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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설교/집회설교

신앙의 본질로의 회복(호6:1-6) 방배동교회 2017.12.10(주)

by 오용주목사 2017. 12. 25.

신앙의 본질로의 회복

6:1-6

 

우리가 처음 예배당에 나오던지 예수를 믿게 되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는 신앙생활을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십 년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몇 년을 몇 십 년을 신앙생활을 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고 신앙생활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전도하고, 봉사를 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잘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만약 무엇을 열심히 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성경에서 신앙생활을 가장 잘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예배 신부가 여러분에게 찾아와서 결혼생활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결혼생활을 잘하는 것인지 물었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결혼생활이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이 결혼생활이요, 그리고 이러한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 잘하는 것이 결혼생활을 잘하는 것이라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틀립니다. 부부사이에 관계는 심각하게 개어져있는데 밥 잘하고, 빨래 잘하면 결혼생활에는 아무 이상이 없이 잘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결혼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아내와 관계하는 것이 결혼의 본질입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결혼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 하기 위해 밥도 하고, 빨래도하고 청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의 관계는 심각하게 깨어져있는데 밥 잘하고, 빨래 잘하고 청소 잘하면 결혼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 가지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두잉이 아니고 비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또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이유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저내신 이유도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도,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호6:6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두 가지와 원치 않는 두 가지가 나오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두 가지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애,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두 가지는 번제와 제사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은 실제로 그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번제와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혹은 본질적인 것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는 말입니다. 그럼 의식은 필요 없는가? 아닙니다. 의식은 본질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물과 물 컵)

 

따라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본질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며 이것을 잘하기 위해 의식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이나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의식은 있는데 본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10-15절 보면, 이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을 분 아니라, 월삭과 모든 절기와 모든 대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아니하고 많은 살진 짐승들을 희생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은 많이 기도하고 금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과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왜 입니까?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이사야 시대나 예수님시대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 시대는 본질은 없지만 의식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본질도 의식도 다 사라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알면 돌이키기라고 할 텐데....

 

그러면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아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배워서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아는 앎을 말합니다.

 

저희 장모님이 담도 암으로 투병 중에 있을 때 자주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지방에는 의료기술이 서울보다 낮다보니 지방에서 안 될 때 마다 올라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치료받고 조금 좋아지시면 내려가고 하셨는데 한번은 이곳에서 치료를 받으시고 거제도 처형 집으로 내려 가셨는데 그곳에서 다시 통증이 찾아와 거제도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와 처형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기도 신앙생활을 하고 부산이 고향이고..그래서 처형이 내 제부도 목사님인데 부산에도 있었다고, 그러면서 이름이 오용주라고 했더니 그 간호사가 아! 오목사님, 그러면서 자기가 저를 잘아나고 그러더래요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세요? 정말 하나님을 잘 아세요?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구요? 그래도 내가 모태 신앙인인데, 내가 신앙생활을 한지가 몇 년이데... 혹시 여러분이 지금 알고 있다는 하나님의 지식이 거제도 그 병원의 간호사가 저를 아는 그 정도 아닌가요? 그 간호사가 저를 안다고 하는 것 참 감사하지만, 여러분! 정말 그 자매님이 저를 잘 아는 것일까요? 내가 지금어디 사는지, 지금 내가 어디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는지, 무엇을 마음 아파하는지.. 그 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는 것이라곤 과거 부산에 있는 한 교회 부목사로 있었다는 것과 몇 가지 저에 관한 지식은 갖고 있겠지마는 실제 저를 모르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이정도 피상적으로 아는 정도는 아닌가요? 여러분 진짜 하나님 잘 아세요?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누구입니까? 아버지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만약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왜 큰 아들을 가리켜 집안에 있는 탕자라고 합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모르기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보다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조명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알 때 근본적으로 삶의 변화기 있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율법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지식적 앎이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가 언제 근본적으로 변화가 있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입니다.

 

2.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식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시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을 보면 그들의 의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 이전에 마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나의 전부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것이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야 합니다.

 

18:1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3.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그것을 개인에게 보이시면 그것이 개인을 향한 부르심의 소망이요, 그것을 교회에 보이시면 교회의 비전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비전은 내가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우리의 비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노아를 보십시오. 노아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고민하다 그래 내가 방주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겠다. 해서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생각하다 그래 내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겠다 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서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고 그 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성도들이 위기다, 교회가 위기다, 위기다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뭐가 위기일까요? 교회가 일 년에 3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기 입니까? 아니면 성도의 수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까? 물론 이것도 위기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위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가운데 떠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인 이가봇과 같습니다. 오늘 교회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유업은 그쳤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쳤습니다. 우리의 보고는 모두 비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함께 하심이 사라진 것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믿는 성도들 개인이나, 가정을 보면 억압은 이루 말도 다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은 허공을 외치는 주문에 불과 하고, 기도는 하지만 기도응답은 아예 기대조차도 하지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정죄감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 이런 말들은 그저 성경에나 나와 있는 말씀이지 내 삶 가운데 일어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내 삶에 단 1%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입니다.

 

대하15:2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순히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던 사람이 예배를 빠지고, 십일조 잘 드리던 분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봉사를 잘 하전 분이 봉사를 접고.. 이 정도가 아니라 여기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외도가 뭔 줄 아세요? 아내 한 사람으로는 부족한 것이 외도입니다. 남편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아내도 필요하지만 다른 여자도 필요한 것이 외도입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으로는 한 분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한분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잘 사는 것도 필요하고, 성공도 필요하고, 더 넓은 아파트도, 자동차도, 이 세상의 쾌락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운데 다시 회복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 탕자

다시 말해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자리,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질투를 가지고 우리를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부르십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어떻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호6:3절에 나와 있는데 보시죠.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리하면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찾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반드시 그들에게 돌아오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아침에 되면 해가 뜨듯이 반드시 그들에게 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사랑하는 그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길만이 우리가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다시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는 은혜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