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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권별설교/베드로전후서

39강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2) (벧전 1:1-4)

by 오용주목사 2018. 10. 1.

39강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2)

벧전 1:1-4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여기 나그네란 말은 쉽게 말하면 외국인 거주자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도 와있는 외국인 거주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 땅을 소망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돌아갈 본국, 가정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또한 이 땅에 잠시 나그네로 살다가 주님 부르시면 주님 계신 곳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1: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2.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천국을 소망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래 이 땅을 소망하며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천국을 소망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어떻게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되었습니까?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본성을 따라 이 땅을 소망하며 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택하시고, 피 흘리시고, 피 부림을 통하여 믿음이 이 삶을 살게 하셨다는 겁니다.

 

창세기를 노아시대를 보면

6: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살 수 있었습니까?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러분 우리가 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줄 아십니까? 천국이 좋아서? 왜 좋은가? 그곳에 나를 사랑하고, 또 한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여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일까요?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이 무엇이어야 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든 십자가의 삶입니다.

 

4.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찬송(예배)하는 삶입니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나그네에게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그네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이 있고 기쁨이 있는 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찬송이란?

찬송(기릴 찬, 기릴 송)으로 국어사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어 찬양함이라 되어있는데, 찬송이 다른 노래와 다른 것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찬송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양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가사를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새노래로 부르자 랄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노래로 부르자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서 찬송이 곧 예배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올릴 최상의 형태가 바로 찬송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을 이렇게 정의하면 가장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 그분 자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 사도가 벧전1:3절에서 찬송하리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찬송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나그네인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성도에게서는 찬송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일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레찬양 158주의 아름다움은 말로다후렴을 가사를 보면 내가 주를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찬양 받으시기 합당한 거룩하신 주님이라고 찬양하는데 여러분 누가 주를 경외함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이 찬양 시작 가사, 주의 아름 다움은 말로다 형언 할 수 없고, 주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가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축구 경기 골을 넣은 것을 보았다. 올레~~~대한민국

하나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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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도가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나그네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그네란 돌아갈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아갈 본향이 아무에게나 주어집니까?

 

나그네는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지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택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모든 악한 죄가 용서되고 예수님에 의에 참여된 된 자로서 거룩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산 소망입니다. 나그네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아는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안에서 찬송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찬송을 자기 기분이나 감정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노래가 나오는 것처럼, 찬송도 기분 좋을 때 부르는 노래 정도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이기에 유행가 대신 찬송을 부름으로써 자기 기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찬송은 내 기분이나 감정, 내 형편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찬송은 노래가 아닙니다. 때문에 찬송에서 중요한 것은 잘 불렀느냐 못 불렀느냐가 아닙니다. 박자 음정이 맞았느냐 틀렸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찬송의 내용입니다.

 

2) 사도의 찬송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택하심,

하나님의 긍휼이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일이며,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신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 다 품을 수 있는 단어가 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들이 과연 기쁨으로 다가옵니까?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찬송하게 됩니까?

 

시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일들은 모두 세상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갈 하늘나라와 연관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도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조건이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유 없이 선택하신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격을 보고 선택을 하지만 하나님은 이유 없이 자격을 보지 않고 선택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중에 열심히 특심인 분들 계시죠? 이런 분들은 딱 두 종류입니다. 정말 신앙이 좋은 분이든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싫어할 꺼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창세전에 나를 택했다는 말은 이런 것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존재 자체를 좋아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베드로 사도의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중생(重生)이란 거듭 난다또는 다시 난다” (born again)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 이 착해지고 좋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적으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영혼이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천국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게 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단절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채로 영원 히 사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뜻이며, 생명의 뿌리가 뽑혔다는 의미입니다.

 

중생한 자의 특징?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산 소망을 갖게 됩니다. 죽은 소망 : 이 땅의 소망,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민망히 여기시니(스플랑크니조마이) 이 말은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라든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등이 담겨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기 때문에 창자란 감정을 가진 기관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한 동정심에 대한 강조적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극치?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죽음에서 살려냈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운명에 참여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죽음은 곧 영원한 나라, 본향으로 들어가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나그네에게 하나님의 긍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닐 수 없기에 찬송하리로다는 외침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어 놓으면 환영받지 못하고 팽개침을 받고 개도 물어가지 않을 것에 불과한데, 성도에게는 너무 큰 기쁨이 되어서 찬송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이라는 것입니다.

 

3) 찬송의 이유와 근거

성도는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입니다. 과연 누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습니까? 세상은 하늘에 대한 것을 막연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죽어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확실하게 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바로 거듭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얻는 것도 하늘의 기쁨에 견줄 바가 못 됨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하늘의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뻐하고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찬송의 이유와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찬송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또한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기분이 좋아서도 아니고 좋은 일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총의 일들 때문에 찬송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보화를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사망에서 건져내어서 생명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도께도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어리석고 무지한 우리에게 그 어떤 양보도 하지 않으십니다. 땅의 것만 바라보고 땅의 것에 소망을 두려고만 하는 미련한 우리들에게 양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조차도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항상 세상을 향할 뿐이고 육신의 즐거움을 위한 것들인데 이러한 우리들의 욕망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이 양보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내 뜻을 받아주지 않으시고 내가 원한 대로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것에도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에 양보하신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는 자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내가 원한 대로 해주신다면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을 바라보고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성도의 삶에 채워가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찬송이 점검되길 원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의 찬송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우리의 찬송이 왜 식었습니까? 찬송할 이유를 이 땅의 것들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2015년에 개봉한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33년을 배경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을 그린 영화입니다. 독립군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암살의 맨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이정재가 맡았던 주인공이 염석진이라는 인물인데 이 염석진은 청년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중간에 변절을 합니다. 독립 운동가들의 명단을 흘려보내는 이중간첩짓을 합니다. 그러나 들통이 나고 맨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독립운동가에 의해 처형을 당하는데, 이 여자 독립운동가가 염석진에게 총을 겨누면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때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 해방이 이렇게 빨리올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여러분 오늘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꿈꾸며 사는 인생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어느 날인가 염석진처럼 변절하고, 그러다가 무너지고, 그러다가 타락하고, 이 세상을 소망하며 사는 이게 오늘 우리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우주의 종말이 오던, 내 개인의 종말이 오던, 반드시 오는 것이 종말인데 여러분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이렇게 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내 개인의 종말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여러분 이런 부끄러운 고백을 하며 끝내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위하여 오늘부터라고 하늘의 소망을 두고 주님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걸으며, 오늘의 삶을 찬송하는 삶을 사여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셔야 합니다. 주님 다스리는 그 나라가 반드시 온다는 것, 이 소망이 저와 여러분들을 변절 시키지 않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둘을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고? 모르지, 그렇지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