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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자료/영적 리더십

01. 리더쉽의 정의

by 오용주목사 2016. 9. 16.

 

하나님 나라의 리더쉽 1

 

01.리더쉽의 정의

 

사전적의미에서 리더(leader)란 흔히 단체나 조직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리더쉽(leadership)이란 지도자의 영향력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헨리 블랙가비(Henry Blackaby)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의 리더쉽 즉 영적 리더십은 사람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리더쉽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다른 실정입니다. 그러나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정의가 가장 무난하지 않나 싶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리더쉽에서 영적 리더쉽의 특성을 몇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영적 리더는 사람들을 움직여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가게한다.

둘째, 영적 리더는 성령께 의존한다.

셋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께 책임진다.

넷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사람들뿐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영적 리더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한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적 리더는 자신의 리더쉽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안다. 그래서 단순히 사람들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향으로 이끄는데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 세대를 향한 목표를 실제로 이루시도록 일한다  예수님의 리더쉽 핵심은 아버지와의 관계였다.

 

리더쉽은 교회내 사역의 일환이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거나, 학벌이 높다고해서 교회의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명 교회의 리더는 일반 리더와는 다른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부터 일단 교회사역 전반을 살펴보는 가운데 교회내 리더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사역의 전반적 고찰

 

우리 신앙의 모든 기초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입니다. 교회의 기초 역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나 사도들의 사역은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함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편견이 있습니다. 흔히 말씀파성령파가 그것입니다. 이런 편견의 이유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을 나누는 경향이 교회 내에 있습니다. 곧 말씀을 강조하는 부류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부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강조하는 부류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부류는 체험을 우월시하는 오류를 범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세가 되면서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결합되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두개인들은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능력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사두개인들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들이 성경에 대해서 박식하고, 또 사람들에게 성경을 잘 가르쳤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알게되는 신앙의 본질 즉 십자가의 복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배제된 사두개인들의 사역에는 성령의 역사 즉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학자들은 교회의 기능을 크게 네 가지로 말들 합니다. 네 가지 기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능, 사람에 대한 기능, 신자 사이의 상호간의 기능, 불신자 사이의 상호간의 기능이 그것들입니다. 이제 이 기능들을 하나하나 설명드리겠습니다.

 

교회의 하나님을 향한 기능에는 예배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대한 기능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토대하여 세워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교회를 친히 회복시켜 나가십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회복되어질 때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예배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예배의 핵심은 당연히 찬양과 경배입니다. 그리고 회복되어지는 찬양과 경배의 근거는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예배입니다. 회복된 교회의 예배 모델인 셈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여기 하나님 나라의 예배에는 수많은 천사들과 생물들, 장로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여하는 무리들 곧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과 생물들, 장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온통 초점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만 가있습니다. 또 하나 공통적인 특징은 예배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지 않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직접 뵙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예배의 본질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예배는 먼 훗 날의 예배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계시록 4장에서처럼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신앙의 본질이 가능해집니다. 위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수많은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 생물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노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단순히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라는 교리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직접 뵈옵는 지식에서 나온 노래라는 점입니다.

 

예배란 마음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은혜를 구하지 않는 자세로 오직 주님만이 자신의 삶에 유일한 도움임을 고백하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흔히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언어로 일관하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온마음을 한 가사 한 가사에 실어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부르는 찬양과 경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주일이 되었기에 성수주일하기 위해 모여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되어지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상한 마음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을 예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영혼이 하나님을 갈급해하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기준에서 드려질 때, 지친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 회복하는 일이 예배 때에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갖게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흥을 간구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 4장과 5장을 보면 모든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그 분을 향하여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이 예배하는 예배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늘날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예배를 드리기 쉬운 반면 하나님 나라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예배가 신약의 예배이며 우리들이 드려야 할 예배입니다.

 

교회의 신자를 향한 기능에는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회복이 된 후에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 기능 가운데 신자를 향한 기능입니다. 그런데 성도들끼리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단위가 소그룹입니다. 교회마다 소그룹의 명칭을 달리할 수 있습니다. 소그룹이라 함은 셀, 구역, 목장, 오이코스 등으로 불리우는 작은 단위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소그룹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의 교제가 단순히 인간들만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 모임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보면 소그룹은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한 영역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이 소그룹 모임이 실질적이었습니다. 부자들은 전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실제적으로 나누며 살았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날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전재산을 파는 성도가 혹 있을지 모르지만 거의 없습니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교회 가운데에서 이 부분이 조금씩이라도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토대하여 더욱 세워지며 성령의 사역이 더욱 회복되면, 예배가 회복되어지는 일을 통해 이 부분이 되어진다고 믿습니다.

 

교회의 불신 세계를 향한 기능 중에는 전도와 섬김이 있습니다

 

신자간에는 사랑의 교제가 필요한 반면, 믿지 않는 불신세계에 대해서는 전도와 섬김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능력 전도와 관계 전도롤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대 가운데에서 전도하시길 원하시는 것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능력전도와 관계전도가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불신세계를 섬기는 일은 전도와 구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을 섬기는 일은 교제라고 하며 불신자들을 섬기는 일은 전도와 구제입니다. 구제는 전도와 더불어 교회가 감당해야할 긍휼의 사역의 한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오면 교회 가운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력하게 있게됩니다. 그리고 부흥이 오면 교회 가운데에서는 역사상 항상 나눔의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부흥의 역사가 증언하는 바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긍휼의 사역이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부랑자들, 거지들을 섬기는 일이 하나님이 부흥으로 임하실 때마다 항상 넘쳤습니다.

 

교회의 사람을 향한 사역 가운데에는 양육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역 가운데에는 사람을 향한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양육입니다. 양육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전교인 사역자화입니다. 사역에 있어서 모든 지체들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8절부터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희망하십니다. 아니 명령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목회자가 되라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직분, 위치, 직책, 사업, 직장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사역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에베소서 4  11절과 12절입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구절을 보아도 사람들을 세우시는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케함입니다. 사람을 세워서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목적으로 일군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들이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전교인 제직화가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교회를 몇 개월만 다녀도 신앙의 성숙이나 주님께 대한 헌신도와는 상관없이 거의 집사가 됩니다. 우리는 전교인 제직화가 아니라 전교인 사역자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전교인 사역자화에서 중요한 부분이 리더쉽입니다. 그리고 리더쉽이란 누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군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장로님 한 분이 새로 교회에 더해졌는데 목사님의 눈에 일을 잘 하실 것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있지 않아 교회의 장로님으로 임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엉망입니다. 헌신하거나 일을 하기 보다는 일을 그릇쳤습니다. 교회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이 교회 내에 많습니다. 이만큼 교회 내에서 리더쉽을 분별하여 일군을 세우는 일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난 한일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히딩크를 잘 압니다. ‘히딩크 신드롬이 생겼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았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 대표팀을 월드컵 4강에 진입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어느 선수가 자기 몫을 잘 해낼 선수인지를 분별하여 키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포츠신문기자들이 인정하는 바입니다. 잠재력이 있는 선수를 발굴한 것이 먹혀들었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후 히딩크 리더쉽이라는 단어가 생성될 정도로 그의 리더쉽은 탁월하였습니다. 리더로서 리더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치관은 성경과는 여러 면에서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연고로 어느 누가 잠재력이 있는 리더인지 교회 내에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 실정입니다. 분별할 수 있는 눈이 거의 없습니다. 그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분을 잠재력이 있는 일군으로 쳐다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만일 열심히 리더의 가장 주요 요건이라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리더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리더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지도자들이 있어지만 주님의 눈에는 백성들이 목자없는 양처럼 느껴지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 가운데에서 이것을 하기 원하시는 것같습니다. 우선 하나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로서의 자세와 자질들을 갖추기를 원하십니다. , 이 일로 인해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리더는 섬기는 자 종입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건물의 철골구조물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철골을 세우는 일은 기초작업에 해당합니다. 철골이 얼마나 튼튼히 세워지느냐에 따라 건물의 견고성도 더해집니다. 특별히 큰 건물일수록 철골은 더욱 든든하게 세워야만 합니다. 교회 내에서 리더가 어떻게 세워지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갈림길에 서게됩니다. 리더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의 일군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따라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이 리더로 세워져야 합니다. 거기에 사람들이 붙고 더해짐으로 건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교회를 건물에다 비유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20절부터 22절과 41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처럼 리더쉽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워져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부대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살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리더쉽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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