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례
1장 기름부음의 배경
2장 기름부음의 정의
3장 어제의 기름부음
4장 오늘의 기름부음
5장 내일의 기름부음
기름부음을 사모하라!
기름부음을 열망하라!
기름부음을 앙망하라!
기름부음을 사랑하라!
기름부음을 사랑하라!
기름부음을 사랑하라!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겨라!
기름부음을 귀하게 여겨라!
기름부음을 값지게 여겨라!
하나님의 일은 기름부음이 한다!
하나님의 일은 기름부음이 한다!
하나님의 일은 기름부음이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 시리즈 |
제1장 성령의 기름부음의 배경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6-19)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성령의 기름부음을 살펴보기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이 현재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그 배경이나 이유를 먼저 살펴보기 원합니다. 또 성령의 기름부음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사모해야 될 것인지, 어떻게 적극적으로 구하고 추구해야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무엇이고,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그 부분을 추구해야 될 것인지 그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우리 사역의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간단히 요약해서 살펴보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구할 것인지, 이 시점에서 왜 성령의 기름부음 시리즈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지,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 시리즈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해야할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배경과 이유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전체적인 윤곽을 간단히 요약해서 살펴보는 이유는 그것을 올바로 보아야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또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떻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해야 할 것인지, 하는 부분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하면 “성령 사역의 회복”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부분은 사복음서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이 복음서를 두 종류로 나눕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말하고, 요한복음은 세 복음서와는 약간 다른 영적인 차원에서 기록된 복음으로 이해합니다. 그 말들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성경을 보면서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사역을 비추시는 것을 보니까. 심지어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비슷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에 특정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강대상이 사면을 가지고 있는데, 네 면이 합해져야 온전한 강대상이 되는 것같이, 마가복음은 왼쪽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했다라고 강조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정면 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했다고 강조하고 있고, 또 누가복음은 오른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했다고 강조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다른 쪽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했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예수님의 사역을 놓고, 각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에 어떤 특정한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뿐만 아니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 복음서가 참으로 절묘하고, 오묘합니다. 그리고 네 복음서의 강조점을 다 합해보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이 선명하게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왜 중요하냐면,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사역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들을 조명하고 부각시키며 강조하는 반면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동일한 사역을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각 복음서마다 그 표현까지 같습니다. 이것은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은 정확하게 표현에 있어서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그대로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이고, 오늘날 교회의 사역도 정확하게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이 되어야 할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강조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1.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이 하나로 어우러진 사역이었다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사건부터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마가복음 1:21-28).
복음서마다 처음에 기록된 사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복음서마다 제일 먼저 기록된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이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 아니고, 각 복음서의 모델 혹은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의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두 가지를 보고 놀랐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의 권세에 놀랐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 행함의 권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을 강조하고 있고, 그 결과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은데, 말씀선포와 능력의 행함이 따로 떨어진 두개의 별개의 행위가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건이 있고 난 후, 다음날 미명에 예수님은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요. 어제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는데....,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전도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말씀을 “선포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가지고 예수님이 전도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전도가 목적이고 우선이지 성령의 사역인 치유나 능력 행함은 부수적인 것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문맥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항상 성경은 문맥에서 보아야 합니다. 38절에 내가 선포 혹은 전도하여야 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절에 바로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막1:39)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의 선포와 능력 행함이 예수님의 사역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한쪽만 얘기해도 나머지 하나는 자동적으로 따라왔습니다.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소위 말씀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저 말씀이 우선이고 능력 사역은 부수적이다 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이 말하는 전도는 오늘날 우리가 말로만 전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을 합해서 예수님의 사역이라고 보기 때문에 하나만 말해도 다른 하나는 자동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능력 행함을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뽑으신 목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3-15)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목적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교제를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역을 위해서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과 교제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앞서가신 주님을 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보내서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표현까지도 똑같습니다.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의 선포와 능력 행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또한 말씀 선포(전도), 능력 행함(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표현까지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그대로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권세있는 말씀의 사역, 즉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의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인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사람들이 일부만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을 많이 사모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능력만 임하면 마가복음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이 교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빨리 숫자적인 부흥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교회를 빨리 부흥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하기를 원하고, 사모하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갈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귀합니다. 그러나 제 얘기는 예수님의 사역을 사복음서가 강조하고 있고, 그것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예수님의 사역의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의자에 비유한다면, 의자 다리가 네 개인데 만약 그 의자가 다리가 하나만 빠져도 제대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두개, 세 개만 가지고도 안됩니다. 얼마 못 견디고 넘어질 것입니다. 네 개가 다 있어야 올바로 균형잡힌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2. 마태복음
마태복음도 역시 예수님의 사역이 마가복음이 말한 것처럼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전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은 거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태복음의 강조는 1장에 나오는 족보에서부터 볼 수 있는데, 마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어느 복음서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가 많습니다. (마13장, 16장, 20장 참조) 일부는 다른 복음서에도 있지만 많은 비유들은 마태복음에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마태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기록은 요약함으로 나옵니다. 4장까지는 서론적인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 4:23-25). 여기에서 흔히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선포, 가르침, 치유하심, 이 구절만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전체를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선포와 능력 행함,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르침과 선포는 형태만 다른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설교하는 식으로 외치면 그것이 선포이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해가면 그것은 가르침입니다. 모양만 다르지 말씀을 전하는 것이고, 말씀선포와 능력 행함,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도 그렇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어디를 보면 아느냐면 마태복음에는 이 요약이 9장 마지막 부분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모든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이렇게 4장 마지막 부분에 요약으로 시작했다가 다시 9장 마지막 부분에 요약으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 마태복음 5장, 6장, 7장, 8장, 9장이 있습니다. 이 다섯 장이 두 단원으로 되어 있는데, 5장부터 7장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대한 부분이고, 8장부터 9장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역(성령사역)이 대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 서론으로 오늘 저는 이러이러한 부분을 설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론을 1.2.3 설교하고 난 다음에 결론으로 오늘 저는 이러이러한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하고 마치는데, 꼭 그런 샘입니다. 마태복음 4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이렇습니다. 라고 말한 다음에 그 사이에서 그것을 대표적으로 요약하고 나서 9장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사역은 이랬습니다. 라고 요약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5장에서 7장까지를 우리는 흔히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어느 날 산에 올라가 하루에 가르치신 내용이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메시지의 중심적인 진수들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내용을 수없이 반복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지만,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있는데 성령이 불러준 것은 아닙니다. 많은 가르침들이 전승으로 내려왔다고 그랬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설교 한번 듣고 다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요모임에 오면 십자가의 복음, 신앙의 본질을 귀가 달토록 듣습니다. 때로는 오래 오시면 수십 번 듣고, 포도나무교회 성도들은 더 많이 듣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도 비슷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의 같은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하셨을 것입니다. 이 동네 가서는 이 소리하고, 저 동네 가서는 저 소리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그것이 선별되어지고, 더 비춰지고, 더 깨달아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하시는 일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산상수훈만 하더라도 그저 어느 날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한번 가르친 내용이 아니고, 마태복음 5장-7장까지 문맥 구조를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그 진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오늘날 교회가 전파해야 할 메시지가 뭔가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이렇다 라고 표현한 그대로 제자들에게 표현까지도 똑같이 명령한 것을 보았는데, 마태복음도 그렇게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역도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하게 똑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 이하로 보시면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했듯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목사님들이 많이 계신데 참 중요한 말입니다. 저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님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셨듯이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8절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요약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나내며, 문둥이를 고치며, 앉은뱅이를 고치며..... 이러한 사역이었던 것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장 마지막과 9장 마지막에는 하나로 뭉쳐서 요약하고 있고, 8장과 9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다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사역이 이랬다라고 이해하는 대로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까지 똑같은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복음서마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랬다 하고, 강조하는 혹은 보는 그대로를 제자들에게 그 표현까지도 똑같이 그대로 하라고 명령한 것은 제자들의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 그대로 닮아야 될 것을 모든 네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의심할 나위 없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예수님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유언(The Great Commission)과도 같은 명령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8-20)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써 정확하게 예수님이 했던 그대로 해야 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정확하게 그대로 해야 되느냐면 모든 복음서가 그 표현까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제자들에게 강조한 만큼, 우리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반박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 동의 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동의하신다면 이제부터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동의하신다면 메시지만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복음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메시지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의 내용은 가장 먼저는 신앙의 본질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지옥에 안가고, 천국 갈 ticket(표)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당연히 성령님이 우리 속에 와 계시고, 부활의 생명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가 이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고후1:22). 그래서 우리는 지옥을 향해서 가지 않고, 천국을 행해서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천국 갈 표를 얻었으니까. 이제는 적당히 종교생활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누리며,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도 되는 그런 삶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상 나라는 사단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요하게 여기는 이 모든 가치관에 대해서 성경은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특징지어지는 거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이 세상의 풍습을 좆는 것이요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얼마나 다르냐면 빛과 어두움이 다른 것처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 삶의 목적과 이유, 살아가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빛과 어두움이 다른 것처럼 정 반대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을 보십시오. 그 가르침의 내용이 얼마나 급진적인가? 세상하고는 전혀 다른 나라의 법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팔복이라고 말하는 마태복음 5장의 가장 먼저 나오는 부분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 구절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복걸 복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이런 복 받고, 저렇게 하는 사람은 저런 복 받는 내용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거기에 나오는 팔복의 내용만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해하는 신앙과는 너무 다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천국이 저희 것이고, 위로를 받을 것이고,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시고, 배부를 것이고,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고, 천국이 저희들 것이 되는 복을 그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실 거라고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13:44-46) 두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모든 것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복 받을 것이고, 그저 적당히 예수 믿으면 지옥은 안가니까 이제 여러분들의 목적과 목표를 이루고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그것은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가 아닐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한 메시지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씨 뿌리는 비유를 보아도 압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할 때, 바리세인처럼 자기들의 신앙 관점에서 맞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고 치유도 받고, 기적도 경험하고, 가르침을 받고, 감동도 받았던 많은 사람들 중에도 말씀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에 조정이 요구되고 대가가 요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바로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으로써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을 직면하여 대가가 요구될 때 말씀을 버린 그들은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의 전 존재로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이 열매 맺는 자들이고, 그들을 통해서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거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입니다 (마13:1-23).
3. 누가복음
누가복음도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강조되었다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점이 강조됩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시되 하나님의 아들,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 집중적으로 focus(초점)가 맞춰져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1:41)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눅1:67)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2:25) 그밖에도 [눅1:15, 눅1:35, 눅2:26, 눅2:27, 눅3:22, 눅4:18, 눅10:21, 눅11:13, 눅12:10, 눅12:12) 등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성령의 사역이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셨다는 내용은 네 복음서가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4장 1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이 말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돌아오실 때, 14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이 내용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면, 예수님이 처음부터 성령의 능력에 충만했고,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가 끝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각 복음서에서 첫 번째 기록한 사건이 아주 중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의 모델, 패러다임(paradigm 모범, 보기)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누가복음의 첫 번째 기록한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첫 번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4장 15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왜 제일 첫 번째로 이 사건을 기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가 보는 핵심이고, 강조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러다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6-19) 여기도 보면 두 가지가 명백하게 나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 그 다음에 능력을 행하는 것, 다른 복음서하고 똑같습니다. 문제는 여기의 초점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내용을 보면, 각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24:44-49)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은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면서 제자들도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예수님의 기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하신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시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밤중에 기도 하시고, 어떤 때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혼자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고 나와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often(자주. 종종)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복음서는 안나옵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기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성령과 기도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두 가지 구조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백성이 다 침례를 받을새 예수도 침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눅3:21)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이와 같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면서 이와 기도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말씀을 마태복음은 좋은 것이라고 기록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라고 기록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7-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9-13)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가복음의 저자를 통해 무엇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고, 아울러 그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데에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이 이러했다라고 강조한 그대로 제자들에게도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4. 요한복음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의 선포와 능력 행함이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세 가지를 다 전재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어떤 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강조하느냐면 주님이 이 사역을 감당하시되 임의로 하지 않으시고, 성령께 민감해서 감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임의로 하지 않으시고, 성령께 민감해서” 이 두 개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이 5장에 나옵니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몇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가 일하신다. 둘째, 나도 일한다. 셋째,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넷째, 나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본다. 다섯째, 나는 그것만 보고 행한다. 여섯째,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버지 하시는 것을 보이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에게 사역은 자신이 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의 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전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일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아버지가 일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행해오셨습니다. 둘째, “나도 일한다.” 이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셨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이 예수님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좀 알아주고, 사람들이 인정하고, 그렇게 하면 많은 이득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히려 반대하고, 핍박하고, 대적하고, 멸시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 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에 아버지의 일이 곧 자기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셋째,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넷째, “나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본다.” 다섯째, “나는 그것만 보고 행한다.” 여섯째,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버지 하시는 것을 보이신다.” 이것이 요한복음 전체에 깔려있는 강조점입니다.
요한복음 5장의 내용을 보면,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5:1-4) 오늘날로 말하면 종합병원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은사를 생각할 때, 마치 호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아무 때나 마음대로 꺼내서 쓸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거기 있는 사람 다 고치지 왜 한 사람만 고치셨겠습니까?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그곳에 있는 환자들의 머리를 한번씩 두드리고 가셔도 될 것이고, 병이 떠나기를 선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하셨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날 38년 된 중풍병자 한 사람만 고치셨습니다. 거기다가 그날은 안식일이고, 그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면, 그 당시 종교적인 이해로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따라다니는데, 그들이 벌 때처럼 일어날 것은 뻔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병만 고치시지 왜 하필이면 쓸모도 없는 더러운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합니까? 아니 그냥 일어나 집으로 가라고 하면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시비 거리를 만들려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답변은 앞에서 말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답변하신 내용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늘까지 일하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신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나도 행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버지의 하시는 것을 보이신다. 이 얘기를 종합해보면, 예수님이 거기를 지나시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측이지만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거의 맞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그 38년 된 병자에게 관심을 쏟게 하신 다음에 ‘저에게 가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라.’ 아마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서 그렇게 말할 때,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요한복음은 그것을 전재하면서 예수님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해서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전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누가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능력을 받아가지고 여러분 임의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자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어느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한 그 신앙적인 바탕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이었던 것인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 군대 나옵니다. 요10장 37절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여기 아버지의 일은 그저 예수님이 아버지를 위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고 예수님이 동참할 때,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요10장 38절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 사역은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만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일부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이 표현을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바로 다음 구절이 맞지 않습니다. 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라는 말은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행하시는 것뿐만 아니고, 말씀도 임의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말까지 임의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귀신이 심하게 들린 사람들을 보면 귀신이 그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대를 이용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임의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셔서 예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성대를 이용해서 말씀하셨다는 얘기일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라는 이 말에 의미는 예수님이 성령께 민감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한 것이기에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 보면 “내가 하는 말은 단지 내 말만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임의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는 친밀한 관계가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가능합니다.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계속해서 똑같은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면 이 일은 친밀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12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똑같이 이렇게 성령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입니다.
여기에만 멈추지 않습니다. 15장에서 더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5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해야 그 사람을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얘기입니다. 또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열매가 뭔지 알면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쉽습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입니다. 열매는 가지에서 열립니다. 사과나무 가지에서 사과가 열리듯이, 예수님이 나무니까 가지에서 예수님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고 우리가 가지라는 말은 우리에게서 예수가 열려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잘 되십니까? 너무 쉬운 것인데 의외로 이해들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나무이고 예수님이 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지인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열린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고 순종했더니 아버지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것이 열매였습니다. 우리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나무고 우리가 가지로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똑같은 그 삶을 살 때, 우리가 임의로 행치 아니하고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열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역입니다.
이제 사복음서가 보이십니까?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 선포와 능력 행함이 별개가 아니고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무리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했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교회 가운데 전파되지 않고,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를 믿었을지는 모르지만, 삶의 자세, 태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 세상에서 귀하자고 생각하는 것, 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귀한 것을 얻는 방법, 세상의 가치관, 모두 그대로 가지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올바른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곧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그대로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목회자들은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 그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메시지를 전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실재는 완전히 교회에서 걷혀버린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되, 성령께 민감해서 감당하셨습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균형잡힌 네 개의 다리가 다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처럼 성령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전혀 전하지 않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그 일을 전혀 전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면 네 개의 다리에서 두개가 부러진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균형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고, 성도의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다는 그렇지 않지만, 소위 영성사역 한다면서 그렇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성령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성령의 능력은 부차적인 것처럼, 마가복음부터 없습니다. 조금 심한 경우에는 말씀도 성령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말씀도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하였다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전해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전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 듣기 좋은 교훈적인 설교나, 세상에서 개인의 유익을 위한 몇 가지 진리를 전하는 것은 전혀 말씀도 성령도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적극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시리즈를 살펴보는 이유?
우리는 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우선 첫째는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과 성령이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에는 정확하게 신앙의 본질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면 아느냐면, 요한복음 6장 53절 “인자의 피를 마시고 인자의 살을 먹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인데, 그러한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은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자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자원이 되어야 될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진수고 핵심입니다.
특별히 이제 사도들의 사역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으로 점점 바뀌어갑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하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이론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그분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전하려면 그분은 인격체니까 그 예수님을 알아야 전합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님을 알기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의 삶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고전2:2). 다시 말하면, 정확하게 예수님이 모든 것 되는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전한 메시지와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와 전혀 차이가 없이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파하시고,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성격인데, 점점 초점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서는,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에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에도 정확하게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전파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훈적인 설교에 불과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말에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십자가에서 그 능력이 쏟아지지 않게 함이라고 했습니다.(고전1:17) 그 말의 지혜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말에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인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십자가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이 쏟아집니다. 인간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인격체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전존재로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 여기서 떠나면 우리는 실재로 하나님 떠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냥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마지막으로 능력과 권세의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어떤 때는 능력과 권세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랐다. 또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권세가 능력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권세와 능력이 상호 교환적으로 쓰여진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같은 의미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권세와 능력이 약간 다릅니다.
능력은 영어로 말하면 이네니블먼트(enablement 뭐 뭐를 가능하게 하는)입니다. 능력이란 말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ύναμς)라는 말인데, 그 뒤나미스라는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dynamit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한마디로 힘(power)입니다. 그러면 권세(authority 권위, 권력)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그 능력,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합니다. 앞에서 사복음서의 예를 들면서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사역을 감당하시되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은 권세를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누가복음은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권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권세가 뭔지를 성경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백부장의 예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마8:5-10) 백부장은 예수님 안에 있는 권세를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놀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는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를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권세는 군대를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군대에 중대장이 있으면, 그 위에 대대장이 있고, 그 아래로 소대장이 있습니다. 중대장이 대대장의 명령 계통 아래에 있을 때에만 거기에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에게 명령하면 소대장이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이 탈영을 한다거나, 자신의 권한을 넘어 임의로 소대장에게 명령하면 소대장이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그는 권세를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권세 문제가 중요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써 자녀에게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부모 위에 더 권세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인데(빌2:6), 철저하게 아버지의 권세아래 있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복음서건 서신서건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권세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을 때에 자녀에게 권세가 미쳐집니다.
누가복음은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권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순종하는 것, 그래야 권세아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에 나오는 능력을 행하는데, 권세아래 있지 아니하면, 자칫 잘못하면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능력은 귀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예수님이 그토록 강력하게 그들에게 말씀하신지 아십니까? 주님의 권세아래 있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임의대로 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했습니다. 이처럼 권세와 능력은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권세 가운데 행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집중적으로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신앙의 본질,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되시는 삶, 포도나무와 가지의 삶,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나오는 모든 부분이 다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의 측면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더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일은 기름부음이 하시는 것이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구하지 아니하고, 기름부음을 우선적으로 구하게 될 때, 아주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구하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성령께 민감하기를 구하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지 않아도 되느냐? 아닙니다. 절실하게 구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누가복음을 뛰어넘어서 갈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 잡힌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특별히 처음에는 우리의 야망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이 다루어지지 않았고,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도 개인적인 야망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가운데서 우리의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신앙의 본질을 전하고, 또한 그 말씀 앞에 서고 하나님 얼굴을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심으로 우리의 성품이 빚어지고, 다듬어지고, 개인적인 야망과 시기가 깨뜨려지고,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가 열리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가 되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며,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이 되는, 그래서 아버지의 행하심에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이 삶이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누가복음을 보면 성령의 능력,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고,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능력을 강조하고 계신 것을 보면, 우리는 이 토대위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더 강한 성령의 능력과 기름부음을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시고 나타내주시도록, 올바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모하고, 갈급하고, 갈망하고,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이 하신 그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를 향한 열망이 날마다 더해가기를 바랍니다. 강력한 성령의 은사가 부어지기를 사모하시고, 그 은사를 사랑을 따라 섬길 수 있도록 아버지의 마음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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