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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성령의 기름부음

제2장 기름부음의 정의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제2장 기름부음의 정의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6-19)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에 대해서 좀더 정리하고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늘 생각해 왔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잘 정리되었다 라고는 볼 수 없는데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시리즈를 살펴볼 때, 현재 영국의 웨스트 민스트 채플 담임으로 계시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따라감에 있어서나 또 포도나무교회와 새물결 선교회를 섬기고 인도해 가는 한 부분은, 하나님이 그때그때 세우시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들을 통해서 많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사역과 같이 가는 토대가 되어질 때,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웁게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동일한 토대와 이해 위에서 교회의 각 분야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면 예배, 리더십이면 리더십, 중보기도면 중보기도, 사역 중에서도 예언 사역이면 예언사역, 치유사역이면 치유사역, 이렇게 각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되는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동일한 이해의 바탕, 즉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되, 사람마다 각각 세워 가시는 분야가 다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리더십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이시고, 어떤 분은 중보기도로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예언사역을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치유사역을 세워 가시고, 이렇게 각 분야별로 세워 가시는데, 중요한 것은 동일한 가치관 위에서 세워 가시는 분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또 많은 경우에 그분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 신앙의 각 요소와 교회의 사역의 각 부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도움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하나의 부분들이 너무나 소중한 부분들입니다.

새물결 훈련원 커리큘럼만 하더라도 그런 분들의 책들을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한분 한분의 자라란 배경이나 국적, 교단이 다 다른데도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가치관과 신앙의 자세와 태도가 너무너무 정확하게 새물결 선교회와 일치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각 분야의 세워 가시는 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배워가게 하시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새물결 선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부분은 어느 한 사람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저 한 개인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부분은 더욱더 아닙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다양하게 세워 가시되 정확하게 동일한 가치관과 신앙의 본질 위에서 세워 가시는 분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배우게 하시는, 그래서 그 부분들이 종합적으로 더해져서 우리로 하여금 각 분야에서 주님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그런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제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그 도움을 받은 분 중에 한 분이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마틴 로이드 목사님이 계셨던 교회에 후임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약 25년 가까이 사역하고 계신데,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분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라는 책인데, 원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자기 능력으로 임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다루는 책입니다. 그래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책을 통해서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쓴 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부분 한 부분이 참 영적으로 뛰어나고 가치관이 너무 귀한 분입니다.

영국의 웬스터 민스터 채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계실 때는 주로 강해 설교로 유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책을 쓰셨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아마 그분을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쓴 책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생전에 늘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고대하고 기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가신 분이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인데, 이분이 가신 뒤로 하나님께서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놀랍게 방문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폴 케인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가라고 하셔서 2년 동안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같이 동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폴 케인 목사님이 같이 영국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도 하셨습니다. 그 설교가 지금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재미있는 것은 말씀을 대변하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성령에 대해서 설교하시고, 반대로 성령을 대변하는 폴 케인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웬스터 민스터 채플에서도 주일 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지금 우리처럼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놀라웁게 함께하시고, 또 말씀을 전하고, 기도사역도 합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도 기도사역을 하는데, 전반적으로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도 정해진 좌석이 있어서 기도받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 때라도 거기 앉으면 예배 끝나고 기도사역자들이 기도해 줍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전통적인 교회인데, 놀라운 새로운 갱신의 역사가 그러한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 중에 “어제의 기름부음, 오늘의 기름부음, 내일의 기름부음”이란 제목으로  90분 정도의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이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과 아주 일치됩니다. 책을 쓰기 전에 설교했으니까 그 내용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은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께서 쭉 비추시면서 그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풀어가는 형식으로 아주 귀한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그 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조나 구도의 전반적인 이해는 책에 나온 내용들인데, 책에 나온 내용들만이 아니고 말씀드린 대로 제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제 개인이 먼저 배워가면서 그 말씀을 토대로 해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적용할 부분들은 적용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인가?(정의)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란 말을 쓰지만 그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을 어느 한 말로 표현하고 다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광범위하기 때문에 다양한 요소를 품고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들도 다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정의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기름부음이 함께 할 때,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할 때 그곳에 임해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기름부음이 함께 하면 성령의 은사가 쉽게 작동한다.

모든 쉬운 것이 다 기름부음은 얘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 노는 것, T.V 보는 것,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 이러한 것들은 쉬운데, 이런 것들은 기름부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할 때는 성령의 능력이 쉽게 작동하고, 어떤 긴장이나 피곤함이 없이 작동합니다.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홍콩에 있는 재키 플린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키 플린저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길거리 암흑가(마약중독, 매춘 등으로 얼룩진 지역)로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직접 사역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설교하다 보면 똑같은 설교라도 어떤 때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압도 하시면서 놀라웁게 깨우치시고, 만지시고, 운행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똑같은 설교라도 설교하기도 힘들고 목은 목대로 아프고 사람들은 집중도 하지 않고, 말씀은 그냥 흩어지는 것 같고, 땀은 뻘뻘 흘리고, 자신도 없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기름부음의 차이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이 가끔 설교하면서 “기름부음은 확신이다.”그랬는데, 전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는 담대하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재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전혀 확신이 없습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땀만 뻘뻘 흘리고, 빨리 내려가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은사가 쉽게, 그리고 자유롭게 작동합니다.  

한번은 잭 디어 목사님이 사역이 끝난 다음에 폴 케인 목사님하고 같이 걸어가면서 “오늘 괜찮냐” 그랬더니 태연하게 하는 말이 “오늘은 그런 날 중에 한 날이야” 라고 그랬답니다. 무슨 얘기냐면, 사역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설교 시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함께 하실 때가 있어서 그야말로 청중을 압도 하시고 강력한 일을 이루시고, 또 어떤 때는 말씀이 강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역시간에도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말씀을 그냥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내용도 별로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설교가 끝나고 폴 케인 목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오면서 잭 디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아- 오늘 참 힘들었다고, 어떤 교수가 포인트 1.2.3 그것도 못한다고 그러는 것 같다고,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날 폴 케인 목사님 설교시간에 잭디어 목사님이 잘 아는 신학교 교수님하고 같이 왔었는데, 다음날 잭 디어 목사님이 그 교수 친구를 만났는데, 그 교수 친구가 하는 말이 그게 무슨 설교냐, 포인트 1.2.3 그것 하나도 정리 못하는 사람이 무슨 설교를 하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폴 케인 목사님에게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씀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데 사역은 별로 안 나타나고, 어떤 때는 말씀은 별로인데 사역은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어떤 때는 둘 다 강하게 나타나고 이런 일이 대부분인데 그날은 말씀도 전혀 핵심을 찌르지 못했고, 사역도 별 다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이 일을 안하시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날 기름부음이 함께 안하시면, 땀만 뻘뻘 흘리고 사역시간에도 성령님의 움직이심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 그날 너무너무 힘듭니다. 그것이 아직은 자연스럽게 안 받아 들려집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 있고 싶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다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뭔가를 일으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끌 수도 없다.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사람이 컨트롤을 잃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전 14장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다시 말하면 지금 나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나를 제재할 수 없어 나는 말해야 돼 멈출 수 없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예언하고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중단하고 새로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한 그 사람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고전14:30). ‘제재를 받는다.’ 이 말은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 생전에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밖에서 빌 웨이놀드 라는 교회 사무장 집사님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러니까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그분을 존 윔버 목사님에게 소개 해주고 싶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 집사님이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들어오자마자 존 윔버 목사님이 빌 집사님을 주시하며 보면서 “당신은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빌 집사님의 두 아들에 대해서 예언하기 시작하는데, 몇 년 전에 폴 케인 목사님이 그곳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왔을 때, 그 집사님에게 예언했던 내용을 그대로 예언하더랍니다. 참고로 존 윔버 목사님은 빌 집사님의 아들이 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I cant turn dumb, I cant turn dome” “나는 그것을 틀수도 없고 끌 수도 없다” 이 말은 내가 내 임의대로 기름부음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임하시는 것이고, 기름부음이 떠나면 떠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그 예언을 주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건 없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순종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경배하는 것, 중보기도 하는 것, 설교하는 것,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 가족을 돌보는 것, 다 잘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이 언제 임하실지 또 언제 성령의 기름부음이 거두어질지는 성령님이 선택하십니다.

셋째,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의 관계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한편으로는 서로 상호교환(交換相互)해서 쓸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어떤 때는 은사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순히 은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의 활력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은사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자기의 기름부음에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은사는 항상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말하는 은사는 사역으로서의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활발하고 놀라웁게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삶에서도 하루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함께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5:17) 그럼 전에는 함께하시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럼 왜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는 ‘하루는’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날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혹은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그날 특별히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호교환(相互相互)해서 쓸 수 있으되, 기름부음은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써 기름부음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라는 것입니다.

넷째,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동의어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령이 임한 것과 기름을 부으신 것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전체적으로 기름부음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그런데 같은 저자가 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여기에 보면, “기름부음이 너희 속에서 너희를 가르치시리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바로 기름부음을 성령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임의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주권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역사하시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을 때도 성령님은 움직이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볼 때, 성령의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인데,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은사가 쉽고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성령님은 모든 기독교인들 속에 함께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고, 반면에 에베소 4장 30절에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데살로니가 5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성령님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반면에 사무엘상 19장 23절에 보면 성령님이 떠나셨는데도 다시 성령께서 그에게 임해서 그가 예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왕으로서 버림받았는데, 사무엘상 24장 6절에 보면 훨씬 이후인데도 성경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하게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점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구원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라고 말했고, 폴 케인 목사님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둘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셋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라고 얘기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기름, 혹은 기름부음의 용어

첫째, 기름부음은 기름을 의미함.

출애굽기 30장 25절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 유가 될지라” 여기 관유가 바로 기름을 말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a sacred anointing oil, 거룩한 기름 붓는 기름”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이 관유(기름)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26절에서 28절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이렇게 모든 성소에 있는 기구들에 발랐고, 그 기름이 그것들에게 발라졌을 때, 그 기구들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29절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둘째, 제사장들을 구별하기 위해 기름을 바름.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출30:30)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7)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레21:10-12)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가 관유를 취하여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관유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거룩하게 하고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레 8:10-13)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리지 아니함으로 불이 하나님께 나와서 그들을 사르는 사건입니다. 졸지에 그것도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었는데,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 자녀들을 위해서 슬퍼할 기회도 주시지 않고, 심지어 머리도 풀지 못하게 하시고, 성전 문도 떠나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론에게 거룩한 관유, 즉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5-7)

이처럼 기름부음의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는 의미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드려졌고, 매우 심각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제가 그 부분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구절에서 그러한 내막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떤 분의 책을 봤는데, 그분 같은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예언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예언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고 있었는데, 어떤 A라는 사람이 그분 앞에서 자꾸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참다못해서 A라는 사람에게 저주 비슷한 말을 퍼부어 댔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그 저주한 말이 그대로 그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그 일로 인해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몇 달 동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비춰 주셨던 바는, 기름부음이 함께 할 그 시점에 그분이 그 기름부음을 가지고 범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약의 제사장들을 구분할 때, 하나가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중대하고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1장 10절-12절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왕들을 세울 때, 기름부음을 사용함.

사무엘상 10장 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울이 실재로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뒷받침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갈 때, 그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성령이 놀라웁게 임해서 그가 예언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냐’ 라고 말할 만큼, 성령이 그에게 강력하게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10:2-11)

사무엘상 16장 1절을 보면 사울이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다고 하셨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4장에 가면 성경은 여전히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린 이후에도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성령의 기름부음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고,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름부음이 성령의 임하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크게 감동되니라” 이 말은 N.I.V 성경에는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David in power"이라고 되어있는데, ‘여호와의 영이 다윗 위에 능력으로 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붓는 것과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무엘상 10장 6절에 성령이 사물에게 놀라웁게 임했고, 9절과 11절에도 역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여기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이 시점에서도 사울은 여전히 왕입니다. 그래서 왕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떠나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떠났는데도 나중에 보면 다시 그에게 성령이 임해서 예언도 했고, 또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의 사람입니다. 아직도 실재로 사역을 하고 있고, 영향력의 위치도 여전히 가지고 있고, 타이틀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떠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면 사무엘상 16장 13절 이후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그 위에 임하여 계시고, 그 위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왕관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내일의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한 십 여년전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미국의 켄사스 주에 있는 메츠로울 크리스천 펠로우�에 마이클 비클(Mikle Bikle) 목사님이 그 교회 담임 목사일 때, 제가 거기 세미나를 참석했습니다. 그때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그 중에 한 분은 여러 가지 얘기라든가, 되어져가는 일들을 보니까. 참 성령께 민감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엄청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옆에서 만져야 기름부음이 옮아온다면서 자꾸 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교인도 별로 없고 교회도 제대로 되지도 않고, 그냥 아등바등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기름부음이 함께하기는 무슨 기름부음이 함께해, 기름부음이 함께 하면 뭐가 나타나야 될 텐데 아무것도 안 나타나는데, 무슨 능력이 크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 반응이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이미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실재로 왕이 된 것은 15년 후의 일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자기 눈에 보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사울에게 죽지 않으려고 10년이 넘도록 도망만 다닙니다. 나타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시는데 때로는 적군에게 피해서 미친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삼상 21:10-15) 그런데 삼상 16:13절에 보면 기름부음은 실재로 그날 이후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즉, 기름부음은 여전히 함께 하시는데 아직 왕관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일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기름부음과 성령의 임하심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전혀 기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기름 붓는다고 말은 성경에 있지만 실재로는 기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시편 105편 15절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히브리어의 평행법은 두 문장이 나란히 같이 있는데 똑같은 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기름부음 받은 자와 선지자는 똑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도 기름부음 받은 자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구약에서부터 아주 소중히 여기고 계신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는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사울을 몇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는 것은 고사하고 옷자락 조금 자른 것도 즉각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기름부음 받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가르침이 제가 보기에 옳지 않더라도, 그분들을 사람들 앞에 절대로 비판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의 가르침이 설령 틀릴지라도 그분들에게 함께한 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가 미국에 세미나에 갔을 때, 어떤 경로를 통해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분들 위에 있는 기름부음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 61장을 예수님이 인용한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4:18). 이 말은 예수님에게 해당하는 예언이지만 이사야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에게 실재적으로 누가 기름을 부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이사야도 실재적으로 기름을 부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에도 기름부음을 받되 반드시 실재적으로 기름을 부어야 되는 것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이 성령의 임하심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데, 실재의 기름은 부어지지 않고도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심으로 그것을 기름부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라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아도 실재로 기름부음 받은 사실이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20:1-7)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자기 아내로 취하려고 데려갔을 때,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에 나오는 용어들을 볼 때, 기름부음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어떠한 목적을 위해 구별하신 것과도 연결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매우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기름부음은 소중합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이 내릴 때,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대적할 때,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왕상18:19-40) 엘리야가 먼저 시작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조롱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도 조금 있다가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야 되는데, 이 전에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기도 조금 있으면 하늘에서 불을 내려야 되는데, 지금 엘리야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엘리야가 특별해서 한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왜 그 가뭄에 귀한 물을 세 번이나 열두 통을 부으라고 했는지, 성경에는 안나와 있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추측하기로는 그 뜨거운 중동의 태양 아래서 온 종일 기다렸으니까. 그러지 않아도 가뭄에 나무가 마를 때로 말랐을 텐데, 그 상황에서 불이 내리면 저들이 자연발아 되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들에게 도저히 핑계치 못하도록 확실하게 하늘에서 하나님이 불을 내린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어쨌든 간에 엘리야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냐면, 그 놀라운 일이 있고 난 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왕상19:1-7)

불을 내린 행동이 엘리야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지금 이런 자세가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임하면 확신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기름부음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내가 그 길을 지나갔다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가서 쳐다보면서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안될 것 같더라고요. 베드로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능력을 가지고 다니면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날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길을 처음 지나간 날이 아닙니다. 수도 없이 지나다녔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도 여러 차례 지나가셨던 길입니다. 그 앉은뱅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도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고치시기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 그 사건을 통해서 오천 명을 구원하시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서 하신 것입니다. 그날 베드로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행3:1-13)

홍해 앞에서 전혀 구원이 여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자신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싸우실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기름부음이 한 것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틴 루터, 존 칼빈, 요한 웨슬러, 그들과 함께 한 것, 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들이 쉽게 작동할 때, 그때 거기에 있는 것이다.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쉽게 온다. 기름부음은 매우 자연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는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거기에 있거나 없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뭐를 이뤄내기 위해서 노력을 기우려야한다면 그것은 그 기름부음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기름부음의 범위를 벗어나면 그 결과는 자주 피곤하고 지치게 된다. 특별히 영적으로 지치게 되며 영적인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적으로 메말라간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이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름부음을 더 알게 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늘 하나님의 기름부음 가운데 있기를 사모하고, 열망하고, 늘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더욱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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