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
벧전1:1-2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서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우리는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면 대개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서에서는 성도의 삶을 뭔가 실천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이 성도를 어떤 삶으로 이끌어 가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성도가 실천하는 좋은 행실이 아니라, 성도에게서만 보여 지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도 실천할 수 있고, 보여 지는 것이라면 성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삶이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인데 이 삶은 세상 사람들도 살고 우리도 사는 그런 삶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삶을 말합니다. 이 삶을 성경은 성도의 삶이다. 거룩한 삶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삶은 우리의 노력으로 의지로,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렸듯이 기도하고 금식하니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하고, 금식하게 하고, 주의 뜻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삶인가?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를 시작하면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지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쓰는 서신의 인사말입니다.
여기 “흩어진 나그네”란 말은 헬)“디아스포라”인데 이 단어는 디아(뿌려서) + 스포라(흩어지다)의 합성어인데 그 뜻은 뿌려서 흩어지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흩어졌는가?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뿌려서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들은 흩어지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 똘똘 뭉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행8: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렇게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서는 그 쓰여진 연대가 아주 중요한데 AD 63년 말(겨울)에서 64년 초까지 기록된 책입니다. AD 64년 7월 18-19일 로마의 대화제가 일어난 날, 로마의 네로 황제가 시상이 떠오르지 않으니 로마시내에 불을 질러고 시를 읇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실재는 기름 창고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화재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지며 시내에 번지면서 대화재로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화재가 컸던 것은 당시 로마는 고대 최고의 도시답게 많은 인구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섰던 반면, 소방 시설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예측하지 못해 시민들이 당황을 했고,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로마 시내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에 화재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핍박을 했던 겁니다. 이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될 때 까지 약 300년 동안 이 환난이 지속되었던 겁니다. 그때까지 신도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 묘지인 카타콤에서 집회를 가져야 했다.
베드로서는 이러한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앞두고 기록되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때를, 이 환난의 때를 대비케 하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특별히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남긴 글이 베드로전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서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 = 나그네, 베드로는 고난과 어려움을 어떻게 이기라는 것을 말하기 전에 나그네라는 신자의 본질에 대해 먼저 말함으로써 성도에게 있는 고난과 어려움들은 당연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라는 것은 편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그네에게는 그가 머무는 모든 곳이 떠나야 하는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세상에 정착할 것이 없는 것이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기업이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그네의 삶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나그네’(순례자, 방랑자)로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알아라 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라는 성도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어려움과 고통의 환경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힘쓰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의 환경에서 세상은 나의 나라가 아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나라에 돌아가 영원히 사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나그네라 함은 돌아가야 할 본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천국을 바라보는 자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고후5: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 “탄식한다”는 말은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신음한다”로 번역되는데 더 쉽게 설명하면 “끙끙 앓는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탄식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말합니다.
2.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소망의 삶입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 3가지 : 고난, 소망, 영광과 즐거움 (고소영)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소망을 가잘 수 있을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성도를 나그네로 말하는 것은, 떠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떠돌이는 돌아갈 곳이 없이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떠돌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라고 말하면 떠돌이라는 시각에서 왠지 쓸쓸하고 초라한 삶을 떠올리게 되지만, 신자는 쓸쓸하게 나그네 설움만 부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나그네의 삶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원(천국)을 소망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삶은 세상 사람들은 절대 살 수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네 가지가 나오는 ‘미리 아심, 피 뿌림, 피 흘림, 택하심’입니다. 피 흘림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피 흘림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피 뿌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나와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데 누구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는가? 미리 아시고,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피 뿌림을 얻는 것도 오직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택한 자에게만 가능한 은총일 뿐입니다. 때문에 피 뿌림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택하시고, 피 흘리시고, 피 뿌림을 통하여 믿음이 이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 중에 피 흘림은 있는데 피 뿌림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피 흘림은 있는데 피 뿌림이 없는 자의 삶이 어떤지 아세요?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뜻과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피 뿌림이 있다는 자의 증거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영원을 소망하며 삽니다. 하나님 나라에 뜻과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선물 받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 땅에 나그네로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핍박과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얻는 것과 비할 바가 없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택하시고 피 뿌림을 얻게 하신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은혜와 평강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나그네란 본향을 소망하면서 자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면서, 본향이라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결과입니다.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인해 보게 된 것입니다.
3.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내가 살고 싶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부르셔서 살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여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이 무엇이어야 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든 십자가의 삶입니다. 이 삶을 사도바울은 골1: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의 삶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덜 받으신 고난이 있어서 그것을 사도가 마저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어질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 고난을 우리의 육체, 즉 삶에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예수님으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신자의 삶에 채워서 계속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스스로 성도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삶을 요구한다면 성도라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임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고난은 육체적 괴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소망하고 바라보는 것을 보지 않고 전혀 다른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이 이미 고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삶을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간섭과 다루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길로 부름 받았습니다. 성도를 예수의 증인되게 하시겠다는 것도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으로 채우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삶에 순종하는 것이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고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초대교회는 한 마디로 변두리 종교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당속 지하무덤에 살았지만 그들의 영적 영향력은 세상 중심을 흔들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갔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시고 세우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밀나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바꾸었습니다. 기독교는 이제 숨을 필요도 없고, 지하 무덤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변두리 종교였던 기독교는 한 순간에 로마 도심 한 가운데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핍박받던 자리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은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기독교는 그때부터 망가지지 시작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죽기 위해 믿었다면 이제 성공하기 위해 믿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을 나그네의 삶이 아닌 정착민의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강원도 속초에 가면 아바이 마을이라 이름하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은 함경도 일대의 피난민들이 1‧4후퇴 때 피난을 내려와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활 터전을 잡은 곳이 지금의 청호동 일대이며, 이후 피난민들 중에서도 할아버지의 함경도 사투리 ‘아바이’를 따서 ‘아바이 마을’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 살면서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찬 가지로 오늘 이 땅을 사는 성도들의 영적 고향은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성도들의 삶은 나그네의 삶으로 늘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삶을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간섭과 다루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 삶은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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