도 전혀 아닙니다. 교단이 무엇입니까?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에 기초한 것입니다. 각 교단이 세워지기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교단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과거의 역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과거의 역사에 기초해서 제도화된 종교와 법칙에 따라서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려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향으로 가야 되는데, 여기에는 스티그마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내기 위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따라 갈 때, 스티그마들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그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바보가 되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스티그마를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주님을 따라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선 존 윔버 목사님하면 많이 오해되어진 분입니다. 그분은 빈야드 운동을 세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너무나도 사람들이 흑백 논리가 강해서 실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하곤 합니다. 저는 빈야드 교단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곳 세미나에 몇 번 참석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또 그분의 책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실제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주 귀한 분입니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세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찬양만 하더라도 지금 미국의 교회의 90%이상이 빈야드 찬양을 부릅니다. 영국의 교회사 학자들이 말하기를 영국에서 요한 웨슬러 다음으로 영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으로 존 윔버 목사를 꼽는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미국에만 빈야드 교회가 사 백 개가 넘게 세워지게 하셨고, 전 세계적으로는 육 백 개가 넘습니다. 이 십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그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지기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상 없다고 합니다. 감리교가 처음 세워질 때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빈야드 교단을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음의 얘기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재즈 뮤직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보면 매우 불우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아주 난폭한 사람으로 그가 어렸을 때 가정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존을 데리고 친정에 와서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재혼하시게 되자 의붓아버지와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미국의 미저리주 라고 하는 아주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사실 외모는 보잘 것 없는 이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셔서,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 그는 하나님께 참 귀하게 쓰임 받았구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그는 대단하게 하나님께서 쓰신 겁니다. 그 분이 한 것이라고는 주님의 행하심을 따를 때 스티그마를 지고 주님을 따라갔던 것뿐입니다. 오직 그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평가만을 중요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평가만을 중요시 여기며 자기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 성공하는 것,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복종하는 것, 그거 하나였습니다. 그의 중심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스티그마를 짊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쓰면 쓸수록 비방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더랍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총을 가지고 죽이러 왔다고,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을 때도 있었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을 따라갈 때 져야하는 하나의 스티그마 입니다. 오해와 멸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외로운 것. 모두 스티그마입니다. 오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셔야 합니다. 스스로 원한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부류의 목회자들이 모여서 치유에 전념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치유를 받아야 해”하며 치유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실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목회는 소홀히 하고, 날마다 모여서, 서로 치유하는 일에 전념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그 중심에 탐심이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쓰임 받기 위해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탐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께 자기가 쓰임 받고 싶어서 세워진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건, 다윗이건, 아브라함이건, 노아건, 바울이건, 그 누구건 간에 스스로가 그 시대를 위한 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쓰임 받기 위해서 세워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건 욕심이고 탐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사람이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만지시는 대로 하나님의 손에 빚어지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을 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맡기시든지 그 상황에서 직분이나 타이틀이나 어떠한 신분이나 위치나 자리를 내가 연연해하지 아니하고 내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사람들을 섬기기 원하여 겸손함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하나님의 목적으로 그 시대를 위해서 세우면, 세우시는 것이지 어느 사람도 자기가 스스로 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은 이 스티그마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따라갑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인도에는 스티그마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이유는 이 스티그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중심으로부터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따라간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러니, 저러니 할 얘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임재 자체가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오늘의 사람이 되거나 내일의 사람이 되거나 하는 일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순종을 통해 어떤 자세로 사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든지 없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섬기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하리라 마음먹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섬기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기름부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의 사람으로 여러분을 세우셨으면 스스로 압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우신 것은, 여러분 때문에 세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세우신 것을 스스로 압니다. 아는 자는 자만이나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두렵고 떨게 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자는 내일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찾는 것이 할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을 찾는 것. 내일의 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을 찾는 일. 이제부터 내일의 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을 찾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다윗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서 아직도 슬퍼(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3년동안이나 사울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가 무너지거나 넘어질 때 울 수 있는 자 하나님 앞에 통곡 할 수 있는 자. 이 사람이 바로 오늘이나 내일의 기름부음을 받은 증거이며  또 장차 받을 증거이다”

폴 케인 목사도 얘기합니다.
“사람들이 넘어질 때 절대로 자랑하지 말라”

즉, “내가 전에 이렇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었잖아!” 이런 식으로 자만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형제들이 넘어질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울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오늘의 기름부음이나 내일의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증거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자세가 없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세워지지 못 합니다.

언젠가 캐럴 웜버(존 윔버 목사의 아내)가 쓴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한 이야기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에 관한 얘기입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와  존 웜버 목사는 둘이 아주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두 분 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따라서 모든 형태의 교회를 다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니까 그랬을 겁니다. 한 번은 두 분이 함께 어느 장로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가 존 윔버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교회 근처에 산다면 틀림없이 이 교회에 다녔을 겁니다. 이 교회 참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그 다음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어느 감리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피터 와그너 박사가 존 윔버 목사님에게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내가 이 근처에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이 교회에 다녔을 거야. 이 교회 참 좋다!” 그 다음에는 침례교로 갔어요. 그러니까 또 말하기를 내가 이 근처에 살면 반드시 이 교회에 다녔을 거라고, 이렇게 두 분이 함께 다니면 피터 와그너 박사가 항상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그렇게 방문하는 교회마다 칭찬을 하면서 자기가 그 지역에 살았더라면 그 교회를 다녔을 거라고 했을까요? 그분은 장난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사랑한 것입니다.

철젼드웨이라는 분이 계신데 미국에서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이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세우시는데 자기 앞에 있는 다른 교회를 진심으로 축복하기 시작할 때부터 세우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하나님께서 이렇게든지, 저렇게든지 역사하셔서 쓰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공통적인 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교회를 진실로 축복하고 사랑한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 물었습니다. 대답은 “예”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사울을 위하여 애통한 것처럼, 하나님이 중단시키실 때까지, 오늘날 우리에게 이 점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폴 케인 목사님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나쁜 것을 보여 주시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로 하여금 중보기도를 통해 그것을 막으라고 보여주신 외에는 한 번도 보여주신 적이 없다”

그렇게 영적으로 열려져있는 분인데도 그런 자세를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뭘 좀 봤다고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다른 교회를 비방하고,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 마음을 모르는 겁니다. 사울을 위해서 우는 사무엘의 이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또 하나의 일은 다윗을 세워야 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일의 기름부음을 가진 자들을 발견해야 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자신의 안락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을 섬기며, 그들을 세우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축복할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비춰 봅니다만, 여기 계시는 여러 목사님 중에 저보다 앞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날 분도 계십니다. 예언을 통해서도 여기에 오신 목사님들을 통해서 은사들을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내실 거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곳에 와서 배우셨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더 강한 능력을 나타내실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제의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기름부음과 내일의 기름부음을 사용하실 때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어제의 기름부음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질투가 들어가게 되면 끝납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요? 오늘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을 더 강하게 사용하실 때 그들을 축복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해서 더 강한 능력을 나타내실 때 목사님이 그들을 더 축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한 자들은 내일의 다윗을 찾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워야 합니다.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름부음을 가진 자들은 내일을 향한 하나님의 안목을 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웃고, 쓰러지는 것 그 너머에 있는 그 이후를 봅니다. 그들은 흔히들 말하는 축복, 축복, 축복 그 이후를 봅니다. 그들은 내일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안목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것들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의 방법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입니다. 왜 하나님의 미래를 보아야 하는 걸까요? 그래야 그들을 따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티그마를 지고 영문 밖 주님께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능욕을 지고 말입니다. 정확하게 그 얘기입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사고로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배웁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고, 소문이나 풍문에 의해서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오늘의 기름부음을 가진 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거부할 때에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칭찬할 때나,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방할 때,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오는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칭찬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비방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왜 그러냐면,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거부할 때에 그 사람들은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비방하고,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신임을 얻기만을 구하는 것을 배워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 사람은 오늘의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근래에 들어와서 저에게 개인적으로 자꾸 리마인드 시켜주시면서 구체적으로 배우도록 인도해 가시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제가 왜 이 얘기를 하느냐면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의 평가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을 가르치시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때는 제가 설교할 때 사람들이 안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건 안 받아들이건, 사람들이 칭찬하건 욕을 하건, 전혀 그것에 대해서 내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옆으로 제쳐놓고 그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셔서 전하라고 하신 그 말씀만 전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했습니까? 혹은 잘 했습니까?” 라고 묻고 그 평가에만 기초해서 판단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설교가 참 좋았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참 함께 하셨다”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저는 하나님께 자주 묻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묻느냐하면 “하나님 오늘 저 잘 했나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어떨 때에는 제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는데, 하나님은 정 반대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나빴다” 이건 아닌데, “너 사역시간에 이거해야 된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저는 보이는 것들만 가지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을 제가 빼먹은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또, 어떨 때에는 설교를 죽 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저 오늘 너무 못했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를 수 있어요. “너 할 얘기 다 했어”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존 윔버 목사님은 그의 생애에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뭐라고 평가하시는가가 오직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그의 관심이었습니다. 그게 참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그걸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면 사람들이 우리들을 칭찬하는 것도, 별로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할 때, 그것도 우리에게 크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문제가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수록 반대가 큽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만큼 우리의 대적은 커집니다. 왜? 오해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우시면 세우실수록 사단은 여러분을 공격합니다. 여러분이 설명 할 수도 없는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설명을 해도 되지 않을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의 평가만을 받아들이고 그 평가에만 의존해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매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내일을 위해 준비시키고 계신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지만 아직 여러분에게 왕관이 없는 것처럼, 그 기름부음을 사용할 자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도들이 아직 없을 수도 있고, 강단이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자기에게는 기름부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기름을 부어주세요. 하나님의 성령을 저에게서 떠나지 않게 해 주세요. 저에게 더욱 기름을 부어 주세요.” 다윗은 그가 사울 왕의 눈과 위협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시편의 반 이상을 썼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훈련시키셨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지금 훈련시키고 있는 분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이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특별히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고, 우리가 참 하나님의 행하심에 협조하는 삶이 되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더 다듬어지고 빚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로 예비 되십시다. 그렇게 되어지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시기를 원하실 때, 그분 앞에 기꺼이 내어 드려질 수 있는 그러한 삶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또한 준비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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