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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영적 리더십

04. 영향력의 출처(1)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리더쉽 4

 

 04. 영향력의 출처(1)

 

리더쉽은 한 편으로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각 리더들은 영향력을 얻는 출처가 서로 다릅니다. 따라서 리더쉽을 리더의 영향력이라고 할 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얻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장에서 살펴본 대로 리더의 비전의 출처가 다르듯이 영향력의 출처 역시 다릅니다. 세상적인 출처가 있을 수 있으며, 성경적인 출처가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영향력을 얻는 출처를 다루겠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영향력의 부당한 출처와 참된 출처를 그의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부당한 출처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영향력의 부당한 출처는 세 가지 이상입니다. 다만 이제부터 소개할 세 가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위가 영향력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지위가 영향력의 근원이 된 경우를 말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리더쉽은 지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서 한 세대만 앞선 세대만 해도 지위가 영향력의 출처가 된 일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란 지위만 가지고 있어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관, 판사란 지위만 가지고 있어도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위 자체로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지위 자체가 영향력의 출처가 되면 지위가 남용될 수 있다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위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위를 얻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위를 얻으려고 애를 쓰는 배경에는 보통 개인적인 야망이 있습니다. 또 개인적인 야망 외에 사람들의 평가, 성공에 대한 자부심, 허영심이 토대가 보통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들이 토대가 되어 지위를 얻기를 힘쓰면 나타나는 특징이 인본주의입니다. 지위를 얻으려고 할 때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노력이나 인간적인 수단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루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의해 다루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알지도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지위만 얻어본들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사람이 지위를 얻으면 정말 큰 일입니다. 이들이 리더가 되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직분을 얻으면 모두 다 함께 죽는 일에 헌신할 것입니다. 함께 죽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슬픈 사실이지만 엉뚱한 이유로 직책을 구해 리더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조직과 교회에도 숱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사역 규모가 곧 자존심이다. 오스왈드 샌더스가 제기한 대로 사람이 직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책이 사람을 구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어느 교회의 경우, 장로가 되기 위해 선거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뇌물을 쓴다는 말을 들을 적도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영적 리더는 영향력을 얻기 위해 지위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영적 리더쉽은 성령의 사역과 성품에 근거한다. 즉 인도하시고 능력주시는 성령의 임재가 없다면 리더는 직위와 상관없이 영적 권위를 얻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느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영적 권세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향력은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둘째, “권세영향력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마오쩌뚱은 힘이 총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신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그가 숭배하는 공산주의를 신봉하기 위한 전쟁에 몰아 넣어 희생시키기도 하였으며 백성들을 총칼로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사독재 시절을 보내며 권세가 영향력의 출처가 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지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갔습니다. 한 때 불같이 호령하며 나라를 다스렸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향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영향력은 권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과거 구()소련연방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나라의 리더쉽에 따르지 않자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위와 같은 그릇된 자세가 교회 내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영적 독재야말로 가장 폭압적일 수 있다. 힘으로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면 반항을 불러오게 돼 있다. 내 방법만 옳다는 식의 접근은 기업체는 물론 교회에서도 통하지 않는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력 전략을 쓰는 목사들은 성질이 불같아 자기 리더쉽에 따르는 교인들에게는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면 불끈 화를 내며 감히 대든다고 질책한다. 설교 강단이 선거 유세장이나 되는 듯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목사들도 있다. 국회에 법안을 통과시키는 사람처럼 영향력 있는 교인들의 지지를 얻으려 로비 활동을 벌이는 리더들도 있다. 자기를 험담하는 교인은 목자가 필요한 양이 아니라 늑대라며 배척할 정도로 생각이 비뚤어진 목사도 있다. 교인들을 윽박지르며 복종을 강요하는 목사들은 결국 텅 빈자리에다 대고 설교하거나 구직 광고를 내거나 둘 중 하나의 신세가 된다. 그런 사태가 벌어져도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를 따르지 않는다며 고집스레 교인들만 탓하는 목사들이 있으니 더욱 기막힌 일이다.

 

헨리의 말은 권세가 리더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 직위나 직책은 파우어(Power) 즉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의 직위에는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 영향력은 아니라는 것이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주장입니다. 직책에 존재하는 힘은 남용될 소지가 농후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남용된 특징이 바로 하나님을 자기 편 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내 지도자들 즉 목사나 장로에게서 이런 특징이 나타날 수 있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변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들 편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들은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고 ale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가 남용된 극명한 예입니다.

 

리더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우리는 여호수아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리더 중의 리더였습니다. 여호수아 513절부터 1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많은 신학자들은 위 구절에서 등장하는 군대장관을 성육신 하시기 전의 그리스도로 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자 그에게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이 질문이 의미하는 바는 당신은 우리편입니까? 아니면 적군 편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이 대답은 둘 다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편도 아니고, 원수들의 편도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너희들 편을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장관으로 여기에 왔노라. 너를 도와 이기게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주도하려고 왔노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 여호수아는 그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말하기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군대장관의 말을 따라 신발을 벗고 군대장관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리더로서의 매우 중요한 자세를 만납니다. 즉 자신이 심부름꾼인 것을 알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입니다. “종이 듣사오니 말씀하옵소서라는 자세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는 자세가 필수입니다. 여기서 리더쉽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자기 편 삼으려할 때 권력을 남용하게 되어지며 영향력 마저 나오지 않습니다. 진정한 리더가 아닙니다.

 

셋째, “성격영향력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부당한 출처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일입니다. 어느 교수님이 계셨는데 성품이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곁에 있기만 해도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꾸만 가까이 하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보고싶고, 가까이 하고 싶었습니다. 이상하게 그분만 만나면 편합니다.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지는 분입니다. 이처럼 어떤 분은 성격상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카리스마적인 요소가 있어 사람들을 휘어잡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따르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그것이 성서적 영향력의 출처는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끄는 힘이 있다는 것이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영향력의 출처를 삼으면 하나님과는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 가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나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모두를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꼴이 됩니다. 영적인 출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서적 리더쉽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서적 영향력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부당한 영향력의 출처를 살펴보았다면 이제부터는 참된 영향력의 출처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뒷받침영향력의 출처가 된 경우입니다. 리더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출처는 하나님의 뒷받침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말입니다.

 

영적 리더의 정당성을 가리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의 인증이다. 하나님이 진정한 영적 리더로 인정하신 사람들의 예는 성경과 역사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인증은 하나님의 뒷받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신 진정한 리더 중 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그는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거역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광야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리더 중의 리더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디에서 그런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만 명도 아니고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인도할 수 있는 영향력의 출처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모세의 영향력은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모세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리더로서의 자질이 풍성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리더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우선 모세는 눌변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사회에서나 교회 내에서 리더에게는 커뮤니케이션(Communacation)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세가 가장 먼저 핑계거리를 찾을 때 언변을 내세웠던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눌변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성격이 매우 급했습니다. 그가 40세 때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려고 했을 때나 반석에서 물을 낼 때 그랬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는 자신의 업무를 위임하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과중한 업무를 혼자 다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장인에 의해서 중간 리더들이 세워질 때까지 그렇게 사역을 했습니다. 리더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살인을 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도망자로 수십 년을 살면서 자신감을 잃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리더쉽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었던 그 큰 영향력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왔습니다. 출애굽기 3311절 전반부와 민수기 126절부터 8절입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

 

보십시오. 모세의 리더쉽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나왔습니다. 모세의 영향력의 출처는 하나님과의 사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200만 명을 수십 년 동안 이끈 영향력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함께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리더를 따르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 즉 성서적인 영향력의 출처입니다.

 

모세는 참으로 귀한 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대하게 사용하실 때에도 그는 매우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제들이 자기를 대적할 때에도 스스로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내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입지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사람이었습니다(12:3).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요구하거나 고압적인 자세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험담하거나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뒷받침하셨습니다.

 

성경은 또 한 사람의 귀한 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우선 우리는 여호수아가 결코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 모세의 뒤를 이어 민족의 리더가 되었음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만큼 뛰어난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위대한 지도자의 후임으로 민족을 이끌어야 하는 여호수아의 사명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모르긴 해도 엄청난 마음의 부담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전임자가 세계적인 인물일 경우, 후임자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무지하게 받게 마련입니다. 어느 목회자는 이런 부담감으로 술을 한 잔씩 마시다가 알콜중독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마침내 교회를 사임하고 사역을 할 수 없는 위치에 처했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전임자의 뒤를 이어 사역해야 한다는 사실은 대단한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임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모세였으니까요. 전임자가 다름 아닌 하나님과 대면하며 말씀을 나누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상황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여기다가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사역은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앞두고 여호수아는 리더의 직책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안팎으로 여호수아는 정신적, 물리적 압박에 시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11절부터 6절입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여기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영향력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영향력이 나온다는 진리입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은 여호수아의 리더쉽의 자질이나 기술이 영향력의 출처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호수아에게도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에 관한 정보나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모세에게서 배운 전술이나 전략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질이나 지식 등은 아무런 영향력의 출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성서적 영향력의 출처가 보이시나요?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성서적 영향력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영향력이 나왔습니다.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질투가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여호수아를 뒷받침하신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뒷받침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순종했던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순종하였습니다. 다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고백한 말입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1:16-18)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모세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뒷받침을 보았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여기에 리더쉽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영향력의 출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3:7)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나 모두 영광의 자리를 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부와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들을 인도할 영향력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향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설득하고 조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한 일은 오직 한 가지 곧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한 것뿐입니다. 다만 그들이 한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주셨고 아울러 그들이 구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더해 두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뒷받침하십니다.

 

사무엘의 예를 보아서도 이 점은 분명합니다. 사무엘상 3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이 구절은 사무엘을 통해서 주어진 예언이 하나도 실현되지 않는 일이 없도록 모두 이루어지도록 뒷받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무엘에게 뒷받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사무엘을 따랐을까요? 상상이 가시나요? 사람들 앞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사무엘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얼마나 뒷받침해 주셨던지 예언 한 마디라도 다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무엘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사무엘의 카리스마에서 이런 영향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이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잘 조종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나요? 아닙니다. 사무엘의 직분에서도 이런 영향력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권세나 지위에서 영향력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었던 지도력과 영향력은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나왔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2:30 후반절)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엘리를 버리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택하십니다. 그러니까 엘리는 하나님을 멸시하였기에 버림을 받았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겼기에 하나님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뒷받침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요 목표가 되는 삶이 되는 것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리더쉽은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영향력의 출처는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일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자들이 리더가 될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군림하지 않습니다.

 

찰스 피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대각성운동 때 쓰임받은 분입니다. 직업은 변호사였습니다. 그도 역시 하나님의 친밀함에서 비롯된 영향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였던 인물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리더의 삶을 기뻐하시면 그분의 거룩한 임재가 확연히 나타난다. 19세기 전도자 찰스 피니의 삶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분명히 나타났다. 1826년 뉴욕 공단에 간 피니는 친척이 감독으로 있던 면 제조 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많은 여공들이 베틀과 방적기에서 일하고 있는 커다란 방을 지날 때였다. 여자들 몇몇이 피니를 보며 뭐라고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피니가 다가가자 그들은 더 심하게 동요했다. 피니가 3m 앞으로 다가가자 한 여자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곧 다른 사람들도 흐느끼기 시작했는데 자신들의 죄가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는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퍼져 온 공장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불신자인 사장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고 잠시 공장 문을 닫았다. 그는 피니에게 설교를 부탁했다. 영혼의 평안을 찾는 법을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누구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그저 공장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도 피니의 삶 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해서 주변을 압도하며 사람들을 뒤흔든 것이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뒷받침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뒷받침하시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들어올리실 때 세상도 똑바로 그를 주목하는 법입니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21:22)라고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말한 배경에는 아브라함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았기에 시바의 여왕은 많은 보물을 가지고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걸프전 승리의 주역인 부시 대통령은 걸프전이 발발하던 날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특별히 기도부탁을 했습니다. 이처럼 영향력은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나올 때 진정한 영향력이 됩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진정한 영향력은 하나님의 뒷받침에서 나온다는 주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인정만이 영적 리더를 확증해 주는 근거이므로 리더는 반드시 자신의 삶을 평가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증거가 충분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증표들이 우리들 삶에 나타나기 때문에 리더들은 자신들의 삶을 비춰보아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증표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크게 다섯가지로 자신의 삶을 비추는 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리더와 그 조직에 대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신다. 미래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구상과 개념을 제시하는데도 결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리더라면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 자기 비전을 제시하는 게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비전의 출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끊임없이 리더는 자신의 비전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시가 아니면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공의 이력이 없다면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비전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이 인정하시는 리더의 명예를 때가 되면 회복해 주신다. 리더는 일하면서 비난을 듣기 마련이다. 비난이 반드시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신호는 아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비난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리더라면 결국 하나님이 결백을 입증해 주신다.

 

리더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나 어느 사회에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점을 봅니다. 사실 예수님보다 더 뛰어난 리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수많은 대적을 대해야 했습니다. 비난 때문에 예수님의 명예가 땅에 곤두박질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사실은 하나님의 세우신 리더로서 실추된 명예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가장 높은 보좌에 앉히시고 모든 무릎으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물론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시는 때가 사후일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랬습니다. 자기들 시대에는 모두 다 거짓 선지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그들은 그런 이유로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보지 못했던 당시의 백성들은 그들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른 후 그들은 참 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마저도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참 선지자였음을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종들의 명예를 때가 되면 회복시키십니다. 그래서 리더들은 땅에 떨어진 자신들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그랬으며,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복권을 위해 애를 쓰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의지하였습니다.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가면서도 요셉은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변명할 수도 없는 처지 속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마침내 구해주셨습니다.

 

셋째, 리더의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로 사람들의 삶이 변화된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끄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은 마음이 변화돼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동기를 불어넣는 게 리더의 역할이지만 사람들의 영적 진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리더십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단지 리더의 재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인간의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뒷받침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사람들도 주님의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리더를 보면서 사람들 역시 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게 됩니다. 좋은 의미에서 전염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흐른 연고입니다.

 

리더의 카리스마적 요소나 자신의 재능으로 사람들을 회유하거나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나온 영향력이 아니면 사람들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리더들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을 만지시고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른 사람들도 리더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본다. 하나님은 당신 뜻에 즐거이 복종하며 당신의 약속을 믿는 리더를 택하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강하게 역사하신다. 리더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리더가 자기 힘으로 일하기 때문일 수 있다. 믿음으로 행하는 리더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이 뒷받침하시면 사람들은 리더가 누구인지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리더는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스스로 세우는 것이란 다음과 같은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날 좀 알아 줘. 내가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야.

 

자기가 자기 노력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가 바로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루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되 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시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리더가 자기의 때에 자기의 방법으로 또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세우려고 든다면 이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난 까닭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은 반드시 숨겨진 기간이 있었습니다. 감춰진 기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을 줄기차게 찾고 기다리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자라나는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세우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즉각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압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 뒷받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반 사람들이 알아차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하며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믿는 리더들을 세우시며 그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음은 다시 한 번 음미해 볼만한 말입니다.

 

리더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리더가 자기 힘으로 일하기 때문일 수 있다. 믿음으로 행하는 리더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곰씹어볼 일입니다. 자기 자원으로 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는지를 말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리더는 틀림없는 표지로 그리스도를 닮아 있다. 그는 매사에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행하며, 따라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영적 리더의 성공은 돈이나 숫자나 교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너무나 정확한 지적입니다. 오늘날 이런 점이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세나 교인 수가 자부심의 상징이 되어버린 우리 세대에서는 위의 견해가 빛을 보지 못합니다.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하면 그것이 곧 성공인 줄 아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다른 교회 길목에다 주일날이면 자기 교회 버스를 정차시켜 놓고 자기 교회로 데려가는 일까지도 있습니다. 전도사를 채용하여 할당된 전도의 양()을 채우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자기 교회로 끌어 모으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다른 교회를 비방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 목회자를 비방하는 일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성공에 대한 개념이 빗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리더쉽의 이해 역시 빗나가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리더들을 소위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합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뒷받침 속에 이루어진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세나 교회 건물의 유무가 성공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적용은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을 해 돈을 무조건 많이 벌었다고 성공적인 사업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기준으로 돈을 벌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교회이건 사회이건 상관없이 리더 자신뿐만 아니라 리더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르는지가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인가 아닌가의 진정한 증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의 표징은 하나님의 뒷받침으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뒷받침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는 자들을 뒷받침하십니다.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를 중단하거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유일한 열망으로 삼지 않으면 사역은 계속 확장되거나 과거의 기억 때문에 사람들은 모여들지 모르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뒷받침은 없어집니다. 다만 어제의 사람이 될 뿐입니다. 사역은 진행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뒷받침 속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일은 없어집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하나님이 뒷받침하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증표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끝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증을 얻을 것인가? 열쇠는 리더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리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진 순종할 뿐이다.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는 각오와 하나님 뜻을 위해 온전히 자아를 버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사람끼리 헌신에 기초한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께 의지한 결과이다. 위대한 영적 리더들의 전기를 보면 하나님과 구체적 만남의 시점들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삶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순간들이다. 위대한 리더들은 그 후로도 주님과 만남을 지속하며 그 시간을 통해 자기 삶의 모든 영역을 조건 없이 철저히 그분께 드린다. 하나님을 더 알수록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더 일심으로 자신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리더쉽은 영향력입니다. 영향에는 참다운 출처와 부정적인 출처가 있습니다. 참다운 출처는 하나님의 뒷받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뒷받침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여러분의 모든 것으로 삼으십시오. 하나님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서십시오. 명예나 부, 개인적인 안락이나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기만을 구하십시오. 사역의 확장이나 영향력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만 목적되는 삶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리시며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과 비전을 보고 순종해 오면 하나님의 뒷받침하시는 역사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이 때 구하지 않았지만 영향력 역시 함께 받게 될 것이며 사역 역시 확장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지역교회의 수적(數的) 성장을 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 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루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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