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백성의 회복을 위한 내면세계의 회복 No. 2 내적치유의 필요성 ②
내적치유와 하나님의 의도
시편 103편 1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가 있습니다. 외적 세계란 인간의 의식을 통해 느끼고, 수행하고 조절하는 세계입니다. 예를 들면 환경이 있습니다. 내적 세계란 우리의 의식으로는 느낄 수 없으나 엄연한 가치로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예를 들면 영적 세계나 마음 등이 있습니다.
흔히 정신과 의사들은 내적 세계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상담을 통한 방법과 정신의학적 방법 그리고 내적치유를 통한 방법이 그것입니다. 상담을 통한 방법은 말 그대로 상황과 환경적인 영역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정신의학적 방법은 내담자의 어릴 적 아픔이나 어릴 적 부모와의 관계를 추적해 거며 치유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 때, 왜 그가 열등감이 많을 수밖에 없는지, 왜 주변을 왜곡되게 보는지를 알기 위해 내담자의 성장과정을 살피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는 원만했는지, 다른 사람들과는 잘 지냈는지를 알아보며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과거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입었을 때 지금은 유사한 피해를 입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피해를 준 사람과 비슷한 사람만 만나면 피해의식에 빠지는 경우 등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적치유를 통한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전제하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부모가 있는 동시에 영적인 아버지가 계십니다. 성도의 현재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온다고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적하며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방법입니다.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기에 그 결과 지금의 모든 잘못된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죄 문제가 있었기에 문제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찾아내어 내면의 세계로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내적치유를 다음과 정의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내적치유란 마음 곧 영혼의 영역에 있는 병을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치유해 가는 구원의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는 내적치유의 정의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는지 살펴야만 합니다.
창세기 3장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문제가 생긴 암울한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실제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죄를 범했을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담아!”부르시면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로 인해 불안했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습니다. 문제는 아담이 숨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담의 마음이 너무 아팠기에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상담할 때, 너무 문제가 아프면 또는 받은 상처가 너무 크면 성경을 읽어줘도, 기도를 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픈 사람들에게 “기도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실제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럴 때에는 먼저 무얼 하라고 하기 전에 그 사람의 아픔을 감싸주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우선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파할 때 나무라시기 보다는 우선 쉼과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대의 인간들이 너무 아파합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너무나도 아픈 이들로 가득합니다. 영혼이 굶주린 자들, 사랑에 목마른 자들, 길을 찾지만 찾지 못한 자들로 인해 우리 주변은 회색 빛깔로 물들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다시 찾으신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죽옷의 의미를 알기를 축복합니다.
아담은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했으나 잘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가죽옷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담의 아픔을 덮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속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내장들은 모두 가죽옷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만일 가죽옷인 피부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징그러워 한시도 쳐다 볼 수가 없었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세계도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옷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재능과 능력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 것도 없었으나 살면서 하나님은 능력을 주셨고, 주변에 사람들을 주셔서 외롭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속상한 일은 잊으라고 망각의 은사도 주셨습니다. 돈도 주시고 재능을 주셨습니다. 착한 성격을 주셨고, 예쁜 얼굴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면의 가죽 옷으로 자기 속을 가리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면의 세계는 점점 더 병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옷이 아니라 옷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상한 부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구원의 과정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과정은 칭의의 과정입니다. 의롭다고 여김받는 과정이지요. 사람들은 내면의 옷으로 자신의 속을 자꾸만 숨기려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옷 속의 부분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계시기에 더 이상 대책이 서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옷을 찢어 놓으십니다. 여러분, 감추려다가 옷이 찢어질 때의 아픔을 아십니까?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옷을 찢으시면 너무 아파 우리는 엉엉 울어 버립니다. 대개 이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아픈 부분들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아픔은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새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것을 칭의의 과정이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 속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기에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구원의 둘째 과정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내 속이 변화되는 과정이지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운 옷을 입고 살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기 속에 구원받지 못한 부분들이 있음을 보고는 대개 절망감을 가집니다. 바로 여기에 내적치유의 목표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성화의 과정을 출애굽사건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출애굽 이후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그것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광야란 무엇일까요? 내적 치유의 관점에서 볼 때 광야란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과 가죽옷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은 곳입니다. 즉 입고 있던 모든 옷들을 벗기신 곳입니다. 내면의 옷을 벗기시고 내면세계 속의 문제들을 드러내신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통과하면서 자기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외관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기적 같은 손길에 의해 능력을 경험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속을 들추시면서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여 사는 법을 가르친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어떤 문제가 드러났습니까? 바로 내면의 문제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내면에 썩어있었던 문제들이 드러난 것입니다. 종살이 때의 상처가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문제들은 그들이 종살이 당하면서 받은 상처들입니다. 학대받을 때 생겨난 분노 같은 아픔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처와 분노 등을 광야생활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고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하여 살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들로 살게끔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너무나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이해 홍해를 건넜지만 즉, 하나님의 능력의 옷을 입혀주셨건만 그들은 여전히 괴롭고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역사와도 비슷합니다. 일제의 강압시대와 분단의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만 여전히 아파하고 반목하는 현재의 우리나라의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종살이할 때 받은 상처들이 내면세계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속은 종이었습니다. 외양은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이지만 내면은 썩어 있었습니다. 겉은 풍요로운 가나안이지만 속은 애굽이었으니까요. 겉은 하나님의 훌륭한 군대였지만 속은 두려움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신들 무얼 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곳입니다. 광야란 하나님 외에는 대안이 없는 곳으로 믿음으로 사는 법, 은혜에만 의지하여 사는 법을 가르치기에는 완벽한 장소였습니다.
성서는 모세가 약속의 땅 입구에서 열두 지파의 대표들을 가나안에 염탐꾼으로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들 중 두 명만 자신감을 가졌고, 나머지 열 명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그들이 떨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식민지 아래에 오래 있었던 영향으로 자신보다 큰 사람들만 보면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방향과는 정반대의 장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백성들의 속을 드러내시고 다시 치유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한국사회나 한국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한국사회나 한국교회에 많은 은혜와 능력으로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경제적인 부, 세계사에 빛날 한강의 기적, 교회마다 넘치는 사람들, 세계적으로 큰 교회들, 많은 성도수와 신학자, 수많은 경건 서적들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인도는 컸습니다. 그러나 속은 여전히 치유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 결과, 겉은 성장하고 건물도 크게 지었지만 속에서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투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물로 찢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목회자 사이에, 목회자와 장로 간에, 장로와 장로 간에, 은사가 강한 자와 은사가 약한 자들 사이에, 소위 말씀파와 성령파 사이에 그동안 찢겼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죄로부터 시작하여 선조들의 죄악을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영적 형편을 정확히 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인식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강의자료 > 내적치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06. 선천적 상한심령의 종류 No.1 - 열등감, 죄책감, 소외감 (0) | 2016.09.14 |
---|---|
05. 상한심령의 시작 (0) | 2016.09.14 |
04. 내적치유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0) | 2016.09.14 |
03. 내면세계에 대한 잘못된 신앙자세 (0) | 2016.09.14 |
01. 내적치유에로의 초대 (0) | 2016.09.14 |