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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한 삶공부 /오이코스모임

16-28.사랑의 표현으로서의 결단 / 단1:1-9

by 오용주목사 2016. 7. 24.

16-28 오이코스 모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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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랑의 표현으로서의 결단 / 1:1-9

 

누가 저에게 목사님, 성경을 한마디로 어떤 책입니까?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한 책이 성경책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핵심은 무엇인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이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언약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의 상황과 형편이 어때야 합니까? 당연히 좋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북 이스라엘은 이미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남쪽 유다는 BC605년에 바벨론의 1차 침공으로 극도의 위기에 처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또 포로로 끌려가는 참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조롱

 

여러분!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언약했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 하나님의 약속은 부도수표와 같은 부질없는 약속이었나요? 아니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작은 나라 하나도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수도 없는 무능한 하나님이신가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유다가 망한 이유는 여호야김 왕 한 사람의 판단 착오라는 겁니다. (왕하24:1)

둘째,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러한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사람을 세우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떤 사람인가요?

 

1.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쉬운 성경, 1:1 “유다 왕 여호야김이 왕이 된 지 삼 년째 되는 해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을 포위했습니다. 1:2 그러자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로로 넘겨주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호야김이 무능해서 생긴 것 같고 악랄한 바벨론이 침공을 해서 일어난 일 같은데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이 일을 주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는 영적통찰력이 다니엘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2.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

1: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과 같이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벨드사살 이름을 거부하고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7:28, 8:1, 15, 27, 9:2, 10:2,7, 12:5을 보면 여러 곳에서 나 다니엘” “나 다니엘

무슨 말입니까? 내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내 이름을 너희들 마음대로 고쳤지만은 나는 벨드사살처럼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다니엘처럼 살겠다는 겁니다.

 

3. 뜻을 정한 결단의 사람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뜻을 정하여이 말은 마음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무슨 마음의 결정을 했습니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왕의 음식과 포도주를 안마시겠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의 음식은 우상 앞에 드려진 음식이기 때문에 안 먹겠다고 해석하는데 볼드인이라고 하는 주석가는 그 당시 왕의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는 왕에게만 충성하고 왕 만을 의지한다는 언약관계를 상징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나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나는 하나님께 순결을 바친 사람이라는 겁니다. 나는 비록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느부갓네살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다니엘에 어떻게 영적통찰력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뜻을 정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사랑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침공으로 혼미한 상태에 빠졌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나라가 어떻게 망할 수 있나? 하나님이 죽었나? 하나님이 안계시나? 하나님이 없는 것 아냐?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고 있을 때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를 훼손시키지 않으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질되고 타락할 때 적당히 얼렁뚱땅 눈 감고 넘어가지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채찍을 드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라가 비참하게 빼앗김을 당하는 현실 속에 그 하나님의 두려움을 그가 경험하면서 뜻을 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경험했던 또 하나님의 측면이 무엇입니까? 성전 기구를 빼앗아 가도록 방치하신 하나님이 시지만 성전기구 전부가 아니라 일부를 가져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언제든지 회복의 통로를 만들어 놓고 계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유다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내 멋대로 세상 바벨론을 하여하여 달려 나갔던 우리였지만 주님은 언제든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되 돌이키기만 하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그 십자가의 사랑이 다니엘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또 뜻을 정한자로서 결단의 사람으로 만들더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